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와타 히데노리일본어: 千綿 偉功 지와타 히데노리[*], 1972년 4월 6일 ~ )는 사가현 사가시 출신의 일본…
치와타 히데노리일본어: 千綿 偉功 지와타 히데노리[*], 1972년 4월 6일 ~ )는 사가현 사가시 출신의 일본 싱어송라이터다. 사가 시립 성동 중학교와 사가 현립 서 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가 니시 고등학교: 9명
치와타 히데노리일본어: 千綿 偉功 지와타 히데노리[*], 1972년 4월 6일 ~ )는 사가현 사가시 출신의 일본…
치와타 히데노리일본어: 千綿 偉功 지와타 히데노리[*], 1972년 4월 6일 ~ )는 사가현 사가시 출신의 일본 싱어송라이터다. 사가 시립 성동 중학교와 사가 현립 서 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무라이 쿠니오(Kunio Murai, 1944년 9월 20일 ~ )는 일본의 배우, 성우, 텔레비전 배우이다. 중국…
무라이 쿠니오(Kunio Murai, 1944년 9월 20일 ~ )는 일본의 배우, 성우, 텔레비전 배우이다. 중국 톈진시에서 태어났다.
미카미 다쿠 또는 미카미 다카시(일본어: 三上卓, 1905년 3월 22일 ~ 1971년 10월 25일)은 일본 쇼와 시대에…
미카미 다쿠 또는 미카미 다카시(일본어: 三上卓, 1905년 3월 22일 ~ 1971년 10월 25일)은 일본 쇼와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해군 군인이자 우익 활동가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5.15 사건 및 전후의 3무 사건의 두 사건에 모두 참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최종 계급은 해군 중위였다.
고가 미네이치(일본어: 古賀 峯一, 1885년 9월 25일 ~ 1944년 3월 31일)는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의…
고가 미네이치(일본어: 古賀 峯一, 1885년 9월 25일 ~ 1944년 3월 31일)는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의 지휘관이다. 그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뒤를 이어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였으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사가현 출신으로 해군병학교 34기를 졸업하였다. 이후 해상근무와 육상근무를 경험하면서, 해군 장교의 출세코스인 해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고, 1927년의 런던 군축협상때 해군성의 수석부관으로 참석하여 조약 체결에 힘썼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각종 함장을 역임하다, 1932년 소장으로 승진하였고, 참모로서 군령부에 근무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시작하기 전에는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함께 전쟁보다는 영미와의 협상을 선호하는 협상파에 속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신분이 깊었다고 한다. 야마모토가 전사했을 때, 요코스카 해군기지 사령장관에서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미 제공권과 제해권은 연합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작전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항공모함과 육상항공기지를 증설하여 미해군의 기동함대에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알류샨 열도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으나, 일본의 생산력은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갈수록 함정과 항공기를 보존하는 보수적인 작전으로 기울어졌다. 1944년 3월, 필리핀의 팔라우와 다바오를 시찰하던 도중 비행기가 조난하여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5월까지 발표되지 않았고, 장례와 동시에 원수 계급이 추서되었다.
마사키 진자부로(일본어: 眞崎 甚三郎, 1876년 11월 27일 ~ 1956년 8월 31일)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마사키 진자부로(일본어: 眞崎 甚三郎, 1876년 11월 27일 ~ 1956년 8월 31일)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이자 일본 군벌 황도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햐쿠타케 사부로(일본어: 百武 三郎、1872년 6월 3일 ~ 1963년 10월 30일)은 일본의 해군 군인, 해군 대장…
햐쿠타케 사부로(일본어: 百武 三郎、1872년 6월 3일 ~ 1963년 10월 30일)은 일본의 해군 군인, 해군 대장, 시종장이었다. 동생 겐고는 해군 대장, 하루요시는 육군 중장을 지냈다.
난부 기지로(일본어: 南部 (なんぶ) 麒次郎 (きじろう) 난부 키지로우[*], 1869년 4월 2일 ~ 1949년 5월…
난부 기지로(일본어: 南部 (なんぶ) 麒次郎 (きじろう) 난부 키지로우[*], 1869년 4월 2일 ~ 1949년 5월 1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 총기 설계자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중장이며 훈2등 공학박사. 주로 메이지 시대 말기에서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일본 육군이 사용한 총기들을 개발한 기술장교이다. 현재도 일본 경찰관들이 제식 채용하고 있는 뉴 난부 M60 권총의 이름은 난부 기지로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하라구치 가즈히로(일본어: 原口 一博 하라구치 카즈히로[*], 1959년 7월 2일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입헌민주당…
하라구치 가즈히로(일본어: 原口 一博 하라구치 카즈히로[*], 1959년 7월 2일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입헌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다. 현재 입헌민주당 부대표를 맡고 있다. 이전에 사가현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간 내각의 총무대신으로도 있었다. 선거구는 사가현 제1구이다.
무타구치 렌야(일본어: 牟田口 廉也,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은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그는…
무타구치 렌야(일본어: 牟田口 廉也,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은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그는 1944년 버마 전선에서 무리하게 임팔 작전을 강행하였다가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일본 출신으로, 1910년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하고, 1917년 고급 참모과정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 혁명에 간섭한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하였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소좌 시절에는 캄차카반도에 잠입하여 홀로 종단하여 정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참모본부에서 근무, 황도파 계열의 군내 사조직인 사쿠라카이에 가담한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엔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육사 동기이자 동향인 쿠가 노보루 소좌에게 자결을 종용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1936년 중국에 파견되어 베이징에 주둔중인 제1연대의 연대장을 맡았다. 그가 맡고 있는 연대가 노구교 사건에서 선제 공격을 하며, 결국 이것이 중일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이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4군의 참모장을 맡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육군유년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제18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하였다. 무타구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후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바탄 반도전에 투입되었고,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다시 투입되었다. 이때 대본영에서는 인도진공을 계획하였으나, 밀림과 산악지역에서는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무타구치의 반대로 작전은 연기되었다. 무타구치는 1943년 3월에는 버마 방위를 담당하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영국군이 인도로부터 월경하여 버마의 일본군을 공격하자, 무타구치는 생각을 바꿔서 이전에 반대했던 인도진공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보급이나 병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전을 세워 휘하 부대장들이 모두 작전에 반대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일화로, 한 휘하 장교가 무타구치에게 보급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물어보자, "일본인은 본래 초식동물이고, 밀림에 널린게 풀이다. 보급은 소와 말로 하고, 부족해지면 그것들을 잡아먹으면 된다. 그래도 부족하면 적에게서 탈취하면 된다." 라고 대답했다. 결국 1944년 3월, 그 휘하에 있던 제15군(15, 31, 33사단으로 구성됨)은 빈약한 준비와 병참으로 인도공략을 위해 진격했으나, 8만 5천여 명의 병력중 5만 명이 대부분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대참패로 끝났다. (임팔 전투) 이후 책임을 지고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왔고, 1944년 12월 예편하였다. 1945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사관학교 예과의 교장이 되었으나, 일본이 항복하여 단명에 그쳤다. 그는 잔혹행위에 대한 전범용의자로 체포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으나 불기소 처분 후 재판을 위해 싱가포르로 압송되었고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48년 3월에 만기 석방되었다. 그는 전후에도 "부하의 무능때문에 임팔 작전이 실패했다"는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무타구치를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와 더불어 "삼대오물"(三大汚物)이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