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와 류호(大川隆法, 본명: 나카가와 타카시, 中川 隆; Nakagawa Takashi, 1956년 7월 7일 ~…오카와 류호(大川隆法, 본명: 나카가와 타카시, 中川 隆; Nakagawa Takashi, 1956년 7월 7일 ~ 2023년 3월 2일)는 일본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였으며 행복의 과학과 행복실현당의 CEO이자 창립자였다. 또한 뉴 스타 프로덕션 및 ARI 프로덕션이라는 조직에 소속된 두 회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오카와 류호의 조직은 이단이라는 비난을 널리 받아왔다. 이 종교의 지지자들은 현재 "엘 칸타레"라고 불리는 신과 헤르메스와 석가모니를 포함한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는 오카와를 숭배한다. 2023년 3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강상중(姜尙中, 1950년 8월 12일~)은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출생의 재일 한국인 2세이며, 대한민국 국적자…강상중(姜尙中, 1950년 8월 12일~)은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출생의 재일 한국인 2세이며, 대한민국 국적자 출신으로는 최초의 도쿄 대학 교수를 지낸 국제정치학자이다.
마쓰모토 겐이치(일본어: 松本 (まつもと) 健一 (けんいち): 1946년 1월 22일-2014년 11월 27일)는 일본의…마쓰모토 겐이치(일본어: 松本 (まつもと) 健一 (けんいち): 1946년 1월 22일-2014년 11월 27일)는 일본의 사상사학자다. 레이타쿠 대학 경제학부 교수. 중국일본어 연수센터 교수, 레이타쿠 대학 경제학부 교수, 레이타구 대학 비교문명문화연구센터 소장, 일반재단법인 아시아종합연구기구 평의원 의장, 동일본 국제대학 객원교수, 내각관방참여 동아시아 외교문제 담당 등을 역임했다. 군마현 출신. 사이타마 현립 구마 고등학교를 졸업해 1968년 도쿄 대학 경제학부 졸업, 아사히 글라스에 입사했다. 1969년 퇴사하고 호세이 대학 대학원에서 현대일본문학 전공. 1971년 평전 『젊은 키타 잇키』로 주목을 받는다. 1974년 박사과정 만기퇴학. 재야 역사학자로 저술을 계속한다. 1983년 중국일본어 연수센터 교수로 부임. 1994년 레이타쿠 대학 경제학부 교수, 2009년 레이타쿠 대학 비교문명문화연구센터 소장에 취임했다. 간 내각의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와 대학시절 친구이며, 2010년 10월부터 2011년 9월까지 내각관방참여 동아시아 외교문제담당을 맡았다. 또한 시바 료타로 기념재단 평의원, 일본재단 평의원, 시바 료타로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그의 작풍은 근대 일본 정신사, 아시아 문화론을 전문으로 한다. 다케우치 요시미, 하시카와 분소의 맥을 이어 우익, 좌익의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와 사상을 탐구한다. 다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몇 권씩 책을 간행했다. 이런 사상사에 입각하여 일본의 국민성("내셔널 아이덴티티") 재구축을 목표로 하는 온건 보수주의자로서 정치평론도 많이 했다. 2014년 11월 27일 암으로 별세. 향년 68세.
니시베 스스무(일본어: 西部 邁 (にしべ すすむ): 1939년 3월 15일 - 2018년 1월 2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니시베 스스무(일본어: 西部 邁 (にしべ すすむ): 1939년 3월 15일 - 2018년 1월 2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도쿄대학 교양학부 교수, 격월간지 『표현자』 고문을 역임했다. 북해도 출신으로, 동경대 입학 후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멤버가 되어 동경대 자치회 위원장으로서 60년 안보투쟁에 참여했다. 안보투쟁 이후 동경대 대학원에서 근대경제학을 전공하여 요코하마국립대학 조교수, 동경대 조교수, 영미 유학을 거쳐 동경대 정교수가 된다. 1980년대부터 보수논객으로 전향했고, 동경대 고바마 소동 때 교수직을 사직하고 이후로는 재야평론가로서 활동했다. 새역모에서도 활동했고, 핵무장과 징병제 도입을 주장했다. 2018년 타마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구로카와 기쇼(일본어: 黒川紀章, 1934년 4월 8일 ~ 2007년 10월 12일)는 일본의 건축가이다. 부인은 와카오…구로카와 기쇼(일본어: 黒川紀章, 1934년 4월 8일 ~ 2007년 10월 12일)는 일본의 건축가이다. 부인은 와카오 아야코. 주식회사 구로카와 기쇼 건축 도시 설계 사무소의 대표이사였다. 1986년 프랑스 건축 아카데미의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일본회의의 대표 위원이었다. 공생신당을 창당하고 2007년 도쿄도지사 선거와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오타 류(일본어: 太 (おお)田 (た) 竜 (りゅう), 1930년 8월 16일-2009년 5월 19일)는 일본의 음모론자이며…오타 류(일본어: 太 (おお)田 (た) 竜 (りゅう), 1930년 8월 16일-2009년 5월 19일)는 일본의 음모론자이며 예전에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본명은 구리하라 도이치(일본어: 栗 (くり)原 (はら) 登 (とう)一 (いち))이며 가라후토청 도요하라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 출신이다. 도쿄이과대학을 중퇴하였으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여 혁공동 제4인터파 창당에 가담, 이후 위원장을 지냈다. 궁민혁명론을 주창하였으며 1970년대에 트로츠키주의에서 벗어나 아이누모시리 독립운동으로 선회하여 이후 생태주의 운동, 자연식 운동으로 전향했다가 후에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같은 비밀결사의 유대금융자본 세계지배 음모론을 신봉했다. 그 뒤에는 불교 철학자를 자처했으며 말년에는 인류가 파충류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음모론을 주장했다. 2009년 5월 19일 복막염으로 죽었다.
