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야 마린(일본어: 南谷 真鈴, 1996년 12월 20일 ~ )은 일본의 산악인이며 칠대륙 최고봉 일본인 최연소 등정…
미나미야 마린(일본어: 南谷 真鈴, 1996년 12월 20일 ~ )은 일본의 산악인이며 칠대륙 최고봉 일본인 최연소 등정 기록 보유자이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출신이다.
활동가: 186명
미나미야 마린(일본어: 南谷 真鈴, 1996년 12월 20일 ~ )은 일본의 산악인이며 칠대륙 최고봉 일본인 최연소 등정…
미나미야 마린(일본어: 南谷 真鈴, 1996년 12월 20일 ~ )은 일본의 산악인이며 칠대륙 최고봉 일본인 최연소 등정 기록 보유자이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출신이다.
카마타 아리사(일본어: 鎌田 安里紗, 1992년 7월 21일 ~ )는 일본의 모델이다.
요시마쓰 이쿠미(吉松育美, 1987년 6월 21일 ~ )는 일본의 탤런트이자 모델이다. 사가현에서 태어났으며, 세이신…
요시마쓰 이쿠미(吉松育美, 1987년 6월 21일 ~ )는 일본의 탤런트이자 모델이다. 사가현에서 태어났으며, 세이신 여자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녀는 2012년 미스 인터네셔널에서 우승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정부 내 여성 아동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나카가와 마이(일본어: 中川 真依, なかがわ まい, 1987년 4월 7일~)는 일본의 다이빙 선수이다. 2008년과…
나카가와 마이(일본어: 中川 真依, なかがわ まい, 1987년 4월 7일~)는 일본의 다이빙 선수이다. 2008년과 2012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며,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히가시 코유키(일본어: 東 小雪 (ひがし こゆき) 히가시 고유키[*], 1985년 2월 1일~)는 일본의 LGBT 활동가이자…
히가시 코유키(일본어: 東 小雪 (ひがし こゆき) 히가시 고유키[*], 1985년 2월 1일~)는 일본의 LGBT 활동가이자 문필가, 공인심리사이다. 본명으로 활동 중이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아우라 마키(あうら真輝)라는 예명으로 다카라즈카 가극단 하나구미 소속 남역으로 활동했다. 퇴단 후 2010년 가을부터 LGBT 지원에 종사하며, 여성의 사는 방법. 자살 대책, 아동 학대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 강연, 연수, 집필 등 넓게 활동하고 있다.
오토타케 히로타다(일본어: 乙武洋匡, おとたけ ひろただ, 1976년 4월 6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교사로, 테트라-아멜리아…
오토타케 히로타다(일본어: 乙武洋匡, おとたけ ひろただ, 1976년 4월 6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교사로, 테트라-아멜리아 증후군으로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다., 자신의 경험으로 《오체불만족》을 펴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TV 아사히의 《Get! Sports》 내비게이터로 활동하고, 또한 잡지 Number, Sports Yech!, 주간 베이스볼에 기고하였으며 1999년 3월 TBS 뉴스의 숲 서브캐스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2년에 도쿄 도민영예상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교사로 활동했다. 2013년 3월, 도쿄도 교육위원이 되었다.
마쓰모토 하지메(일본어: 松本哉, 1974년 10월 17일~)는 일본의 좌익 활동가, 고물상이다. 스기나미구…
마쓰모토 하지메(일본어: 松本哉, 1974년 10월 17일~)는 일본의 좌익 활동가, 고물상이다. 스기나미구 고엔지(高円寺)에서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素人の乱5号店)을 운영하고 있다.
오쓰바키 유코(일본어: 大椿 裕子 오츠바키 유코[*], 1973년 8월 14일 ~ )는 일본의 정치인, 노동운동가이다.…
오쓰바키 유코(일본어: 大椿 裕子 오츠바키 유코[*], 1973년 8월 14일 ~ )는 일본의 정치인, 노동운동가이다. 사회민주당 소속의 참의원으로, 사회민주당 부당수이다. 오사카 교육합동노동조합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1973년 일본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에서 태어났다. 1996년 시코쿠 가쿠인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2004년부터 피재지장애인센터(被災地障害者センター)에서, 2006년부터 간세이 가쿠인 대학 장애인 지원 코디네이터로 근무하였으며 2010년에 오사카 교육합동노동조합(大阪教育合同労働組合)에 가입하여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사회민주당 비례구에 입후보하여 낙선하였다. 2022년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낙선하였으나, 2023년 보궐선거에 사회민주당에서 입헌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요시다 다다토모가 출마하며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호리에 다카후미(일본어: 堀江 貴文, 1972년 10월 29일~)는 일본의 기업인으로, 인터넷 기반 기업인 주식회사 라이브…
호리에 다카후미(일본어: 堀江 貴文, 1972년 10월 29일~)는 일본의 기업인으로, 인터넷 기반 기업인 주식회사 라이브 도어의 전 CEO를 역임하였다. 통통한 체격과 호감있는 인상에서 호리에몽(호리에+도라에몽)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토야마 코이치(일본어: 外山恒一, 1970년 7월 26일 ~ )는 일본의 정치활동가, 전위예술가, 평론가, 가수이다.
유아사 마코토(湯浅誠, 1969년 ~ )는 일본의 반 빈곤 운동가이자. 자립 생활 지원센터 모야이의 사무총장이며 반빈곤…
유아사 마코토(湯浅誠, 1969년 ~ )는 일본의 반 빈곤 운동가이자. 자립 생활 지원센터 모야이의 사무총장이며 반빈곤 네트워크 사무국장, 내각부참여(조언자)이다. 2008년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파견촌의 촌장을 맡아 유명해졌다. 1989년 도쿄 대학 교양학부문과류에 입학하여 1995년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6년 도쿄 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에 입학하여 2003년 자퇴한 후 반빈곤 운동에 투신한다. 민주당이 집권한 후 간 나오토 수상 내각에 들어갔으나 100여일 만에 사임했다. 2010년 5월 동일 직책으로 재임명되었다. 2011년 일본 동북부 대지진이 발생한 후 내각 관방 지진 자원봉사 협력실장에 취임했다. 일본의 반빈곤 활동가로 유명한 마쓰모토 하지메나 아마미야 카린과 달리 시민 운동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직접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유아사 마코토는 정부에 참여한 후로 관료들의 저항에 직면했으나 일본 국내의 빈곤률과 포착률을 발표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한다. 2014년부터 호세이 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요시키(YOSHIKI, 본명: 하야시 요시키(일본어: 林 佳樹), 1965년 11월 20일 ~ )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로…
요시키(YOSHIKI, 본명: 하야시 요시키(일본어: 林 佳樹), 1965년 11월 20일 ~ )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로,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리더이다. 1965년 11월 20일 일본 지바현 다테야마시에서 태어났다.
미키타니 히로시(일본어: 三木谷浩史, 1965년 3월 11일~)는 일본의 기업인이다. 라쿠텐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김홍명(金弘明, 1962년 6월 16일 ~ )은 전 프로 야구 선수이다. 현역 시절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KBO…
김홍명(金弘明, 1962년 6월 16일 ~ )은 전 프로 야구 선수이다. 현역 시절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KBO 리그 빙그레 이글스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1981년 시즌부터 1987년 시즌까지(1군에서의 활동 기간은 1983년 시즌부터 1985년 시즌까지), KBO 리그에서는 1988년 시즌부터 992년 시즌까지 활동하였다. 재일 한국인 출신으로 KBO 리그에서 활동한 한국계 일본인 '미야기 히로아키'(宮城弘明)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3년에 일본의 유명 주간지 '슈칸 베이스볼'에서 순수 일본인이었다는 기사를 게재한 바 있고 일본의 민영 방송국 TBS에서도 슈칸 베이스볼의 기사 내용과 비슷한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방영한 적이 있어 그가 정말로 재일 출신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아베 아키에(일본어: 安倍 昭恵, 1962년 6월 10일 ~ )는 일본의 제90·96·97·98대 총리인 아베 신조의…
아베 아키에(일본어: 安倍 昭恵, 1962년 6월 10일 ~ )는 일본의 제90·96·97·98대 총리인 아베 신조의 배우자였다. 결혼 전 성씨는 마쓰자키(松崎 (まつざき))이다.
