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츠네(初音, 1990년 10월 11일 ~)는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원래 본명인 오쿠무라 하츠네(奥村初音)로…하츠네(初音, 1990년 10월 11일 ~)는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원래 본명인 오쿠무라 하츠네(奥村初音)로 활동했으나, 2009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고 나서 가수라는 것에 대한 기합을 넣는다는 의미로 하츠네(初音)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 3월 31일로서 켄온(소속사) 및 에이벡스 트랙스(레이블)에서 독립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기로 표명하였다. 현재까지 매인 라이브 공연 "원맨라이브 하츠네 차실" 및 기타 레이블의 라이브를 포함하여, Rebright La' Stand 라는 Rock 밴드를 결성하여 보컬을 담당하고 있으며, 독립 후에도 싱글 및 앨범을 발매하고 2015년 4월 21일 통산 9번째 앨범 "바람은 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가 발매되었다.
히라마쓰 겐지(일본어: 平松 賢司, 1956년 12월 22일 ~ )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외무성…히라마쓰 겐지(일본어: 平松 賢司, 1956년 12월 22일 ~ )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외무성 지구규모과제심의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주인도 특명전권대사,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주스페인 특명전권대사를 맡았다.
야마자키 히로아키(일본어: 山崎 博昭 (やまざき ひろあき): 1948년 11월 12일 - 1967년 10월 8일)는 일본의…야마자키 히로아키(일본어: 山崎 博昭 (やまざき ひろあき): 1948년 11월 12일 - 1967년 10월 8일)는 일본의 신좌파 학생운동가다. 제1차 하네다 투쟁 때 사망했다. 고치현 출신. 오사카시립 맛타중학교, 오사카부립 오오테마에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교토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동년 4월 중핵파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중핵파계 반전고협 결성에 참여하여 데모를 자주 나갔고, 스나가와 투쟁에도 참여했다. 1967년 10월 8일 제1차 하네다 투쟁(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 저지투쟁)에 참가했다. 학생들과 경찰기동대 사이에 격렬한 공방이 벌어져서, 학생들이 기동대에게서 물대포 탑재 경비차를 강탈해서 폭주시키는 등 상황이 격화되는 가운데, 경비차가 지나간 뒤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곧바로 기동대원이 구조했지만 사망이 확인되었다. 향년 18세. 10월 17일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학살항의・야마자키군 추도중앙장이 개최되어 이노우에 키요시가 조사를, 칸바 토시오가 조시를 낭독했다. 당시 경찰측은 동료 학생운동가가 경비차를 탈취해 몰다가 야마자키를 치어 죽였다고 발표하고, 운전했다는 학생을 체포했지만 입건하지 못하고 불기소했다. 사망 직후 도쿄도 감찰의무원에서 “사인은 뇌좌멸(으스러짐)”이라는 검안서(1967년 10월 9일 오오타구청 발행)를 발표했다. 전라의 시체를 대면한 유족과 변호단은 경찰의 발표와 달리 타이어 자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변호사 코나가이 요시히로는 사인을 둘러싼 경찰발표의 의혹, 모순을 언론지상에서 추궁했다. 그러나 부검을 실시한 게이오기주쿠대학 의대 교수는 곤봉 같은 것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적인 골함몰이나 타박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타이어의 뚜렷한 흔적은 없지만 타이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부상이 얼굴 왼쪽에 있다는 점, 머리・가슴・배에 걸쳐 중량을 받은 압박흔이 있다는 점을 들어 차에 치어 죽은 것이 가장 강하게 생각된다고 소견을 밝혔다. 언론들은 야마자키가 쓰러진 직후에 학생들이 경비차를 물로 씻어 지문을 지우려 했다거나, 내부 핸들에서 학생들의 지문이 검출되었다고 보도했고, 차량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미는 학생들의 사진, 폭주하는 차량의 영상 같은 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우키 소이치는 반체제운동 측에서는 일관되게 야마자키가 권력에게 학살당했다고 유보 없이 주장해 왔고, 자신도 한참 후까지 계속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자저에서 말하고 있다. 야마모토 나츠히코・하니 고로 등은 설사 학생이 운전해서 치어죽인 것이라 하더라도 학생으로 하여금 거기에 이르게 한 것은 국가권력이니 책임은 권력에게 있다는 논법을 사용했다. 와타나베 쇼이치는 칸바 미치코 사망사건 때 동경대학 총장 카야 세이지가 “순수한 학생을 분노케 한 기시 내각이 나쁘다”고 말했던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자키의 죽음은 칸바와 달리 광범위한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타카기 마사유키는 이것이 이 때 이미 학생운동이 고립화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코바야시 테츠오와 같은 논자는 야마자키의 죽음이 이듬해의 전공투 운동을 비롯한 학생운동 폭발의 마중물이 되었고, 고등학생들까지 정치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후 학생반전운동은 70년 안보를 목표로 달려가며 사세보, 산리즈카, 오키나와, 전공투로 이어지며 고양된 측면이 있다. 유골은 오사카부 가타노시 헤이와다이공원에 매장되어 있다.