다케나카 로(일본어: 竹中 労 (たけなか ろう): 1928년 3월 30일 - 1991년 5월 19일)는 일본의 르포라이터…다케나카 로(일본어: 竹中 労 (たけなか ろう): 1928년 3월 30일 - 1991년 5월 19일)는 일본의 르포라이터, 아나키스트, 평론가다. 도쿄도 출신. 삽화가 다케나카 에이타로의 아들로, 본명은 츠토무다.
오쿠자키 켄조(일본어: 奥崎 (おくざき) 謙三 (けんぞう): 1920년 2월 1일-2006년 6월 16일)는 일본 육군…오쿠자키 켄조(일본어: 奥崎 (おくざき) 謙三 (けんぞう): 1920년 2월 1일-2006년 6월 16일)는 일본 육군 군인(최종 계급 상등병) 출신의 저술가, 배우다. 쇼와 천황 파칭코 저격사건, 황실 포르노 삐라 사건 등을 일으켰다. 스스로를 신군평등병(神軍平等兵)이라고 칭했다.
쓰루미 가즈코(일본어: 鶴見 和子, 1918년 6월 10일 ~ 2006년 7월 31일)는 일본의 사회학자이다. 1918년…쓰루미 가즈코(일본어: 鶴見 和子, 1918년 6월 10일 ~ 2006년 7월 31일)는 일본의 사회학자이다. 1918년 도쿄부 아자부구에서 태어났다. 1941년 배서 칼리지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다가 1942년 연락선으로 일본에 돌아왔다. 1946년 동생인 쓰루미 슌스케와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타니 미쓰오와 〈사상의 과학〉(思想の科学) 동인대회를 열고 잡지 《사상의 과학》을 창간했다. 1966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세이케이 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여러 편의 단카 가집을 쓰기도 하였다.
소 도신(宗道臣, 본명:나카노 미치아노, 中野道臣, 1911년 2월 10일 ~ 1980년 5월 12일)는 일본 군인이자…소 도신(宗道臣, 본명:나카노 미치아노, 中野道臣, 1911년 2월 10일 ~ 1980년 5월 12일)는 일본 군인이자 무술가였다. 그는 쇼린지 겐포와 콩기 젠 (金剛禅, Kongo Zen) 교리의 창시자이자 창시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쇼린지 겐포의 실무자들은 그를 "창시자"라는 뜻의 일본어로 '가시오'라고 부른다.
미카미 다쿠 또는 미카미 다카시(일본어: 三上卓, 1905년 3월 22일 ~ 1971년 10월 25일)은 일본 쇼와 시대에…미카미 다쿠 또는 미카미 다카시(일본어: 三上卓, 1905년 3월 22일 ~ 1971년 10월 25일)은 일본 쇼와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해군 군인이자 우익 활동가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5.15 사건 및 전후의 3무 사건의 두 사건에 모두 참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최종 계급은 해군 중위였다.