신숙옥(辛淑玉, 1959년 1월 16일~)은 재일 한국인 활동가이다. 일본 내의 아이누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을 진행…
신숙옥(辛淑玉, 1959년 1월 16일~)은 재일 한국인 활동가이다. 일본 내의 아이누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을 진행 중이다.
가야노 시로(일본어: 萱野 志朗, 1958년 4월 14일~)는 일본의 아이누 문화 연구자이며, 아이누족 출신 정치인이다.…
가야노 시로(일본어: 萱野 志朗, 1958년 4월 14일~)는 일본의 아이누 문화 연구자이며, 아이누족 출신 정치인이다. 또한 아이누 민족당의 대표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누 문화 연구자이자 전 참의원(1994년~1998년 재임)으로 활동한 가야노 시게루이다.
아라키 가즈히로(일본어: 荒木 和博 (あらき かずひろ), 1956년 8월 8일~)는 일본의 군사·정치학자, 교수이자 정치…
아라키 가즈히로(일본어: 荒木 和博 (あらき かずひろ), 1956년 8월 8일~)는 일본의 군사·정치학자, 교수이자 정치 평론가이다. 주로 남북한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아사하라 쇼코(일본어: 麻原 彰晃, 본명: 마쓰모토 지즈오·松本 智津夫, 1955년 3월 2일 ~ 2018년 7월 6일)는…
아사하라 쇼코(일본어: 麻原 彰晃, 본명: 마쓰모토 지즈오·松本 智津夫, 1955년 3월 2일 ~ 2018년 7월 6일)는 일본의 종교가, 테러리스트, 연쇄살인범이다.
펑정후 (馮正虎, 1954년 7월 1일 저장성 원저우 시 ~ )는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이다. 그는 2009년…
펑정후 (馮正虎, 1954년 7월 1일 저장성 원저우 시 ~ )는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이다. 그는 2009년 11월 중국 정부로부터 입국이 거부된 이후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지내고 있는 상태이다. 그는 1980년대에 사업을 시작했으며 후에 중국 기업 발전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중국 사회의 민주화를 억압하는 중국 정부와 중국 인민해방군 을 비판했다. 민주화와 인권에 관한 활동에 참가한 혐의로 체포되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수감되었다. 퇴소후, 그는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했다. 2009년 4월에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온 이후 2009년 11월까지 총 8차례나 중국 당국으로부터 입국 거부를 당하였다.
고바야시 요시노리(일본어: 小林 よしのり, 본명: 고바야시 요시노리(일본어: 小林 善範), 1953년 8월 31일 ~ )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일본어: 小林 よしのり, 본명: 고바야시 요시노리(일본어: 小林 善範), 1953년 8월 31일 ~ )는 일본의 만화가이자 평론가이다. 1976년에 만화가로 데뷔한 이후에 만화 《도쿄 대학 일직선》, 《왕괴짜 돈만이》를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2년에 《고마니즘 선언》을 발표하면서 정치·시사·사회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우가진 히사이치(일본어: 宇賀神 寿一 (うがじん ひさいち): 1952년 12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
우가진 히사이치(일본어: 宇賀神 寿一 (うがじん ひさいち): 1952년 12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 학생운동가, 빈민운동가다. 메이지가쿠인고등학교 시절 베트남 반전운동을 통해 정치활동에 눈을 떴다. 이후 부락해방운동・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했고, 산리즈카 투쟁 등에도 참여했다. 1971년 4월, 메이지가쿠인대학 사회학부에 진학. 대학 재학 중에는 학비인상 반대투쟁, 워킹푸어 구제투쟁 등에 참가했다. 이후 체포된 메이지가쿠인대생 학생운동가들의 옥중투쟁 지원이나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반체제, 반일사상을 양성시켜갔다. 1972년 10월경, 다른 대학의 학생운동가를 통해 산야의 빈민운동 조직인 저변위원회에 참여했고, 거기서 쿠로카와 요시마사를 알게 되었다. 대학을 계속 다니면서 그해 겨울 산야 월동투쟁에 처음 참가해 하층노동자들의 현실을 현장에서 알게 되었고,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는 경찰권력과 야쿠자들과의 첨예한 긴장관계 속에서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73년 여름, 단신으로 오사카 카마가사키로 내려가 요세바에 투숙하며 몸소 일용직 육체노동을 경험했다. 어느 날, 노동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사람이 다쳤는데, 구급차 도착이 늦어지는 사이 주변에 모여든 것을 계기로 노동자들이 그동안 일상적으로 느껴왔던 분노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해 폭동으로 번질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자 노동자들 사이에 숨어 있던 사복경찰들이 숨겨둔 삼단봉을 꺼내 휘두르며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마구 때려눕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우가진은 “비상한 분노를 느꼈고, 압도적인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그것을 어떻게든 무찌르는 투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하층 노동자의 투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973년 가을, 우가진은 쿠로카와의 타진을 받아 타카다노바바나 카와사키 등지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요세바의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노동조건의 개선이나 악덕업자의 추궁 등을 은연히 후방에서 지원했다. 동년 말엽부터 이듬해 74년까지 진행된 산야 월동투쟁에서는 행정 측이 노동자들을 잡아넣는 일시수용시설의 실태조사에 종사했다. “하층노동자의 투쟁을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우가진은 1974년 6월, 쿠로카와와 대화를 나누던 중 무장투쟁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해 키리시마 사토시까지 더하여 셋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을 결성하고, 일련의 연속기업폭파사건에 관여했다. 1975년 5월 19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각 그룹의 멤버들이 일제검거 되었을 때 우가진과 키리시마는 아직 경찰에 존재가 포착되지 않아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쿠로카와가 소지하고 있던 두 사람의 집 열쇠가 경찰에 압색되면서 두 사람의 존재가 포착되어 수배되었다. 우가진은 수배를 계기로 지하잠행생활에 들어갔고, 대학에서는 제적당했다. 지명수배 7년차인 1982년 7월 13일, 이타바시구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3월까지 가명으로 신문판매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1990년 2월 최고재판소에서 징역 18년형이 확정되었다. 기후형무소에서 13년간 복역함으로써 미결 구금기간을 포함해서 총 21년간 옥살이를 하고 2003년 6월 11일 만기출소했다. 출소 이후에는 신좌파 체포자들의 인권단체인 구원연락센터의 사무국원으로 취직했다. 사무국원으로서 운영을 담당하여 “누명 없는 사회”를 목표로 활동을 추진하며 반권력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산리즈카 투쟁 관계자들의 일반사단법인 스즈가모(スズガモ)에서 병수발에 종사하고 있다.
세토 히로유키(일본어: 瀨戸 弘幸 せと ひろゆき[*], 1952년 3월 3일 ~)은 후쿠시마현 출신, 일본의 극우계 우익단체…
세토 히로유키(일본어: 瀨戸 弘幸 せと ひろゆき[*], 1952년 3월 3일 ~)은 후쿠시마현 출신, 일본의 극우계 우익단체 구성원이자, 블로거, 문학가, 가공식품 판매업자이다. 후쿠시마 현립 후쿠시마 농잠 고등학교(현 ・ 후쿠시마 현립 후쿠시마 메이세이 고등학교) 졸업. 세계전략연구소 대표・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 외국인 범죄 추방 운동 최고 고문. 국가사회주의자동맹 창설 대표이자, 후쿠시마 시 직원이다. 유신정당・신풍 창설 대표이기도 하다.
