다이도지 아야코(일본어: 大道寺 (だいどうじ) あや子 (こ): 1958년 10월 20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다이도지 아야코(일본어: 大道寺 (だいどうじ) あや子 (こ): 1958년 10월 20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그룹의 멤버이자, 리더 다이도지 마사시의 아내였다. 구성은 고마자와 아야코(일본어: 駒沢 (こまざわ) あや子 (こ)). 북해도 쿠시로시 출신. 북해도쿠시로코료고등학교 졸업. 재학 중에는 성적이 우수했고, 빙속 동아리에서 활약하여 졸업생 총대까지 맡았다. 호사약과대학에 추천입학하여 반더포겔 동아리 활동과 학생자치회 활동을 했고, 수업료 인상 반대투쟁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등학교 동창 다이도지 마사시와 동창회에서 재회하여 다이도지의 “연구회”에 오르그되었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거의 접점이 없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 “연구회” 참여를 계기로 교제하여 동거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신주쿠의 병원에서 악제사로 근무했고, 다이도지와 결혼했다. 이후 도내의 시약회사로 이직했는데, 폭탄 재료를 입수하기 위해서였지만 근무태도가 매우 양호하여 주위로부터 평판이 높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반에 참가하여 미츠비시중공 폭파사건 등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 미츠비시 사건 때는 시한폭탄 설치현장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직 내에서의 코드네임은 “아사카와”. 아사카와 마키의 팬이었기 때문이었다. 1975년 5월 19일,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남편과 함께 긴급체포되었다. 체포 직전 청산가리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수사관들에게 저지되었다. 수려한 용모와 주변의 평판으로 인하여, 처음 체포된 후 수사과정 및 언론보도에서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과격사상에 끌려들어간 종범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동정론이 있었다. 그러자 아야코는 오히려 그런 목소리에 반발하여 에키다 유키코 등과 함께 격렬한 옥중투쟁・법정투쟁을 벌였다. 1977년 일본적군이 다카 사건을 일으키자 후쿠다 내각의 “초법적 조치”로써 에키다와 함께 석방・출국하여 일본적군에 합류했다. 1985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지원자들에게 투쟁을 계속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1994년 6월, 사문서위조 혐의로 인터폴을 통해 국제수배되었다. 1999년 홍콩에서 마츠다 히사시・시게노부 후사코와 회동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1년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하자 남미에서 반도 쿠니오와 함께 「일본적군 해산선언 무효선언」을 발표했다. 2022년 현재 생사 불명이며, 여전히 국제수배 중이다.
사사키 노리오(일본어: 佐 (さ)々 (さ)木 (き) 規 (のり)夫 (お), 1948년 8월 27일 ~ )는 일본의 신좌파…사사키 노리오(일본어: 佐 (さ)々 (さ)木 (き) 規 (のり)夫 (お), 1948년 8월 27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 일본적군에서 활동했다.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포목행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 가업을 도와 상경. 형이 참여한 제3세계 혁명문학을 소개하는 “레볼루트사”에 관여하게 된다. 그 형의 증언에 따르면 1967년경부터 사이토 노도카와 알게 되었다. "조선혁명연구회"를 결성, 1960년대 후반부터 대한민국에 도항하면서 일본의 조선침략과 조선의 저항운동사를 공부했다. 1972년 사이토와 함께 아이누모시리를 여행하고 일본의 아이누 침략사를 공부했다. 1974년 다이도지 마사시로부터 "늑대"에 초대되었고, 이후 비공개 불법활동에 참여하여 부대의 일원으로서 연속기업폭파사건에 관여했다. 1975년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사건 때는 예고전화를 걸었다. 1975년 6월 체포되지만 8월 일본적군이 쿠알라룸푸르 사건을 일으키면서 석방, 출국되어 일본적군에 합류했다. 이후 일본항공 472편 납치사건, 미쓰이물산 마닐라지점장 납치사건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봄 무렵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도난당한 교토시의 한 회사원의 여권을 바탕으로 만든 위조여권을 가지고 필리핀 마닐라의 아파트에 잠복하면서 동남아시아와 유럽 수 개국에 출입하고 있던 것이 1988년 8월에 밝혀졌다. 1998년 오쿠다이라 쥰조와 함께 위조여권을 취득하기 위해 도쿄에 들어왔음이 일본 정부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으며, 현재도 국제수배 중이다. 2010년 4월 이후에 일본 정부가 게재한 수배 사진은 1998년 촬영된 것으로 대체되었다.