미타 마사히로(일본어: 三田 誠広, 1948년 6월 18일 ~ )는 일본의 소설가이며, 일본문예가협회의 부이사장…미타 마사히로(일본어: 三田 誠広, 1948년 6월 18일 ~ )는 일본의 소설가이며, 일본문예가협회의 부이사장, 일본문예저작권센터의 사무국장, 저작권 문제를 고민하는 창작자 단체 협의회의 의장, 역사 시대 작가 클럽의 회원이다. 2019년부터 무사시노 대학의 명예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일본어: 山本 義隆: 1941년 12월 12일- )는 일본의 과학사학자, 물리학자, 교육자, 학생운동가다.…야마모토 요시타카(일본어: 山本 義隆: 1941년 12월 12일- )는 일본의 과학사학자, 물리학자, 교육자, 학생운동가다. 1960년대 도쿄대 투쟁 당시 도쿄 대학교 전학공투회의 대표였다. 슨다이 예비학교의 물리과 강사를 역임했다. 아내는 장정가 야마모토 미치요다. 오사카부 출신으로, 오사카 시립 히가시 중학교, 오사카 부립 오테마에 고등학교 졸업. 1964년 도쿄 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학사, 이후 도쿄 대학 물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중퇴. 이후 동 대학원에서 소립자론을 전공, 유카와 히데키가 소장으로 있는 교토대학 기초물리학연구소에 국내유학한다. 물리학자로서 촉망받는 인재였지만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학교에서 쫓겨나듯 나왔기에 연구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60년대 도쿄 베트남 반전회의 활동에 종사하여 도쿄대 전공투 의장을 맡았다. 1969년 야스다 강당 사건 직전에 경찰 수배를 받고 지하로 잠적했지만 같은 해 9월 히비야에서 전국전공투연합 결성대회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니혼 대학 전공투 의장인 아키타 아케히로와 함께 당대 전공투의 상징적 존재였는데, 두 사람은 구치소에서 만났다. 1973년 도쿄 구치소에서 출소한 후에는 정치를 하지 않고 과학사 및 철학 분야의 번역가로 활동했다. 또한 예비학교(일본의 학원) 강사로 활동하여 슨다이 예비학교에서 물리학과 강사를 30년 이상 맡고 있다. 슨다이의 학원교재 「파란책(青本)」의 도쿄대 물리 입시문제 해설을 25년간 썼다. 학원 제자로 야마가타 히로오 등이 있다. 동일본 대지진 이전부터 원자력발전에 대한 경종을 울려왔고, 후쿠시마 발전소 사고 이후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을 출판했다.
고태보(高泰保, 1939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농학자이다. 국제 고려학회 과학기술부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고태보(高泰保, 1939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농학자이다. 국제 고려학회 과학기술부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아시아에 위치한 중국,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문제 해결 연구 및 육종학에 관련한 연구를 했다.
유카와 스미(일본어: 湯川スミ, 1910년 4월 25일~2006년 5월 14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다. 본명은 유카와…유카와 스미(일본어: 湯川スミ, 1910년 4월 25일~2006년 5월 14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다. 본명은 유카와 스미코(湯川 澄子 ゆかわ すみこ[*])이며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의 부인이다. 세계연방운동협회 명예회장, 세계연방전국부인협의회 회장, WFM 명예회장, 세계연방교토부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