강창일(姜昌一, 1952년 1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외교관, 교육인, 정치인으로, 제17·18·19·20대 국회의원…
강창일(姜昌一, 1952년 1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외교관, 교육인, 정치인으로, 제17·18·19·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제25대 주 일본 대사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이재명 정부 제22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일본어: 坂 (さか)本 (もと) 龍 (りゅう)一 (いち), 1952년 1월 17일 ~ 2023년 3월…
사카모토 류이치(일본어: 坂 (さか)本 (もと) 龍 (りゅう)一 (いち), 1952년 1월 17일 ~ 2023년 3월 28일)는 일본의 작곡가이자, 음악 프로듀서, 피아니스트, 사회 운동가이다.
야라 조스케(일본어: 屋良 朝助, 1952년 1월 14일 ~ , 오키나와현 나하시 출생)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가리유시…
야라 조스케(일본어: 屋良 朝助, 1952년 1월 14일 ~ , 오키나와현 나하시 출생)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가리유시 클럽의 당수이다.
신타니 카오루(일본어: 新谷 かおる (しんたに かおる) 신타니 가오루[*], 본명: 신타니 카오루 (新谷 薫)1951년 4월…
신타니 카오루(일본어: 新谷 かおる (しんたに かおる) 신타니 가오루[*], 본명: 신타니 카오루 (新谷 薫)1951년 4월 26일 ~)은 일본의 만화가, 동인 활동가이다. 남성이며, 오사카부 도요나카시 출신이며, 오사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내는 주홍 능선 (緋の稜線)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만화가 사에키 카요노 (佐伯かよの)이다.(2021년 8월 29일 사별 장녀는 내레이터 배우 신타니 마노 (新谷摩乃)이다. 대표작은 에어리어 88・두 사람 매 등 다수이다.
에키다 유키코(일본어: 浴田 (えきだ) 由紀子 (ゆきこ): 1950년 12월 19일 - )는 일본의 테러리스트다.…
에키다 유키코(일본어: 浴田 (えきだ) 由紀子 (ゆきこ): 1950년 12월 19일 - )는 일본의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대지의 엄니" 그룹 소속.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출신. 지주 집안 출신이었으나, 농지개혁으로 집안이 몰락했다. 1969년 야마구치현립 오오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키타사토대학 위생학부에 일반입시로 입학했다. 일반입시 수험 전에 추천입시에서 불합격했는데, 친족의 소개로 지역구 국회의원 아베 신타로의 동경 저택에서 서생을 하면서 키타사토 야학에 다닐 준비를 했다. 원래 학생운동권과 연이 없었는데, 1971년 고등학교 동창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그 친구의 구명활동을 하다가 다테 마사야스 등과 알게 되었다. 같은 해 초여름, 시부야역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던 히라오카 마사아키 등 텍크사 투쟁을 거쳐 사이토 노도카와 만나게 된다. 그해 가을 사이토 등과 함께 남한으로 “학습여행“을 간 것이 큰 계기가 되어 반일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1973년 대학을 졸업하고 신주쿠의 미츠코시진료소에서 임상검사기사로 취직했다. 같은 해 히라오카・다테・아사쿠라 쿄우지 등과 함께 양명웅(楊明雄) 전후보상 투쟁, 대니얼 로페스 전후보상 투쟁, 미크로네시아 독립 투쟁 등에 참여했다. 로페스 투쟁 당시 로페스의 신원인수인이 되기 위해 그와 위장약혼을 했는데, 로페스와의 생활에 지치고 우익 및 야쿠자와 공투하는 히라오카의 투쟁방향성에 의문을 느끼던 무렵, 그 고민의 상담 상대가 되어준 것이 사이토였다. 1974년 모교의 연구직으로 전업했고, 그 조금 뒤에 사이토와 동거를 시작했다. 원래는 전과가 없고 경찰에 채증당하지 않은 에키다가 갈 곳 없는 사이토에게 아지트를 제공하기 위한 동거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실혼 관계가 되었다. 동년 10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대지의 엄니" 그룹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10월 14일 미쓰이물산 폭파사건에서 폭탄을 설치하는 등, "대지의 엄니"가 일으킨 기업폭파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에키다 본인은 폭탄제조 지식이 없었고, 자명종을 베이스로 만든 시한장치를 만들어 1974년 8월 중순경 사이토에게 주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범행에 실제 사용되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975년 2월, 아사히생명 성인병연구소로 이직했다. 동년 5월 19일 아침 8시경, 고토구 카메이도의 츠타바맨숀에서 취침하던 중 들이닥친 경찰에게 사이토와 함께 체포당했다. 사이토는 체포 직후 청산가리를 음독해 당일 사망했다. 에키다는 체포될 때까지 사실혼 남편인 사이토의 명자 "和"의 독법을 몰랐다고 한다. 사이토가 죽자 경찰은 에키다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이토의 사십구재라고 싸리떡을 주어 회유하거나, 사이토의 친족을 자칭하는 여성을 투입해 위협하거나 따위의 수작을 부렸다.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에키다는 옥중자조합에서 만나게 된 다이도지 아야코 등과 함께 "KF부대"를 결성하고(K는 사이토의 별명 "카즈", F는 아키히토 황태자의 오키나와 방문에 항의해서 분신자살한 후나모토 슈지를 의미했다) 첫 공판에서 자신은 “혁명전사다, 직업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병사. 본적지는 전세계인민공화국”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며 대들었다. 1977년, 다카 사건을 일으킨 일본적군의 요구에 따른 초법적 조치로 석방되었다. 이후 일본적군에 가입하고, 국제수배되었다. 1981년 아이를 출산했다. 1995년 일본계 페루인을 가장해 페루에서 루마니아로 입국해 잠행활동을 하다가 3월 20일 구속되었다.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국외퇴거당했고, 일본행 비행기 기내에서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후의 재판에서 변호인 측은 당사자가 일본행을 거부했던 점, 이송 상황이 강제송환이라고 생각되는 점 등을 들어 위법성을 지적했다. 2002년 7월 5일,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동경지방재판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대지의 엄니" 그룹의 단독사건에 대한 재판소 판결은 이것이 최초 사례였다. 검찰측과 변호측 모두 양형이 부당하다며 항소했으나 2004년 5월 11일 동경고등재판소에서 쌍방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에키다가 8월 5일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징역 20년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토치기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2017년 3월 23일 만기출소했다. 석방 당시에는 동경구치소로 이감되어 있었다.
니시무라 슈헤이(일본어: 西村 修平, 1950년 ~, 아키타현 출생)는 일본의 가두선전 우익활동가이다. 현재 주권회복을…
니시무라 슈헤이(일본어: 西村 修平, 1950년 ~, 아키타현 출생)는 일본의 가두선전 우익활동가이다. 현재 주권회복을 도모하는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일본내에서는 행동하는 보수 운동의 제창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다카하시 시로(일본어: 高橋 史朗 (たかはし しろう), 1950년~)는 일본의 교육학자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다카하시 시로(일본어: 高橋 史朗 (たかはし しろう), 1950년~)는 일본의 교육학자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결성 기자 회견에서 발표한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7개 중학교 교과서는 증거가 불충분한 채 종군 위안부의 강제연행설을 함께 채용했다”는 성명의 호소인 9명 중 한 명이다.