다이도지 마사시(일본어: 大道寺 将司 (だいどうじ まさし), 1948년 6월 5일~2017년 5월 14일)는 일본의 신좌파…다이도지 마사시(일본어: 大道寺 将司 (だいどうじ まさし), 1948년 6월 5일~2017년 5월 14일)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그룹의 리더격인 인물이었다. 홋카이도 구시로시 출신이다. 신문 스크랩을 하던 공무원 아버지, 홋카이도 도의회 의원이었던 의붓외삼촌, 60년 안보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의붓외사촌 오타 마사쿠니 등의 영향으로 소학교 시절부터 일찍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 후, 학군에 아이누 거주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누 동급생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동급생들의 어려운 생활상과 아이누에 대한 취직 차별을 보고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홋카이도 구시로 고료고등학교 입학 후 다양한 데모에 참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외국어대학에 수험했다. 불합격했지만 그대로 오사카에 잔류했고, 가마가사키 부근에서 약 1년간 생활했다. 이후 와세다대학 수험을 구실로 상경했으나 시험을 보지 않고 그대로 낭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다양한 데모에 참가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선배들이 활동하던 사회주의연구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동아리에서 호세이대학에 운동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령을 받고 호세이대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초기에는 당시 문학부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던 사청동 해방파와 함께 행동했지만, 정파운동 특유의 상명하복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대학 반 친구였던 가타오카 도시아키 등과 함께 논섹트 단위인 “호세이대 L반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다른 대학의 문과대생들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여 한때 회원 수가 백수십 명으로 불어났으나, 전공투 운동 및 70년 안보의 패배와 함께 조직은 자연소멸되었다. 이후 다이도지는 대학도 중퇴했지만,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카타오카 등 소수의 L반 위원회 멤버들과 함께 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무렵 동창회에서 재회한 고등학교 동창 고마자와 아야코를 운동권으로 오르그했고, 이를 계기로 교제, 동거하다가 결혼했다. 이후 1970년 7월 7일 화교청년투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신좌파 제파에 대한 결별선언에 충격을 받는다. 이것을 계기로 다이도지 등의 연구회는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각지에서 행해온 “악행”을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과격한 반일사상을 키워나갔다. 다이도지 본인도 홋카이도 출신으로서 원래부터 아이누에 대한 속죄의식이 깊었다. 연구회를 도시유격대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고, 반일무장전선을 정식으로 결성하기 전에 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 풍설의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1972년 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를 정식으로 결성한 후, 무지개 작전(히로히토 천황 폭탄암살 미수사건), 미츠비시중공 폭파사건 및 기타 9건의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9건의 주범으로 기소되었다. 재판 중 순순히 자백했던 것에 대하여 사사키 쇼지(사사키 노리오의 형) 등 지원자들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아 반성, 이후 끈질긴 옥중투쟁 및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던 와중 일본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 및 다카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다이도지 아야코, 에키다 유키코가 초법적 조치로 석방, 출국해서 일본적군에 합류했으나, 다이도지 마사시는 응하지 않고 감옥에 남았다. 1987년 3월 24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2008년 재심도 기각되면서 사형이 완전히 확정되었다. 그러나 체포되지 않은 멤버들에 대한 재판이 완결되지 못했기에 형을 집행할 수 없어 사실상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었다. 이후 옥중에서 문예활동을 개시해서 하이쿠 시인으로 등단했다. 하이쿠집 『관 한 짝』(棺一基)은 2013년 일본일행시대상 하이쿠 부문을 수상했다. 2017년 5월 24일 68세의 나이로 도쿄 구치소에서 다발성 골수종로 인해 사망했다. .