콘도 마가라(일본어: 近藤 真柄 (こんどう まがら): 1903년 1월 30일 - 1983년 3월 18일)는 일본의…콘도 마가라(일본어: 近藤 真柄 (こんどう まがら): 1903년 1월 30일 - 1983년 3월 18일)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여성운동가다. 사카이 토시히코의 딸. 18세 때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적란회 결성에 참가했고, 결성 직후 노동절 데모를 감행하여 회원 전원이 구속되었다. 이 때 최연소 데모 참가자이자 일본 최초의 여성 데모 참가자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적란회가 자연소멸하고 이듬해인 1922년 제1차 일본공산당에 입당, 오쿠 무메오 등과 함께 부인정치운동촉진회를 결성해 부인전선의 통일을 표방했다. 전후에는 일체의 정당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본부인유권자동맹 회장을 지냈으며, 코토쿠 대역사건의 진상규명 요구 운동을 운동을 했다. 타카세 키요시와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콘도 켄지와 재혼했다.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나 연구자 등이 면담을 딸 때나, 평생에 단 한 번도 옛 동지를 팔거나 폄하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니시다 미쓰기(일본어: 西 (にし)田 (だ) 税 (みつぎ): 1901년(메이지 34년) 10월 3일-1937년(쇼와 12년)…니시다 미쓰기(일본어: 西 (にし)田 (だ) 税 (みつぎ): 1901년(메이지 34년) 10월 3일-1937년(쇼와 12년) 8월 19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 사상가다. 육군 출신 재야우익사상가로서 재야와 육군 청년장교단을 연결하는 "혁명 브로커" 역할을 했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저술한 기타 잇키의 하수인 내지 수제자로서 그 영향을 받아 국가혁신의 뜻을 더욱 확대하였다. 니시다의 사상을 황도파 청년장교단이 신봉했다. 그 결과 1936년 황도파 청년장교단의 쿠데타 2·26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 니시다와 기타는 쿠데타 준비 과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했다.
난바 다이스케(일본어: 難 (なん)波 (ば) 大 (だい)助 (すけ): 1899년 11월 7일-1924년 11월 15일)는…난바 다이스케(일본어: 難 (なん)波 (ば) 大 (だい)助 (すけ): 1899년 11월 7일-1924년 11월 15일)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다. 1923년(다이쇼 12년) 12월 당시 섭정궁 히로히토 황태자를 엽총으로 암살 기도했다(토라노몬 사건). 대심원에서의 심리에서도 천황제 부정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대역죄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반역적 사회운동가다.
최창익(崔昌益, 1896년 2월 29일(1896-02-29) ~ 1957년 10월 6일(1957-10-06))은 일제강점기의…최창익(崔昌益, 1896년 2월 29일(1896-02-29) ~ 1957년 10월 6일(1957-10-06))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으며 공산주의자였다. 변호사 허헌의 사위인 그의 이명은 최창석(崔昌錫)·최창순(崔昌淳)·최동우(崔東宇)·이건우(李健宇)이다.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1925년 이후 공산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 검거를 견디지 못하고 1934년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퇴, 1936년 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뒤 김원봉 일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 화북으로 건너가 무정(武亭), 김두봉 등과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다. 8·15 해방 이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는 등 연안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재정상, 부수상 겸 재정상, 1955년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했다. 김두봉 시대 인민 정권이자 북한 인민 정부 시대의 제3대 재정상 시절이던 1954년 8월 3일, 김일성 총리의 독재화를 비판하다가 징처되어 같은 해 11월 22일, 북한 재정상 직에서 파면되었고 1년 후 1955년 8월 11일,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과 박헌영의 공격에 동참했지만 1956년 9월 23일,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중공의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그를 변호하여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그해 10월 재투옥 후 이듬해 옥사한다. 독립운동 시 가명은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등을 사용하였다.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의 남편이다. 함경북도 출신.
미노다 무네키(일본어: 蓑田 (みのだ) 胸喜 (むねき): 메이지 27년[1894년] 1월 26일 - 쇼와 21년[1946년]…미노다 무네키(일본어: 蓑田 (みのだ) 胸喜 (むねき): 메이지 27년[1894년] 1월 26일 - 쇼와 21년[1946년] 1월 30일)는 일본의 국수주의, 반공주의 사상가다. 구마모토현 출신,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 종교학과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예과 교수, 국사관전문학교 교수, 원리일본사 주재(主宰), 국제반공연맹 평의원을 역임했다.