야마자키 히로아키(일본어: 山崎 博昭 (やまざき ひろあき): 1948년 11월 12일 - 1967년 10월 8일)는 일본의…
야마자키 히로아키(일본어: 山崎 博昭 (やまざき ひろあき): 1948년 11월 12일 - 1967년 10월 8일)는 일본의 신좌파 학생운동가다. 제1차 하네다 투쟁 때 사망했다. 고치현 출신. 오사카시립 맛타중학교, 오사카부립 오오테마에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교토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동년 4월 중핵파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중핵파계 반전고협 결성에 참여하여 데모를 자주 나갔고, 스나가와 투쟁에도 참여했다. 1967년 10월 8일 제1차 하네다 투쟁(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 저지투쟁)에 참가했다. 학생들과 경찰기동대 사이에 격렬한 공방이 벌어져서, 학생들이 기동대에게서 물대포 탑재 경비차를 강탈해서 폭주시키는 등 상황이 격화되는 가운데, 경비차가 지나간 뒤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곧바로 기동대원이 구조했지만 사망이 확인되었다. 향년 18세. 10월 17일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학살항의・야마자키군 추도중앙장이 개최되어 이노우에 키요시가 조사를, 칸바 토시오가 조시를 낭독했다. 당시 경찰측은 동료 학생운동가가 경비차를 탈취해 몰다가 야마자키를 치어 죽였다고 발표하고, 운전했다는 학생을 체포했지만 입건하지 못하고 불기소했다. 사망 직후 도쿄도 감찰의무원에서 “사인은 뇌좌멸(으스러짐)”이라는 검안서(1967년 10월 9일 오오타구청 발행)를 발표했다. 전라의 시체를 대면한 유족과 변호단은 경찰의 발표와 달리 타이어 자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변호사 코나가이 요시히로는 사인을 둘러싼 경찰발표의 의혹, 모순을 언론지상에서 추궁했다. 그러나 부검을 실시한 게이오기주쿠대학 의대 교수는 곤봉 같은 것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적인 골함몰이나 타박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타이어의 뚜렷한 흔적은 없지만 타이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얼굴 왼쪽에 있다는 점, 머리・가슴・배에 걸쳐 중량을 받은 압박흔이 있다는 점을 들어 차에 치어 죽은 것이 가장 강하게 생각된다고 소견을 밝혔다. 언론들은 야마자키가 쓰러진 직후에 학생들이 경비차를 물로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다거나, 내부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되었다고 보도했고, 차량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미는 학생들의 사진, 폭주하는 차량의 영상 같은 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우키 소이치는 반체제운동 측에서는 일관되게 야마자키가 권력에게 학살당했다고 유보 없이 주장해 왔고, 자신도 한참 후까지 계속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자저에서 말하고 있다. 야마모토 나츠히코・하니 고로 등은 설사 학생이 운전해서 치어죽인 것이라 하더라도 학생으로 하여금 거기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권력이니 책임은 권력에게 있다는 논법을 사용했다. 와타나베 쇼이치는 칸바 미치코 사망사건 때 동경대학 총장 카야 세이지가 “순수한 학생을 분노케 한 기시 내각이 나쁘다”고 말했던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자키의 죽음은 칸바와 달리 광범위한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타카기 마사유키는 이것이 이 때 이미 학생운동이 고립화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코바야시 테츠오와 같은 논자는 야마자키의 죽음이 이듬해의 전공투 운동을 비롯한 학생운동 폭발의 마중물이 되었고, 고등학생들까지 정치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후 학생반전운동은 70년 안보를 목표로 달려가며 사세보, 산리즈카, 오키나와, 전공투로 이어지며 고양된 측면이 있다. 유골은 오사카부 가타노시 헤이와다이공원에 매장되어 있다.
다이도지 아야코(일본어: 大道寺 (だいどうじ) あや子 (こ): 1958년 10월 20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다이도지 아야코(일본어: 大道寺 (だいどうじ) あや子 (こ): 1958년 10월 20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그룹의 멤버이자, 리더 다이도지 마사시의 아내였다. 구성은 고마자와 아야코(일본어: 駒沢 (こまざわ) あや子 (こ)). 북해도 쿠시로시 출신. 북해도쿠시로코료고등학교 졸업. 재학 중에는 성적이 우수했고, 빙속 동아리에서 활약하여 졸업생 총대까지 맡았다. 호사약과대학에 추천입학하여 반더포겔 동아리 활동과 학생자치회 활동을 했고, 수업료 인상 반대투쟁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등학교 동창 다이도지 마사시와 동창회에서 재회하여 다이도지의 “연구회”에 오르그되었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거의 접점이 없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 “연구회” 참여를 계기로 교제하여 동거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신주쿠의 병원에서 악제사로 근무했고, 다이도지와 결혼했다. 이후 도내의 시약회사로 이직했는데, 폭탄 재료를 입수하기 위해서였지만 근무태도가 매우 양호하여 주위로부터 평판이 높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반에 참가하여 미츠비시중공 폭파사건 등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 미츠비시 사건 때는 시한폭탄 설치현장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직 내에서의 코드네임은 “아사카와”. 아사카와 마키의 팬이었기 때문이었다. 1975년 5월 19일,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남편과 함께 긴급체포되었다. 체포 직전 청산가리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수사관들에게 저지되었다. 수려한 용모와 주변의 평판으로 인하여, 처음 체포된 후 수사과정 및 언론보도에서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과격사상에 끌려들어간 종범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동정론이 있었다. 그러자 아야코는 오히려 그런 목소리에 반발하여 에키다 유키코 등과 함께 격렬한 옥중투쟁・법정투쟁을 벌였다. 1977년 일본적군이 다카 사건을 일으키자 후쿠다 내각의 “초법적 조치”로써 에키다와 함께 석방・출국하여 일본적군에 합류했다. 1985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지원자들에게 투쟁을 계속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1994년 6월, 사문서위조 혐의로 인터폴을 통해 국제수배되었다. 1999년 홍콩에서 마츠다 히사시・시게노부 후사코와 회동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1년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하자 남미에서 반도 쿠니오와 함께 「일본적군 해산선언 무효선언」을 발표했다. 2022년 현재 생사 불명이며, 여전히 국제수배 중이다.
사사키 노리오(일본어: 佐 (さ)々 (さ)木 (き) 規 (のり)夫 (お), 1948년 8월 27일 ~ )는 일본의 신좌파…
사사키 노리오(일본어: 佐 (さ)々 (さ)木 (き) 規 (のり)夫 (お), 1948년 8월 27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 일본적군에서 활동했다.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포목행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 가업을 도와 상경. 형이 참여한 제3세계 혁명문학을 소개하는 “레볼루트사”에 관여하게 된다. 그 형의 증언에 따르면 1967년경부터 사이토 노도카와 알게 되었다. "조선혁명연구회"를 결성, 1960년대 후반부터 대한민국에 도항하면서 일본의 조선침략과 조선의 저항운동사를 공부했다. 1972년 사이토와 함께 아이누모시리를 여행하고 일본의 아이누 침략사를 공부했다. 1974년 다이도지 마사시로부터 "늑대"에 초대되었고, 이후 비공개 불법활동에 참여하여 부대의 일원으로서 연속기업폭파사건에 관여했다. 1975년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사건 때는 예고전화를 걸었다. 1975년 6월 체포되지만 8월 일본적군이 쿠알라룸푸르 사건을 일으키면서 석방, 출국되어 일본적군에 합류했다. 이후 일본항공 472편 납치사건, 미쓰이물산 마닐라지점장 납치사건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봄 무렵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도난당한 교토시의 한 회사원의 여권을 바탕으로 만든 위조여권을 가지고 필리핀 마닐라의 아파트에 잠복하면서 동남아시아와 유럽 수 개국에 출입하고 있던 것이 1988년 8월에 밝혀졌다. 1998년 오쿠다이라 쥰조와 함께 위조여권을 취득하기 위해 도쿄에 들어왔음이 일본 정부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으며, 현재도 국제수배 중이다. 2010년 4월 이후에 일본 정부가 게재한 수배 사진은 1998년 촬영된 것으로 대체되었다.
다모가미 도시오(일본어: 田母神 俊雄, 1948년 7월 22일~)는 일본 항공자위대 제29대 항공막료장 출신의 출신으로…
다모가미 도시오(일본어: 田母神 俊雄, 1948년 7월 22일~)는 일본 항공자위대 제29대 항공막료장 출신의 출신으로 군사평론가겸 일본보수 인사이다.