사이토 노도카(일본어: 齋藤 和 (さいとう のどか): 1947년 11월 14일 - 1975년 5월 19일)는 일본의…사이토 노도카(일본어: 齋藤 和 (さいとう のどか): 1947년 11월 14일 - 1975년 5월 19일)는 일본의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대지의 엄니” 그룹 소속. 1974년 10월 14일의 미츠이물산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연속기업폭파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북해도 무로란시 출신. 지역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학생회장을 지냈다. 고등학교 때 아나키즘 이론을 접했고, 마츠다 마사오・야마구치 켄지・카와니 히로시 등 동경행동전선의 동조자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 상경해서 동경행동전선의 모태인 현대사조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열성이었다. 수필가 히사다 메구미가 고교 동창이었다. 당시 무로란시는 후지제철의 기업도시로서 직원간의 엄연한 계급사회가 있었다. 히사다는 유복한 사택가에 사는 화이트칼라 집안이었고, 사이토는 장옥가에 사는 블루칼라 집안이었다. 히사다 및 고등학교 교사들이 회고하는 사이토는 요시모토 타카아키의 시나 작문을 피로하는 조숙하고 우수한 “특별한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류가 있었던 현대사조사 관계자들도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동경도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하면서 상경했고, 동경행동전선에서 파생된 아사쿠라 쿄우지 등의 베트남반전직접행동위원회에 참가했다. 1966년 10월 19일, 동경도 타나시시(현재의 서동경시)의 닛토쿠금속공업을 습격한 습격대 멤버 중 한 명이었지만, 체포는 되지 않았다. 베트남반전직접행동위원회의 후신으로서 체포당한 멤버들의 재판 지원을 담당하던 “흑층사(黒層社)”에도 참가했다. 한편, 신입생 때 학생운동에 잠시 관여한 것 외에는 대학 학내 운동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된 한 학년 아래의 친구이자 일본조선연구소 연구생이었던 뮤지션 타케다 켄이치의 “조선혁명언구회”에 상담역으로 이름을 올렸다. 후에 타케다는 사이토의 조선 문제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영향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1971년, 대학을 중퇴하고 가쓰시카구 아오토에 책대여점을 개업했다. 한편 학창시절 활동으로 쌓은 인맥으로 인하여 히라오카 마사아키 등의 텍크사 쟁의에 참가했다. 이 때 시부야 근처에 살던 대학생 에키다 유키코와 알게 되었다. 한편 히라오카가 저서 『중국인은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쓸 때 자기 고향 무로란에 대한 자료조사를 해 주었다. 야마구치 켄지・오오타 류・사사키 쇼지・오오타 마사쿠니 등의 레볼트사(レボルト社)에 타케다와 함께 드나들던 사이토는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종종 남한에 건너가 남한 반정부세력 네트워크와의 교류를 모색했다. 그러던 와중 사사키 쇼지의 동생 사사키 노리오와 친해졌고, 의기두합해서 함께 북해도의 아이누 거주구 순회여행을 했다. 이 때 사사키 노리오를 통해 오르그되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가담, “대지의 엄니” 그룹을 결성했다. 1974년 에키다 유키코를 동 그룹에 오르그했고, 이후 사실혼 관계가 되었다. 한편, 당시 오오타 류・히라오카 마사아키・타케나카 로 등이 주창한 궁민혁명론에 공명하여, 요세바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아온 남베트남 난민들도 오르그하려 했으나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산야 요세바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하다가 후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을 결성하는 구로카와 요시마사와도 이 무렵 안면을 텄다. 