다치바나 고자부로(일본어: 橘孝三郎, 1893년 3월 18일 ~ 1974년 3월 30일)는 일본의 정치 운동가…다치바나 고자부로(일본어: 橘孝三郎, 1893년 3월 18일 ~ 1974년 3월 30일)는 일본의 정치 운동가, 농본주의(農本主義) 사상가로, 파시스트이자 초국가주의자였다. 이바라키현 히가시이바라키군 출신으로, 고등학교 중퇴 후, 오스기 사카에와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의 책을 통해 영국의 시인·사회주의 사상가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와 표트르 크로폿킨 등의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외에 레프 톨스토이, 시라카바파(白樺派), 캉유웨이 등의 영향도 받았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강연 활동을 하여, 1929년 애향회(愛郷会)를 결성하였다. 이바라키현의 각 군에 지부가 형성되었으며, 농본주의에 의거하는 청소년 교육을 목표로 하여, 1931년 근로 학교 애향숙(愛郷塾) 을 설립하였다. 가자미 아키라에게 자금 원조를 받았으며,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를 알게 되어, 5·15 사건이 일어날 무렵 학원생 7명을 인솔해 도쿄의 변전소를 습격하였다.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과 살인·살인 미수 혐의를 받아 무기 징역 판결을 받았지만, 1940년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고향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였고, 1959년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全日本愛国者団体会議)의 고문이 되었다.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1892-03-04) ~ 1950년 10월 25일(1950-10-25))는 일제강점기…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1892-03-04) ~ 1950년 10월 25일(1950-10-25))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 등과 함께 변절한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 필명은 춘원생·경서학인(京西學人)·노아자닷뫼당백·Y생·장백·장백산인 등.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아울러 순한글체 소설을 쓰며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망명, 1919년 도쿄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된 이후 친일(대일협력) 성향으로 기울어 친일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전선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혔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을 집필하고 연설을 한 것이 눈에 띄며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징병제도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 제하에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 한국인 유학생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야마카와 기쿠에(일본어: 山 (やま)川 (かわ) 菊 (きく)栄 (え), 1890년 11월 3일 ~ 1980년 11월 2일)는…야마카와 기쿠에(일본어: 山 (やま)川 (かわ) 菊 (きく)栄 (え), 1890년 11월 3일 ~ 1980년 11월 2일)는 일본의 수필가, 사회주의 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다. 도쿄에서 개명된 무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1912년 여성영학숙(츠다주쿠대학의 전신)을 졸업했다. 1916년 야마카와 히토시와 결혼했다. 전전시대에 키쿠에는 적란회를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단체의 설립회원으로서 일본 여성주의의 전개에 지대하게 기여했다. 그녀는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진영을 “부르주아 부인들의 자선도락”이라고 맹공하는 한편, 사회주의 조직의 남성중심성 역시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7년 노동성 초대 부인소년국장으로 취임하여 1951년까지 재직했다.
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1964년 1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며…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1964년 1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단체조직과 항일활동을 하다가 8.15 광복 뒤에는 한민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한민당 정치노선에 싫증을 느껴 1946년 10월 탈당. 김규식계열 정치노선에 활동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나 뒤에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월북하였다. 경상도 기장군 출신이며, 본명은 김두전(金枓全)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일본어: 柳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는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야나기 무네요시(일본어: 柳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는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학습원(學習院) 고등부에 재학할 때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를 만들었다. 1913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유럽 유학 후 귀국하여 1919년에서 1923년까지 도요 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있었다. '사라지는 한 조선 건축물에 대하여'를 1922년 《개조》(改造) 9월호에 발표하는 등의 논설 활동을 했고, 1924년 서울에 조선 민속 미술관을 세우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했다. 한국의 전통 미술 및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평론 및 수집을 하였다. 한국의 미를 설명하면서 한국 민족의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민예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대표적인 성과가 1936년 도쿄도 메구로구에서의 민예관 설립이다. 일제 강점기 광화문 철거 당시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타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표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와쓰지 데쓰로(和辻 哲郎, 1889년(메이지 22년) 3월 1일 - 1960년(쇼와 35년) 12월 26일)는 일본의…와쓰지 데쓰로(和辻 哲郎, 1889년(메이지 22년) 3월 1일 - 1960년(쇼와 35년) 12월 26일)는 일본의 철학자, 윤리학자, 문화사학자, 일본사상사학자이다. 『고사순례(古寺巡礼)』, 『풍토(風土)』 등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윤리학 체계는 와쓰지 윤리학이라고도 불린다. 호세이대학 교수, 교토제국대학 교수,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본 윤리학회 회원이자,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효고 현 출신이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여, 니체 등의 서양철학을 연구했다. 나라의 사찰 건축과 불상의 미를 재발견하여 『고사순례(古寺巡礼)』(1919년)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인간학으로서의 윤리학(人間の学としての倫理学)』(1934년)으로 새로운 윤리학의 체계를 구축했다. 『풍토(風土)』(1935년), 『얼굴과 페르소나(面とペルソナ)』(1937년)으로도 유명하다.