다이도지 마사시(일본어: 大道寺 将司 (だいどうじ まさし), 1948년 6월 5일~2017년 5월 14일)는 일본의 신좌파…
다이도지 마사시(일본어: 大道寺 将司 (だいどうじ まさし), 1948년 6월 5일~2017년 5월 14일)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그룹의 리더격인 인물이었다. 홋카이도 구시로시 출신이다. 신문 스크랩을 하던 공무원 아버지, 홋카이도 도의회 의원이었던 의붓외삼촌, 60년 안보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의붓외사촌 오타 마사쿠니 등의 영향으로 소학교 시절부터 일찍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 후, 학군에 아이누 거주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누 동급생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동급생들의 어려운 생활상과 아이누에 대한 취직 차별을 보고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홋카이도 구시로 고료고등학교 입학 후 다양한 데모에 참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오사카외국어대학에 수험했다. 불합격했지만 그대로 오사카에 잔류했고, 가마가사키 부근에서 약 1년간 생활했다. 이후 와세다대학 수험을 구실로 상경했으나 시험을 보지 않고 그대로 낭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다양한 데모에 참가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선배들이 활동하던 사회주의연구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동아리에서 호세이대학에 운동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령을 받고 호세이대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초기에는 당시 문학부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던 사청동 해방파와 함께 행동했지만, 정파운동 특유의 상명하복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대학 반 친구였던 가타오카 도시아키 등과 함께 논섹트 단위인 “호세이대 L반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다른 대학의 문과대생들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여 한때 회원 수가 백수십 명으로 불어났으나, 전공투 운동 및 70년 안보의 패배와 함께 조직은 자연소멸되었다. 이후 다이도지는 대학도 중퇴했지만,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카타오카 등 소수의 L반 위원회 멤버들과 함께 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무렵 동창회에서 재회한 고등학교 동창 고마자와 아야코를 운동권으로 오르그했고, 이를 계기로 교제, 동거하다가 결혼했다. 이후 1970년 7월 7일 화교청년투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신좌파 제파에 대한 결별선언에 충격을 받는다. 이것을 계기로 다이도지 등의 연구회는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각지에서 행해온 “악행”을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과격한 반일사상을 키워나갔다. 다이도지 본인도 홋카이도 출신으로서 원래부터 아이누에 대한 속죄의식이 깊었다. 연구회를 도시유격대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고, 반일무장전선을 정식으로 결성하기 전에 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 풍설의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1972년 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를 정식으로 결성한 후, 무지개 작전(히로히토 천황 폭탄암살 미수사건), 미츠비시중공 폭파사건 및 기타 9건의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9건의 주범으로 기소되었다. 재판 중 순순히 자백했던 것에 대하여 사사키 쇼지(사사키 노리오의 형) 등 지원자들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아 반성, 이후 끈질긴 옥중투쟁 및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던 와중 일본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 및 다카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다이도지 아야코, 에키다 유키코가 초법적 조치로 석방, 출국해서 일본적군에 합류했으나, 다이도지 마사시는 응하지 않고 감옥에 남았다. 1987년 3월 24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2008년 재심도 기각되면서 사형이 완전히 확정되었다. 그러나 체포되지 않은 멤버들에 대한 재판이 완결되지 못했기에 형을 집행할 수 없어 사실상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었다. 이후 옥중에서 문예활동을 개시해서 하이쿠 시인으로 등단했다. 하이쿠집 『관 한 짝』(棺一基)은 2013년 일본일행시대상 하이쿠 부문을 수상했다. 2017년 5월 24일 68세의 나이로 도쿄 구치소에서 다발성 골수종로 인해 사망했다. .
구로카와 요시마사(일본어: 黒川 芳正 (くろかわ よしまさ): 1948년 1월 26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
구로카와 요시마사(일본어: 黒川 芳正 (くろかわ よしまさ): 1948년 1월 26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 영화감독이다. 야마구치현립 우베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동경도립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 뒤 중핵파 활동가가 되어 사토 수상 방미 저지투쟁, 사세보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투쟁에 참여했다. 이후 중핵파에서 이탈했으나, 야스다 강당 사건을 보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산야나 카마가사키 같은 요세바 슬럼가에서 일용직노동을 하면서 폭력수배사추방 카마가사키공투회의, 산야저변위원회(山谷底辺委員会) 등에 관여했다. 사사키 노리오를 통해 다이도우지 마사시를 만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참가했다. 산야저변위원회 멤버였던 우가진 히사이치・기리시마 사토시를 오르그해서 “전갈”그룹을 결성하고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가 1975년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소지하고 있던 열쇠가 같은 날 체포된 다른 멤버들과 일치하지 않아서, 체포를 면한 우가진과 기리시마의 존재까지 경찰에 포착되었다. 1979년 11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최고재판소에 상고하던 중인 1987년 1월 변호인 해임서를 제출했으나 최고재판소에서 소송을 지연하려는 수작이므로 무효라고 변호인에게 변론 속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변호인이 거부하여 동년 2월 변론 없이 폐정했고, 동년 3월 24일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87년, 옥중에서 감독을 맡아 다큐멘터리 영화 『엄마들』을 제작했다. 구로카와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옥중 멤버들의 어머니들과의 인터뷰를 구성한 것으로, 컬러 8 mm, 상영시간은 120분이다. 나중에 비디오로도 만들어져 1997년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2018년 현재 미야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가모 모모요(일본어: 鴨 (かも) 桃代 (ももよ), 1948년 10월 11일 ~ )는 일본의 노동운동가이다. 2002년…
가모 모모요(일본어: 鴨 (かも) 桃代 (ももよ), 1948년 10월 11일 ~ )는 일본의 노동운동가이다. 2002년 결성된 전국커뮤니티유니온연합회(전국유니온)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시즈오카현 시미즈시(현재의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출신. 시립 소데시소학교, 시즈오카 후타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바현 지바시의 슈쿠토쿠 대학에 입학, 전공투 운동에 참여했다. 1972년 동대학 사회복지학부를 졸업하고 보육사(당시 호칭은 "보모") 자격으로 지바현 공무원이 된다. 이후 학생 운동에서 알게 된 주오 대학 출신 가모 데쓰토시(鴨 哲登志)와 결혼했다. 슬하 2남을 낳았지만 모두 난치병에 걸리고 장남은 사망했다. 육아와 직업의 양립이 어려워져 퇴직했다. 이후 가모는 일본 사회당 당원이자 사청동 운동가인 남편의 활동을 지원했다. 데쓰토시는 1987년 나라시노시 시의원에 당선되어 이후 5기 20년간 재임했다. 1988년 3월, 지바현 사회당 시의회가 각지에서 진행한 무료 법률 상담을 계기로, 노동조합이 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정규직이 아니라서 노조에 가입하지 못하는 비정규직들도 개인 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는 유채 유니온이 결성되자 가모는 그 초대 서기장, 동년 9월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비정규직의 권리 옹호와 조직화를 진행했다. 1999년 동종조합 연락 조직인 커뮤니티유니온 전국네트워크의 공동대표가 되고, 2002년 11월 3일 결성된 전국유니온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전국유니온은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에 가입 신청을 하여 2003년 6월 26일 승인되었다. 2004년 12월에는 비정규고용포럼 공동대표로 취임했다. 2005년 10월 6일, 가모는 연합회장 선거에 출마, 전국섬유화학식품유통서비스일반노동조합동맹(UI전섬동맹) 회장 다카기 쓰요시와 경합했다. 본래 다카기의 무투표 당선이 예상되었고 가모가 출마한 뒤에도 다카기의 압승이 점쳐졌지만 선거 결과 다카기 323표, 가모는 107표를 얻어 석패했다. 조합원이 3,000명에 불과하여 UI전섬동맹과 비교하면 200분의 1(1/200) 이하 규모인 전국유니온에서 출마한 가모의 득표수가 반향을 불러 가모와 전국유니온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07년 4월 22일 나라시노시장 선거에서 전국유니온 위원장으로서 남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지만 남편은 낙선했다. 2008년 말부터 2009년 초까지 소위 "파견해고"에 의해 주거와 소득을 상실하게 된 비정규 노동자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생활상담을 하는 신년맞이 파견촌이 기획되었다. 전국유니온은 그 실행위원회에 참여했고 가모도 지원했다. 2013년 5월,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사회당의 후신정당인 사회민주당에 입후보를 표명하고, 사회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유니온 위원장을 사임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 낙선했다.