상경 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을 “카즈(かず, 和의 다른 독법)”라고 자칭했고, 여권에도 이름을 Kazu라고 표기했다. 그래서 사실혼 아내인 에키다도 사이토가 죽을 때까지 그의 본명을 몰랐다. 체포 당시 사이토는 나카가와(中川)라는 가명으로 조후역전의 시노(しの)라는 다방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75년 5월 19일 아침 8시경, 거주하던 카메이도의 츠타바맨숀(ツタバ・マンション)에서 취침하던 중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에키다와 함께 체포되었다. 사이토는 경시청으로 연행되는 도중에 자결용으로 숨겨뒀던 청산가리를 삼켜 음독했고, 같은 날 사망했다. 이 청산가리는 다이도지 아야코가 근무처에서 훔쳐 나눠준 것이었다. 에키다는 자살에 실패해 기소되었다. 사이토의 자살로 인해 그만 알고 있던 정보들(예컨대 관서지방에 협력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등)은 어둠에 묻히게 되었다. 이런 정보들은 에키다 등 생존 멤버들도 알고 있지만 자백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에키다는 『하지만 나에게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에서 협력자들의 존재를 암암리에 암시하고 있다. 사이토는 “권력에의 일체의 굴복을 거부하고 자살했다”는 이유로 생존 멤버 및 지원자, 동조자 등에게 “순교자”라고 “성인화”되었고, 심지어 민족파 우익들에게도 찬양받았다. 반면 “쉬이 자백해버린” 생존 멤버들(특히 가타오카 도시아키, 다이도지 마사시가 타겟이 되었음)은 사이토와 비교당하여 사사키 쇼지 등 지원자들에게 “자공총괄지원”(自供総括支援) 명목으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생존 멤버들은 “카즈”의 머릿글자 K와 후나모토 슈지의 머릿글자 F를 따서 옥중에서 “KF부대”를 결성, 『반일혁명선언』도 이 “KF부대(준)” 명의로 출판되었다. KF부대는 에키다 유키코・다이도지 아야코・아라이 마리코 등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후 장렬한 옥중투쟁에 돌입했다. 다카 사건으로 석방되어 일본적군에 합류했다가 1995년 다시 체포된 에키다는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진술서에서 그 당시에 자살을 정당화・영웅화한 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비판적으로 회고했다.
카로우지 켄타로(일본어: 唐牛 健太郎 (かろうじ けんたろう): 1937년 8월 10일 - 1984년 3월 4일)는 일본의…카로우지 켄타로(일본어: 唐牛 健太郎 (かろうじ けんたろう): 1937년 8월 10일 - 1984년 3월 4일)는 일본의 학생운동가다. 1960년 안보투쟁 당시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위원장이었다.
데라오 고로(일본어: 寺尾 五郎 (てらお ごろう), 1921년 7월 14일~1999년 8월 21일)는 일본의 사회…데라오 고로(일본어: 寺尾 五郎 (てらお ごろう), 1921년 7월 14일~1999년 8월 21일)는 일본의 사회 운동가이다. 평화운동, 한중일 우호 운동을 전개해 다른 나라들을 방문했으며, 1961년에 일본조선연구소를 설립해 그 이사로 취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서적을 저술한다. 195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전에 방북사절단으로서 방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전을 그린 《38도선의 북》을 저술했다.
이보시 호쿠토 일본어: 違星北斗, いぼし ほくと, 1901년 ~ 1929년 1월 26일)는 아이누 출신의 와카…이보시 호쿠토 일본어: 違星北斗, いぼし ほくと, 1901년 ~ 1929년 1월 26일)는 아이누 출신의 와카 작가·사회운동가이다. 아이누의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으로 일생을 바치며 그 사상을 신문이나 잡지에 단가(短歌)형태로 발표하고, 같은 시대의 아이누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홋카이도 내 아이누 코탄(Айнукотан)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누족이 깨어있고 단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