이시와라 간지(일본어: 石原 莞爾, 1889년 1월 18일 ~ 1949년 8월 15일)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활약한…이시와라 간지(일본어: 石原 莞爾, 1889년 1월 18일 ~ 1949년 8월 15일)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활약한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별명으로 "육군의 이단아"가 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 근무하였으며, 1918년 장교의 출세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로 있을 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와 함께 1931년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 정부나 육군, 심지어는 관동군 상부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일으킨 일이었다. 그 뒤 1936년 청년 장교 쿠테타인 2.26 사건 때에는 참모본부 제2작전과장으로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여 1941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태평양 전쟁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 14일-1981년(쇼와 56년) 3월 6일)은 일본의 노동운동가다. 사회주의자에서 시작해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끝에 전후 일본사회당에서 의원을 지냈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이라쿠정의 요코하마 유곽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요코하마시 노바(野庭, 현재의 고난구)에서 보냈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외국인상관의 보-이로 일하다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근무하던 가운데 『만조보』에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가 쓴 반전시, 퇴사의 변을 보고 감동하의 노동운동에 투신, 코토쿠와 사카이가 발행한 주간지 『평민신문』의 비전론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자가 된다. 이후 사카이의 주선으로 와카야마현 무로군의 『무로신보』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1904년 『평민신문』 편집주간으로 참여했다. 『평민신문』에서 6살 연상의 칸노 스가와 내연관계가 되어 1907년 결혼했다. 이 때 사회주의 전도 과정에서 타나카 쇼조를 알게 되어 아시오 광독사건을 소재로 「야나카촌 멸망사」를 저술했다. 1908년 적기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금고 1년에 처해진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 스가가 코토쿠와 불륜관계가 되었다. 코토쿠는 모로오카 치요코와 이혼했고, 스가도 일방적으로 옥중의 아라하타에게 이혼장을 보냈다. 분노한 아라하타는 2년 뒤 출옥하여 권총으로 스가를 죽이려 했다가 단념하고 대신 카츠라 타로 총리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한편 스가 및 코토쿠와 소원해진 때문에 이후 코토쿠 대역사건에서 검거 및 처형을 면했다. 코토쿠와 스가는 불륜 사건으로 동료들에게 백안시되었기 때문에 아라하타 외에도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연좌를 면했다. 출옥 후 사카이가 설립한 매문사에 참여, 야마카와 히토시, 타카바타케 모토유키 등과 함께 꾸준히 체제변혁을 도모했다. 1912년에는 오스기 사카에와 『근대사상』을 창간했다. 하지만 생디칼리슴을 주장한 오스기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아라하타의 대립이 가시화된 끝에 둘은 결별했다. 아라하타는 관서 지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0년 일본사회주의동맹, 1922년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에 각각 참여했다. 그러나 1923년 제1차 일본공산당 사건으로 사카이 토시히코와 함께 검거되었고, 제1차 일공당은 아라하타의 유일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아라하타는 잔무 처리를 위한 뷰로에 참여하여 당재건을 목표로 했지만 뷰로 내에서 후쿠모토 카즈오의 이론이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당재건 활동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후쿠모토이즘에 의문을 제기한 아라하타는 후쿠모토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있던 젊은 활동가들에게 격렬하게 비방을 받았다. 이후 일공당은 후쿠모토이즘에 따라 제2차 일본공산당으로 재건되지만, 아라하타는 제1차 일공당 해산에 찬성했던 사노 마나부, 토쿠다 큐이치가 재건 중심세력이 된 것에 분노하여 애제자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일공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27년 야마카와 히토시, 이노마타 츠나오 등과 함께 『노농』을 창간, 노농파의 중심 멤버로서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향도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반파시스트 운동을 주도한 일본무산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1937년 인민전선 사건으로 야마카와, 카토 칸쥬 등 400여명과 함께 투옥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살이를 한다. 전후 전금동맹 위원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중의원 의원을 2기(중선거구 도쿄 제4구) 맡지만, 1948년 일사당을 탈당했다. 1949년 1월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주의정당결성추진협의회(소위 간손 신당)을 모체로 무소속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관동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뒤로는 정치에서 물러나 평론활동에 전념했다. 1950년 12월 소련에 대한 평가를 놓고 코보리 진지와 야마카와 히토시·사키사카 이츠로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아라하타는 코보리의 주장에 찬동하지는 않았지만 코보리가 간손 신당의 실무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코보리의 편을 들어 1951년 결성된 사회주의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소련파 경향을 선명하게 한 사키사카의 사회주의협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신좌파 운동이 흥기할 때 일시적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지만 내부 게발트 등 막장짓에 실망하여 다시 문필활동에만 전념했다.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의 토무라 잇사쿠가 출마했을 때 오다 마코토 등이 ‘산리즈카 투쟁과 토무라 잇사쿠씨에 연대하는 회’를 만들자 거기 참가했다. 1981년 3월 6일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타마가와 병원에서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본명 한자: 趙鏞殷, 1887년 5월 2일~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본명 한자: 趙鏞殷, 1887년 5월 2일~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의 정치인 겸 교육인이다.