오카모토 고조(일본어: 岡本 公三 (おかもと こうぞう): 1947년 12월 7일 ~ 2026년 7월 23일)는 일본 신좌파…
오카모토 고조(일본어: 岡本 公三 (おかもと こうぞう): 1947년 12월 7일 ~ 2026년 7월 23일)는 일본 신좌파 정파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출신 활동가, 테러리스트다. 로드 공항 사건의 실행범 가운데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적군 멤버로 취급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적군 성립 이전의 멤버였다. 이스라엘에서 석방된 후 레바논으로 망명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일본 경찰은 그를 국제수배 중이다. 요도 호 그룹의 오카모토 다케시의 동생이다.
사이토 노도카(일본어: 齋藤 和 (さいとう のどか): 1947년 11월 14일 - 1975년 5월 19일)는 일본의…
사이토 노도카(일본어: 齋藤 和 (さいとう のどか): 1947년 11월 14일 - 1975년 5월 19일)는 일본의 테러리스트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대지의 엄니” 그룹 소속. 1974년 10월 14일의 미츠이물산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연속기업폭파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북해도 무로란시 출신. 지역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학생회장을 지냈다. 고등학교 때 아나키즘 이론을 접했고, 마츠다 마사오・야마구치 켄지・카와니 히로시 등 동경행동전선의 동조자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 상경해서 동경행동전선의 모태인 현대사조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열성이었다. 수필가 히사다 메구미가 고교 동창이었다. 당시 무로란시는 후지제철의 기업도시로서 직원간의 엄연한 계급사회가 있었다. 히사다는 유복한 사택가에 사는 화이트칼라 집안이었고, 사이토는 장옥가에 사는 블루칼라 집안이었다. 히사다 및 고등학교 교사들이 회고하는 사이토는 요시모토 타카아키의 시나 작문을 피로하는 조숙하고 우수한 “특별한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류가 있었던 현대사조사 관계자들도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동경도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하면서 상경했고, 동경행동전선에서 파생된 아사쿠라 쿄우지 등의 베트남반전직접행동위원회에 참가했다. 1966년 10월 19일, 동경도 타나시시(현재의 서동경시)의 닛토쿠금속공업을 습격한 습격대 멤버 중 한 명이었지만, 체포는 되지 않았다. 베트남반전직접행동위원회의 후신으로서 체포당한 멤버들의 재판 지원을 담당하던 “흑층사(黒層社)”에도 참가했다. 한편, 신입생 때 학생운동에 잠시 관여한 것 외에는 대학 학내 운동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된 한 학년 아래의 친구이자 일본조선연구소 연구생이었던 뮤지션 타케다 켄이치의 “조선혁명언구회”에 상담역으로 이름을 올렸다. 후에 타케다는 사이토의 조선 문제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영향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1971년, 대학을 중퇴하고 가쓰시카구 아오토에 책대여점을 개업했다. 한편 학창시절 활동으로 쌓은 인맥으로 인하여 히라오카 마사아키 등의 텍크사 쟁의에 참가했다. 이 때 시부야 근처에 살던 대학생 에키다 유키코와 알게 되었다. 한편 히라오카가 저서 『중국인은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쓸 때 자기 고향 무로란에 대한 자료조사를 해 주었다. 야마구치 켄지・오오타 류・사사키 쇼지・오오타 마사쿠니 등의 레볼트사(レボルト社)에 타케다와 함께 드나들던 사이토는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종종 남한에 건너가 남한 반정부세력 네트워크와의 교류를 모색했다. 그러던 와중 사사키 쇼지의 동생 사사키 노리오와 친해졌고, 의기두합해서 함께 북해도의 아이누 거주구 순회여행을 했다. 이 때 사사키 노리오를 통해 오르그되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가담, “대지의 엄니” 그룹을 결성했다. 1974년 에키다 유키코를 동 그룹에 오르그했고, 이후 사실혼 관계가 되었다. 한편, 당시 오오타 류・히라오카 마사아키・타케나카 로 등이 주창한 궁민혁명론에 공명하여, 요세바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아온 남베트남 난민들도 오르그하려 했으나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산야 요세바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하다가 후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을 결성하는 구로카와 요시마사와도 이 무렵 안면을 텄다. 상경 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을 “카즈(かず, 和의 다른 독법)”라고 자칭했고, 여권에도 이름을 Kazu라고 표기했다. 그래서 사실혼 아내인 에키다도 사이토가 죽을 때까지 그의 본명을 몰랐다. 체포 당시 사이토는 나카가와(中川)라는 가명으로 조후역전의 시노(しの)라는 다방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75년 5월 19일 아침 8시경, 거주하던 카메이도의 츠타바맨숀(ツタバ・マンション)에서 취침하던 중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에키다와 함께 체포되었다. 사이토는 경시청으로 연행되는 도중에 자결용으로 숨겨뒀던 청산가리를 삼켜 음독했고, 같은 날 사망했다. 이 청산가리는 다이도지 아야코가 근무처에서 훔쳐 나눠준 것이었다. 에키다는 자살에 실패해 기소되었다. 사이토의 자살로 인해 그만 알고 있던 정보들(예컨대 관서지방에 협력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등)은 어둠에 묻히게 되었다. 이런 정보들은 에키다 등 생존 멤버들도 알고 있지만 자백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에키다는 『하지만 나에게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에서 협력자들의 존재를 암암리에 암시하고 있다. 사이토는 “권력에의 일체의 굴복을 거부하고 자살했다”는 이유로 생존 멤버 및 지원자, 동조자 등에게 “순교자”라고 “성인화”되었고, 심지어 민족파 우익들에게도 찬양받았다. 반면 “쉬이 자백해버린” 생존 멤버들(특히 가타오카 도시아키, 다이도지 마사시가 타겟이 되었음)은 사이토와 비교당하여 사사키 쇼지 등 지원자들에게 “자공총괄지원”(自供総括支援) 명목으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생존 멤버들은 “카즈”의 머릿글자 K와 후나모토 슈지의 머릿글자 F를 따서 옥중에서 “KF부대”를 결성, 『반일혁명선언』도 이 “KF부대(준)” 명의로 출판되었다. KF부대는 에키다 유키코・다이도지 아야코・아라이 마리코 등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후 장렬한 옥중투쟁에 돌입했다. 다카 사건으로 석방되어 일본적군에 합류했다가 1995년 다시 체포된 에키다는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진술서에서 그 당시에 자살을 정당화・영웅화한 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비판적으로 회고했다.
우메나이 쓰네오(일본어: 梅内 恒夫 (うめない つねお), 1947년 8월 23일 ~ 생사불명)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우메나이 쓰네오(일본어: 梅内 恒夫 (うめない つねお), 1947년 8월 23일 ~ 생사불명)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활동가였다. 1947년 아오모리현에서 태어났다. 아오모리현립 하치노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후쿠시마현립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했고, 적군파가 결성되었을 때 그 멤버가 되었다. 후에 연합적군 멤버가 되는 우에가키 야스히로를 적군파로 오르그하기도 했다. 우메나이는 조직에서 폭탄제조를 담당했으며, 그가 고안한 폭탄은 속칭 “우메나이 폭탄(梅内爆弾)”으로 불리며 신좌파의 폭탄투쟁을 비약시켰다. 그러나 대보살고개 사건이 수사될 때 우메나이의 이름이 부각되면서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으로 지명수배되었다. 수배된 직후 지하로 잠적했고, 1972년 5월 10일 『영화비평』에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에게서 일제타도를 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수기를 기고하여 오오타 류・타케나카 로・히라오카 마사아키 등에게 응원을 보냈다. 오오타가 “동지로서 공연하게 확인하자”고 화답했으나 우메나이의 대답은 없었다. 이것이 우메나이의 마지막 소식이며, 그대로 생사불명이 되었다. 이 수기에서 표현된 사상은 이후 일본원주민론으로 결실을 맺어 반일주의 테러가 빈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1월 10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신좌파 테러리스트 가운데는 공소시효가 만료되면 공연활동조직 등을 통해 성명을 내거나 지원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으나, 우메나이는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불명 상태로 남아 있다. 우메나이가 그다지 거물이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 적군파가 M작전(은행강도)을 벌이려 하면 꽁무니를 뺐기 때문에 “비비리스트(ビビリスト)”라는 별명도 있었다. 우메나이 폭탄이라는 것도 파괴력만 무식하게 높을 뿐 중량이 3 kg 이상으로 너무 무거워, 안전권 20미터 밖에서 투척하려면 투포환 선수 수준의 팔힘을 요하는 등 실용성이 부족했다. 평생을 지명수배자로 살다 생사불명이 된 것만으로 운동사에 “전설의 사나이”로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시게노부 후사코(일본어: 重 (しげ)信 (のぶ) 房 (ふさ)子 (こ): 1945년 9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시게노부 후사코(일본어: 重 (しげ)信 (のぶ) 房 (ふさ)子 (こ): 1945년 9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중앙위원, 일본적군 최고간부를 역임했다. 헤이그 사건의 공모공동정범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징역 20년 판결을 받았다. 동일본 성인교정의료센터에서 복역 중이었다.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 시게노부 스에오는 혈맹단 단원 요츠모토 요시타카와 동향인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우익단체 금계학원 문하생이었다. 후사코는 이 부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소녀 시절에는 작은친절운동에 열심히 임해 표창을 받은 문학소녀였다. 도쿄도립 제1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키코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초등학교 교사를 목표로 삼아 메이지대학 문학부 사학지리학과 야학에 다녔다. 대학에서 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일규』(一揆)라는 동인지를 냈다. 야학 2학년차에 문학연구회가 속한 동아리연합회 사무장을 맡고 있던 시게노부는 학비인상에 반대하는 메이지대 투쟁에 참여했다. 이 때 나중에 연합적군 산악베이스 사건의 희생자인 토야마 미에코(당시 2부법학부 재학, 기린맥주 근무)와 알게 된다. 메이지대 투쟁에서 본부와 타협해 투쟁을 말아먹은 제2차 분트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재건에 협력해달라고 조직화되어 분트에 가입했다. 이후 분트 계열의 명대현대사상연구회, 2부의 사회주의학생동맹 책임자로 활동, 칸다 카르티에 라탱 투쟁에 참여했다. 이후 분트가 분열되었을 때 적군파에 창립 멤버로 참가. 시오미 타카야 등 간부들이 체포된 뒤 조직 주도권을 잡은 모리 츠네오와 대립했다. 시게노부는 1971년 국제근거지론에 근거하여 팔레스타인에 적군파의 해외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시게노부는 오쿠다이라 츠요시와 위장결혼하여 "오쿠다이라 후사코" 호적을 얻어 2월 28일 출국했다. 이후 오쿠다이라 등과 팔레스타인에서 일본적군을 결성, 창설 당시에는 "아랍적군", "적군파 아랍위원회", "혁명적군" 등을 칭하면서 그 이름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1974년 이후 "일본적군"을 정식 명칭으로 했다. 시게노부가 "최고지도자"가 된 일본적군은 레바논의 베카고원을 주요 근거지로 "혁명운동"을 자칭,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등 팔레스타인인 극좌무장단체와 연계하여 일련의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외국 공관의 정부요인이나 납치한 비행기 승객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받거나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민간인도 말려드는 테러를 반복해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시게노부는 헤이그 사건엑 관여하여 국제수배를 받고, 불법으로 입수한 위조여권을 사용해 일본에 불법입국한 후 잠시 오사카시 니시나리구의 아파트에 숨어 있었다. 2000년 일본적군 지원자들을 사찰하고 있던 오사카부경 경비부 공안 제3과에서 사찰 대상자가 시게노부를 닮은 여성과 접촉한 것을 확인, 수사를 시작했다. 시게노부는 사마귀가 특징으로 알려져 화장으로 사마귀를 숨기고 있었지만, 특유의 담배 피우는 방법과 커피잔에서 채취한 지문으로 신분이 특정되었다. 이로써 헤이그 사건 26년만인 2000년 11월 8일 오사카부 타카츠키시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오사카에서 경시청으로 이송되던 중에는 도카이도 신칸센을 사용했으며,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독방에 갇혀 이송되었다. 시게노부가 체포되었을 당시 압수된 자료에 따르면 시게노부는 1997년 12월부터 2000년 9월까지 신원을 사칭하여 일본 여권을 취득,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총 16회에 걸쳐 중공 등지에 출입국을 반복했다. 1991년부터는 일본에서의 무력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혁명당" 및 그 공연활동부문을 담당하는 위장조직 "희망의 21세기"를 설립, 그것을 발판으로 일본사회당과의 연계를 꾀하고 있었다. 희망의 21세기는 경시청과 오사카부경의 습격을 받았지만 일본적군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사회민주당 구의원의 자택 등도 동시 수색을 받았고 사회민주당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실관계는 조사할 것”이라고 했다. 시게노부와 함께 압수된 증거에 의해 지원조직의 전모가 밝혀져 각지의 회사 사장・교사・의사・병원 직원들이 시게노부를 은닉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2001년 옥중에서 사실상 붕괴한 일본적군의 해산을 발표했다.
다키자키 다케미쓰(滝崎武光, 1945년 6월 10일 ~)는 일본의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자동화 센서, 비전 시스템, 바코드…
다키자키 다케미쓰(滝崎武光, 1945년 6월 10일 ~)는 일본의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자동화 센서, 비전 시스템, 바코드 판독기, 레이저 마커, 측정 기기 및 디지털 현미경을 제조하는 일본 제조업체인 키엔스의 명예 회장이자 창립자이다. 2022년 9월 29일 현재 다키자키의 순자산은 186억 달러이다.