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필명으로 사용하던 조소앙(趙素昻)이 훗날을 기하여, 1918년 4월 30일 이후부터 개명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 귀국하여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48년 사회당을 만들어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시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의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를 창시한 바있다. 정치, 교육, 경제 평등을 말하는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중국 기독교 정치가 쑨원의 삼민주의와 일본 유학시절에 번역한 "천부인권론"의 기독교적 '만민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1918년부터 정립한 정치노선이다. 조소앙은 1911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지만 여섯개의 종교를 두루 아울러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5년 육성교를 창시하였다. 하지만 1918년 삼균주의를 정립한 이후에는 기독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종교통합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오카와 슈메이(일본어: 大川 周明, 1886년 12월 6일 - 1957년 12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국가주의자이다.…오카와 슈메이(일본어: 大川 周明, 1886년 12월 6일 - 1957년 12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국가주의자이다. 1918년 동아경제조사국·만철조사부에 들어갔으며 이태 후 1920년 다쿠쇼쿠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1926년 〈특허식민회사제도연구〉로써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8년 호세이대학 대륙부(전문부) 부장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서양화에 대립하여 정신 면에서는 일본주의, 내정 면에서는 사회주의 혹은 통제경제, 외교 면에서는 아시아주의를 창도했다. 도쿄재판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으로서 A급전범 용의로 기소되었으나 매독에 따른 정신장애를 진단받아 소추면제되었다. 말년 쿠란 전문(全文)을 번역하는 등 이슬람 연구에 우수한 실적을 남겼다.
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平塚 らいてう, 1886년 2월 10일 ~ 1971년 5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平塚 らいてう, 1886년 2월 10일 ~ 1971년 5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 작가, 여성주의자이며 쇼와 시대의 여성 운동 지도자이다. 본명은 히라쓰카 하루(平塚明).
기타 레이키치(일본어: 北 (きた) 昤 (れい)吉 (きち): 1885년 7월 21일-1961년 8월 5일)는 일본의 평론가…기타 레이키치(일본어: 北 (きた) 昤 (れい)吉 (きち): 1885년 7월 21일-1961년 8월 5일)는 일본의 평론가, 교육자, 정치가다. 중의원의원, 일본자유당 정조회장을 역임했으며 다마 미술대학의 설립자다. 기타 잇키의 남동생이다.
기타 잇키(일본어: 北 (きた) 一輝 (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는 일본의 사상가…기타 잇키(일본어: 北 (きた) 一輝 (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 정치철학자다.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일본어: 北 (きた) 輝次郎 (てるじろう))이다. 천황제와 메이지 헌법, 천황주권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기타는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국가주의, 우파사회주의적 접근법으로 일본을 개조하려 했다. 기타에게는 천황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천황이 현인신이라는 사고가 팽배했던 일본 제국에서 그런 기타는 매우 특이한 사상가였다.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야마카와 히토시(일본어: 山川 均 (やまかわ ひとし): 1880년 12월 20일 - 1958년 3월 23일)는 일본의…야마카와 히토시(일본어: 山川 均 (やまかわ ひとし): 1880년 12월 20일 - 1958년 3월 23일)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 재야 경제학자다.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의 지도적 이데올로그였다.
윌리엄 메렐 보리스(영어: William Merrell Vories, 1880년 10월 28일 ~ 1964년 5월 7일)는…윌리엄 메렐 보리스(영어: William Merrell Vories, 1880년 10월 28일 ~ 1964년 5월 7일)는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 출신의 개신교 평신도 선교사·건축가·기업가이다. 캔자스주 레번워스에서 태어났다. 건축가를 지망하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입학이 결정되었으나, 가정의 경제상황으로 1900년 콜로라도 칼리지 이공계 과정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YMCA 활동을 시작하여,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 현립 상업학교(지금의 사가 현립 하치만 상업학교)의 영어교사로 2년간 일했으나, 영어 성경 공부를 통해 개종자가 늘어나자 승려들의 집단적인 방해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후 1908년 교토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 많은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시공하고, 이후 시가현 하치만(지금의 오미하치만시)을 근거지로 '오미 형제단'을 설립해 활동했다. 1919년 일본의 귀족 히토쓰야나기 스에노리 자작의 딸 히토쓰야나기 마키코와 결혼하였고, 1941년 일본 국적을 얻었다. 일본명은 히토쓰야나기 메레루(일본어: 一柳米来留)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더글라스 맥아더와 고노에 후미마로 사이를 중재하기도 하여, 논픽션 작가 가미사카 후유코는 그를 “천황을 지킨 아메리카인”이라 평했다. 그는 한반도의 근대 건축물의 설계 등에도 관여해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김정동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 영토에서 그가 설계한 건물은 1910~20년대 35건, 1930년대 54건, 1940년대 19건으로 총 108건이고, 그외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에는 38건의 건물을 설계하였고, 그 수는 전체 설계된 건물 중 약 10%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그에 의해 건축된 건물 중 주요 건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의 파이퍼홀 이나 대천 선교사 수양관 등이 있다.