마타이치 세이지(又市征治, 1944년 7월 18일 ~ 2023년)는 일본 사회민주당 소속의 참의원 의원이다. 도야마현…
마타이치 세이지(又市征治, 1944년 7월 18일 ~ 2023년)는 일본 사회민주당 소속의 참의원 의원이다. 도야마현 도야마시에서 태어나, 도야마 현립 도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도야마 현청 직원, 자치노 도야마 현 본부 서기장, 부집행위원장,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당선 후에는 정책심의회 부회장과 참의원 국회대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마타요시 미쓰오(일본어: 又吉光雄, 1944년 2월 5일 ~ 2018년 7월 20일), 자칭 마타요시 예수(일본어…
마타요시 미쓰오(일본어: 又吉光雄, 1944년 2월 5일 ~ 2018년 7월 20일), 자칭 마타요시 예수(일본어: 又吉イエス 마타요시 이에스[*])는 일본의 군소정당 정치인이었다. 스스로를 "유일신 마타요시 예수"라고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케모토 노부히로(일본어: 竹 (たけ)本 (もと) 信 (のぶ)弘 (ひろ): 1940년 2월 24일- )는 일본 신좌파…
다케모토 노부히로(일본어: 竹 (たけ)本 (もと) 信 (のぶ)弘 (ひろ): 1940년 2월 24일- )는 일본 신좌파 테러리즘 활동가다. 운동 시기에는 다키타 오사무(滝田 修)라는 가명을 자칭했다. 1971년 사이타마현 아사카 주둔지의 자위관 살해사건의 공동정범으로 지명수배되어 10년간 도피하다 체포되었다. 현재는 유한회사 미디어컴(有限会社メディアコム)의 대표다. 교토부 교토시에서 교토교육대학 명예교수 다케모토 마사노부의 차남,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교토부립 라쿠호쿠 중고등학교를 졸업, 1960년 교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1964년 교토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으로 진학, 독일사회사상사(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를 전공했다. 대학원 시절 『가로』 1965년 11월호에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서 “나의 문제의식에 매우 날카롭게 육박했다”고 예찬한 게시물을 게재했다. 1967년 조수시험에 합격,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교토대학 경제학부 조수가 되었다. 동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운동이론」을 잡지 『사상』(이와나미 서점)에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끈다. 1968년 젊은 연구자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한편, 교토대 투쟁이 시작되면서 조수로서 투쟁에 참여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부업으로 난바 예비교(입시학원) 강사를 겸임했다. 이 무렵부터 "다키타 오사무"라는 필명으로 적극적으로 논문을 집필했다. 1968년 츠지모토 노리아키의 다큐멘터리 영화 《빨치산 전사》(パルチザン前史)에 출연, 과격파의 교조라고 주목을 받고 “일본의 게바라”라고 불리기에 이른다. 1970년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하자(미시마 사건) “우리는 좌익사상으로서 탈락이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인간은 우리 중에는 한 명도 없었다. 놀라웁다,” “70년대 투쟁을 해내기 위해서는 신좌파 쪽에서도 "미시마"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발언, 빨치산을 조직하여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주간 아사히』 지상에서 오오하시 쿄센과 대담하기도 했다. 다케모토의 폭력혁명 이론은 전국의 전공투 학생들에게 심정적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같은 학교 출신의 오쿠다이라 츠요시(시게노부 후사코의 호적상 남편)와 야스다 야스유키 등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1972년 텔아비브 공항 난사사건을 일으켰다. 1971년 8월 아사카 주둔지에서 일어난 자위관 살해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1972년 1월 9일 지명수배되었다. 이에 다케모토는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누명을 쓰고 관헌에 스스로 출두할 의무는 없다는 성명을 내고 오사카부 다카쓰키시의 집에 처자를 남겨둔 뒤 오사카부 네야가와시의 애인에게 도피, 잠행 생활에 들어갔다. 교토대학 평의회는 1977년 6월 다케모토에게 자격 면직 처분을 내렸다. 1980년 6월 강도예비죄의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직전 새로이 강도치사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공소시효가 12년 연장되었다. 다케모토는 잠행 중 다키타 오사무 명의로 『지금 잠행중・중간보고』(只今潜行中・中間報告)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동안 교토부학련 집행위원인 친구 집(나라현 야마토타카다시), 영화감독 츠치모토 노리아키의 동생의 집(도쿄도 세타가야구), 변호사 아오키 에이고로의 조카의 집(도쿄도 신주쿠구), 화가 마루키 이리의 집(사이타마현 히가시마츠야마시), 부락민 시인 우에마츠 야스타로의 집(사이타마현 후카야시) 등을 전전했고, 야마자키 아츠시(山崎 篤)라는 가명으로 모텔 허드렛일, 가정교사, 국수집 점원, 정원업, 원석업, 토건업, 포장업, 전기공업 하청업, 장거리 트럭 조수 등의 일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다. 당국의 경각심을 피하기 위해 지적장애인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그 뒤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의 프레스공장 선반공으로 일을 하다가 작업 중 사고로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절단당했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된다. 군마현 오이즈미정, 군마현 다테바야시시, 도쿄도 세타가야구, 가와사키시 다마구 등지를 전전하다가 1982년 8월 8일 16시 55분 카와사키시 다마구 고구치의 이쿠타 녹지 일본민가원에서 애인과 산책하던 도중 사이타마현경에게 체포되었다. 10년 7개월간의 도피 생활이었다. 우라와 지방재판소에서 다케모토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1989년 3월 2일 재판소는 강도치사모의를 부정하게 방조한 혐의에 대해 유죄,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변호인단 중 한 명이 야스다 요시히로였다. 우라와 구치소에 미결수로서 6년 7개월째 구금되어 있어서 선고형량을 이미 채웠기 때문에 판결 당일 석방되었다. 1989년 12월 다케모토 노부히로 명의로 「다키타 오사무 해체」를 간행, 과거 혁명의 비위를 인정했다. 다케모토는 여기서 “과격파 지도자 다키타 오사무라는 위명은 경찰과 경찰을 추종하는 언론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그런 허상을 마음에 들어하여 수용하여 허상을 만드는 데 동참했던 셈인 바, “시대의 분위기에 영합했다고 비판받아도 항변할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고 회고했다. 한편 재판에 관해 도쿄 고등재판소에 항소했지만(검찰은 항소하지 않았다) 1992년 7월 21일 항소를 취하하면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1989년 구치소에서 나온 뒤 TV프로그램 제작사 등을 거쳐 1996년 영상제작회사인 유한회사 미디어컴을 설립했다. 현재까지도 자신은 결백하며 자신은 “반혁명집단 내지 경찰권력의 정치적 의지하에 장치된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사카와 요헤이(笹川 陽平, 1939년 1월 8일~)는 일본재단(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 회장이다. 2차 세계대전 후 A급…
사사카와 요헤이(笹川 陽平, 1939년 1월 8일~)는 일본재단(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 회장이다. 2차 세계대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됐던 사사카와 료이치의 아들이기도 하며 세계보건기구(WHO) 한센병 퇴치 대사, 한센병 인권 계발 대사(외무대신이 임명)이다.
칸바 미치코(일본어: 樺 (かんば) 美 (み)智 (ち)子 (こ), 1937년 11월 8일-1960년 6월 15일)는 일본의…
칸바 미치코(일본어: 樺 (かんば) 美 (み)智 (ち)子 (こ), 1937년 11월 8일-1960년 6월 15일)는 일본의 운동권 학생이다. 도쿄대학 재학 중 안보투쟁 때 사망했다. 수학자 카바 세이토의 증손녀이며 사회학자 칸바 토시오의 딸이다. 도쿄도 키타타마군 무사시노정(현 무사시노시) 출생. 위로 오빠가 두 명 있었다. 중학교 때 부친이 고베대학에 부임하면서 효고현 아시야시로 이사했다. 아시야시 리츠야마테중학교, 효고현립 고베고등학교를 졸업 후 재수하여 도쿄의 연수학관에 다녔는데 수업에 만족하지 못해 6월 코로외국어예비교로 옮겼다가 2학기부터 슨다이예비학교로 옮겼다. 1957년 도쿄대학 문과2류(현 문과3류)에 입학, 역사학자 나가사키 노부코 등이 동기였다. 1957년 11월 생일 날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제1차 공산주의자동맹(제1차 분트) 서기국원으로서 60년 안보에 참여했다. 76명이 검거된 1960년 1월 26일 하네다공항 점거사건 때 도쿄대 문학부 자치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했다가 검거, 구치소에 들어갔지만 불기소 처분되었다. 동년 6월 15일 시위 때 주류파전학련이 중의원 남통용문을 통해 국회 돌입을 시도하여 경찰과 충돌했을 때 사망했다. 향년 22세. 사망 당일 크림색 가디건에 흰색 블라우스, 짙은 갈색 바지 차림이었다.
카로우지 켄타로(일본어: 唐牛 健太郎 (かろうじ けんたろう): 1937년 8월 10일 - 1984년 3월 4일)는 일본의…
카로우지 켄타로(일본어: 唐牛 健太郎 (かろうじ けんたろう): 1937년 8월 10일 - 1984년 3월 4일)는 일본의 학생운동가다. 1960년 안보투쟁 당시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위원장이었다.
정경묵(鄭京黙, 일본어: 久保 覚 (くぼ さとる) 구보 사토루[*] 1937년 2월~1998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정경묵(鄭京黙, 일본어: 久保 覚 (くぼ さとる) 구보 사토루[*] 1937년 2월~1998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편집자이자, 문화 활동가, 한국 예능 문화사 연구가이다. 재일 한국인이며, 60년대부터 많은 작품들을 편집자로서 간행해, 「전집 현대문학의 발견」(학예서림)과 「하나다 세이키 전집」(고단샤)의 편찬에서도 참여했다.
시미즈 타케오(清水 丈夫, 1937년 - )은 일본의 신좌파 활동가이다.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의 (약칭…
시미즈 타케오(清水 丈夫, 1937년 - )은 일본의 신좌파 활동가이다.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의 (약칭 : 혁공동 전국위원회, 통칭 : 중핵파) 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