요시노 사쿠조(일본어: 吉野 作造, 1878년 1월 29일 ~ 1933년 3월 18일)은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인이다.…요시노 사쿠조(일본어: 吉野 作造, 1878년 1월 29일 ~ 1933년 3월 18일)은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인이다. 중학교 시절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유학 후 귀국하여 도쿄 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의회 정치 주창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바가 곧 정부의 기본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민본주의를 요구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보통선거권, 민간에 의한 군대의 통솔, 귀족원의 민선기구로의 전환, 사회주의 국가의 점진적 설립 등을 주창하였다. 그밖에 요시노는 '반 제국주의자'로 일본의 제국주의 체제에 강한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가 평등한 국제적 민주주의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망했고 일본이 군비통제에 적극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한반도 식민지를 비롯해 제아시아 국가의 독립운동과 중국의 혁명운동에 적극지지를 표하기도 하였으며, 일본 제국으로 하여금 식민지에 보다 광범위한 자치를 적용할 것을 주문했다.
고토쿠 슈스이(일본어: 幸徳 (こうとく) 秋水 (しゅうすい): 1871년 11월 5일(메이지 4년 음력 9월…고토쿠 슈스이(일본어: 幸徳 (こうとく) 秋水 (しゅうすい): 1871년 11월 5일(메이지 4년 음력 9월 23일)~1911년(메이지 44년) 1월 24일)는 메이지 시대의 언론인, 사상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다. 본명은 고토쿠 덴지로(일본어: 幸徳 (こうとく) 傳次郎 (でんじろう)). "슈스이"라는 이름은 스승 나카에 조민에게서 받은 것이다. 고토쿠 대역사건으로 처형된 12인 중 한 명이다.
이오키 료조(일본어: 五百木 (いおき) 良三 (りょうぞう), 메이지 3년 음력 12월 14일(1871년 2월 3일) ~…이오키 료조(일본어: 五百木 (いおき) 良三 (りょうぞう), 메이지 3년 음력 12월 14일(1871년 2월 3일) ~ 1937년 6월 14일)는 일본의 국수주의자다. 호(号)는 표정(飄亭). 이요국 온센군 오사카(小坂)촌 신바쇼(지금의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히노데정) 출신. 메이지 18년(1885년) 마쓰야마현립 의학교에 입학. 메이지 20년(1887년) 오사카로 올라와 이마바시의 정(町)의의 도제가 되어 허드렛일을 하면서 면학하여 19세에 의술개업 면허를 받았다. 메이지 22년(1889년) 도쿄로 상경, 이요 마쓰야마번 번주 가문이었던 히사마쓰가에서 설립한 동경학생료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마사오카 시키와 문학을 논하며 그에게 하이쿠를 지도받았다. 메이지 23년(1890년) 징병에 합격하여 육군 간호장으로 채용되어 아오야마 근위연대에 입영, 메이지 25년(1892년)까지 군대에서 생활했다. 청일 전쟁이 벌어지자 메이지 27년(1894년) 6월 제5사단을 따라 출정, 대골방(大骨坊)이라는 필명으로 종군일기를 『일본』지에 1년간 연재했다. 귀국한 후 메이지 28년(1895년) 『일본』에 입사하여 구가 가쓰난과 함께 활약했다. 메이지 29년(1896년) 고노에 아쓰마로를 회장으로 옹립해 국민동맹회를 결성, 중국의 보전(保全)을 주장했다. 아츠마로를 통해 『동양』지를 발행하며 대(對)아시아 대책을 논했다. 메이지 34년(1901년) 『일본』지 편집장이 되어 대외경파론을 전개하다가 메이지 36년(1903년) 퇴사했다. 앵전구락부 동인으로서 대로동지회에 힘을 더하여, 메이지 37년(1904년)의 러일전쟁 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38년(1905년) 9월 5일, 러일강화조약의정서 초안에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뜯어내는 실익이 없자 동경 히비야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강화조건 불복, 조약파기를 주장하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히비야 폭동). 다이쇼 2년(1913년) 우치다 료헤이 등과 대지연합회(対支連合会)를 만들고, 다이쇼 3년(1914년) 국민의회(国民義会)를 결성했다. 다이쇼 4년(1915년)에는 오쿠마 내각의 밀명을 받고 만주에 잠입했다. 쇼와 4년(1929년) 정교사에 들어가 『일본급일본인』 발행을 주재했다.
사카이 토시히코(일본어: 堺 利彦 (さかい としひこ): 1871년 1월 15일[명치 3년 11월 25일] - 1933년 1월…사카이 토시히코(일본어: 堺 利彦 (さかい としひこ): 1871년 1월 15일[명치 3년 11월 25일] - 1933년 1월 23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 사상가, 공산주의자, 저술가다. 호는 고천(枯川). 별명은 카이즈카 시부로쿠(貝塚 渋六).
아베 이소오(일본어: 安部 (あべ) 磯雄 (いそお), 겐지 2년 음력 2월 4일(1865년 3월 1일) ~ 1949년(쇼와…아베 이소오(일본어: 安部 (あべ) 磯雄 (いそお), 겐지 2년 음력 2월 4일(1865년 3월 1일) ~ 1949년(쇼와 24년) 2월 10일)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정치가다. 기독교적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활발히 선전했으며,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다. 실제 인권변호사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아베 이소오 등의 기독교 사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또한 일본 야구 발전에 공헌해 “일본 야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도쿠토미 소호(일본어: 徳富 蘇峰 (とくとみ そほう), 일본어 발음: [to.kɯ̥.toꜜ.mʲi soꜜ.hoː]…도쿠토미 소호(일본어: 徳富 蘇峰 (とくとみ そほう), 일본어 발음: [to.kɯ̥.toꜜ.mʲi soꜜ.hoː], 1863년 3월 14일~1957년 11월 2일)는 일본의 사상가, 수필가, 평론가이며 평민적 구화주의를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판사 민유사를 설립했으며, 잡지 국민의 벗과 신문 국민신문을 창간했다. 그는 소설가인 도쿠토미 겐지로의 형으로도 알려졌다.
오카쿠라 덴신(일본어: 岡倉 天心 오카쿠라 텐신[*], 1863년 2월 14일 ~ 1913년 9월 2일)은 일본 메이지…오카쿠라 덴신(일본어: 岡倉 天心 오카쿠라 텐신[*], 1863년 2월 14일 ~ 1913년 9월 2일)은 일본 메이지 시대에 활약한 우익 사상가, 문인, 철학자이다. 미학과 관련된 글을 여러개 썼으며, 미술사, 미술 평론, 미술가 양성 활동도 했다. 본명은 가쿠조 (覚三 (かくぞう) 카쿠조[*])이다. 한국에서는 '조선은 원래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으로 악명 높은 정한론자들중 한명이기도 하다.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년 8월 5일 ~ 1916년 2월 9일)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학자, 교육자이다. 구…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년 8월 5일 ~ 1916년 2월 9일)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학자, 교육자이다. 구 막신이고 이즈번사로 위계 (일본) 훈등은 정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작위는 남작이었다. 도자마 다이묘인 이즈번사의 아들로 태어나 이즈번의 학교인 홍도관(弘道館)에서 공부한 뒤 제미관(済美館)이나 치원관(致遠館) 등을 거치 귀도 페르베크(Verbeck)에게 배웠다. 열심히 공부하여 막부의 관료가 되었고 유신 이후에는 신정부에서 일했다. 메이로쿠샤 회원이었고 외무대신, 원로원의원, 칙선귀족원 (일본)의원 등을 맡았다. 독일학협회학교 교장, 구 도쿄 제국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초대 제국 학사원원장, 추밀원 (일본) 문관이었다.
니시 아마네(일본어: 西 (にし) 周 (あまね), 분세이 12년 2월 3일(1829년 3월 7일) ~ 1897년 1월…니시 아마네(일본어: 西 (にし) 周 (あまね), 분세이 12년 2월 3일(1829년 3월 7일) ~ 1897년 1월 31일)는 일본의 계몽주의자, 서양철학자이다.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 고문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귀족원의 위원이었다.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1897년 훈1등서보장을 받았다. 독일학협회학교(일본어: 獨 (どい)逸 (つ)学 (がく)協 (きょう)会 (かい)学校 (がっこう) 도이쓰가쿠갓코[*], 현재의 독협중학교, 고등학교)의 초대교장을 역임하였다. 니시 슈스케(일본어: 西 (にし)周 (しゅう)助 (すけ))라고도 불린다. 호(號)는 천근(天根), 녹성(鹿城).
니시무라 시게키(일본어: 西村茂樹)는 메이지 시대의 계몽사상가, 교육자이다. 일본홍도회(日本弘道会)를 창설했다. 자는 重器…니시무라 시게키(일본어: 西村茂樹)는 메이지 시대의 계몽사상가, 교육자이다. 일본홍도회(日本弘道会)를 창설했다. 자는 重器, 호는 하쿠오(泊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