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1899년: 26명
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이다. 이케다는 자신의 "소득 배증 계획"으로 유명하다. 이 계획은 겨우 겨우 10년의 세월에 국내총생산으로 불린 일본의 경제 총생산을 두배로 늘이는 데 목표로 삼았다. 그는 또한 일본과 미국 사이에 관계를 향상시키는 도움을 주었다. 추가로 그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책임을 맡았다.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1931년 7월 23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 문화 운동가, 아동 교육인…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1931년 7월 23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 문화 운동가, 아동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다. 『어린이날』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한성부 서부구역 적선방 아주현계 출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이다. 일본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나, 수운 최제우의 저서인 《동경대전》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라는 절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이 땅 위에 지상천국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천도교 사상을 담은 것으로 천도교 신자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목요일), 오랜 질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난바 다이스케(일본어: 難 (なん)波 (ば) 大 (だい)助 (すけ): 1899년 11월 7일-1924년 11월 15일)는…
난바 다이스케(일본어: 難 (なん)波 (ば) 大 (だい)助 (すけ): 1899년 11월 7일-1924년 11월 15일)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다. 1923년(다이쇼 12년) 12월 당시 섭정궁 히로히토 황태자를 엽총으로 암살 기도했다(토라노몬 사건). 대심원에서의 심리에서도 천황제 부정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대역죄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반역적 사회운동가다.
구용서(具鎔書, 일본식 이름:具原一郎 1899년 10월 21일 ~ 1984년 4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초대 한국은행…
구용서(具鎔書, 일본식 이름:具原一郎 1899년 10월 21일 ~ 1984년 4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초대 한국은행 총재이며, 제10대 상공부 장관이다. 본관은 창원.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온건주의로 사상전향하였다.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로 절반만 성사시키고 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시도는 결국 이승만 정권 말 사법 살인 희생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날조된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사카모토 타케시(Takeshi Sakamoto, 1899년 9월 21일 ~ 1974년 5월 10일)는 일본의 배우이다.…
사카모토 타케시(Takeshi Sakamoto, 1899년 9월 21일 ~ 1974년 5월 10일)는 일본의 배우이다. 아코시에서 태어났으며 효고현에서 사망하였다.
김성호(1899년 9월 5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강세형(姜世馨, 1899년 6월 21일 ~ 1960년 8월 5일)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전라북도 익산 출생이며…
강세형(姜世馨, 1899년 6월 21일 ~ 1960년 8월 5일)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전라북도 익산 출생이며, 원적지는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이다. 균학자 김삼순 박사의 부군이며,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의 이모부이다. 3.1 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일본을 거쳐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히틀러 유겐트의 찬미자로 발두어 폰 시라흐와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이범석에게 나의 투쟁을 전달하였다. 해방후에는 조선민족청년단에서 지정학, 국제유대인 문제에 대해 강의했다.
김장열(金長烈, 1897년 또는 1899년 5월 24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이영섭(1899년 5월 22일~1982년 8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천해(金天海, 1898년 5월 10일 ~ ?)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김천해(金天海, 1898년 5월 10일 ~ ?)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본명은 김학의(金鶴儀)이다.
이정래(李晶來, 1899년 종로 - 1989년 7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 제5대, 제6대 국회의원을…
이정래(李晶來, 1899년 종로 - 1989년 7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 제5대,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타카미네 타에코(일본어: 高峰 妙子 たかみね たえこ[*], 1899년 5월 6일 - 1980년 11월 15일)는 전…
타카미네 타에코(일본어: 高峰 妙子 たかみね たえこ[*], 1899년 5월 6일 - 1980년 11월 15일)는 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 남역 주연 스타 (첫 공연 주연. 남역 스타 제 1호. 하나구미ㆍ유키구미 주연 념역이었다)이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1기생, 애칭은 "앗상"이다. 동기생으로는 오오에 후미코, 쿠모이 나미코, 오구라 미유키, 유라 미치코 등이 있다. 후쿠이현 사카이군 혼죠무라 (현 아와라시) 출신이다. 전 다카라즈카 가극단ㆍ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성악 강사였다. 예명의 유래는 오구라 백인일수의 제 4번 : 야마베노 아카히토의田子之浦に 打出て見れば 白妙の 富士の高嶺に 雪は降りつつ타고노우라에 나가 보면 백묘한 후지의 고령에 눈은 내리면서에서 명명되었다.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년 5월 4일 ~ 1995년 7월 18일)는 일본의 정치인, 사회활동가이다.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년 5월 4일 ~ 1995년 7월 18일)는 일본의 정치인, 사회활동가이다.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지만 불기소 처분됐다.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 총재, 중의원 의원, 일본재단 회장, 후쿠오카공업대학 이사장을 역임했다. 자식은 2남 다카시(尭), 3남 요헤이 등이 있으며 손자는 다카시의 아들 히로요시(博義) 등이 있다.
후지시마 가이지로(일본어: 藤島 亥治郎, 1899년 5월 1일 ~ 2002년 7월 15일)는 일본의 건축사가다.…
후지시마 가이지로(일본어: 藤島 亥治郎, 1899년 5월 1일 ~ 2002년 7월 15일)는 일본의 건축사가다. 1933년부터 종전 때까지 조선의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 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한국의 건축에 관한 조사, 보존 활동을 계속했다. 전후에는 히라이즈미 유적 조사회를 만들어 모쓰지, 쥬손지를 정비하고, 나카센도 여인숙의 연구등을 실시했다. 또, 오사카 시텐노지 가람의 재건 계획을 수립했다.
미즈시마 산이치로(일본어: 水 (みず)島 (しま) 三 (さん)一 (いち)郎 (ろう), 1899년 3월 21일 ~ 1983년…
미즈시마 산이치로(일본어: 水 (みず)島 (しま) 三 (さん)一 (いち)郎 (ろう), 1899년 3월 21일 ~ 1983년 8월 3일)는 일본의 화학자로, 구조화학 분야를 연구하였다.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 1899년 3월 6일~1976년 9월 4일)는 나가노현 나가노시 출신의 헌법학자이다. 도쿄 대학…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 1899년 3월 6일~1976년 9월 4일)는 나가노현 나가노시 출신의 헌법학자이다. 도쿄 대학 명예교수였다. 미노베 다쓰키치의 제자로, 그 후계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퇴직 후에 스예노부 산지(末延三次)와 함께 릿쿄 대학 법학부 창설에 공헌했다. 1923년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에 동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34년에 동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에는 칙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59년에 도쿄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이후 동 대학 명예교수, 릿쿄 대학 헌법 및 프랑스 공법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릿쿄 대학 초대 법학부장을 지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일본국 헌법으로의 이행을 법적으로 해석하면서 제창한 8월 혁명설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와의 오다카·미야자와 논쟁(이른바 국체논쟁)도 유명하며, 공공의 복지의 해석에서 일원적 내재설을 주장하는 등 이후의 헌법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법시험 등의 수험계에서는 미야자와설은 통설로 알려져 있으며, 제자 아시베 노부요시가 그 지위를 이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일본야구기구의 제4대 커미셔너(커미셔너 위원회의 위원장)를 지냈다.
미야모토 유리코(일본어: 宮本 百合子, 1899년 2월 13일 ~ 1951년 1월 21일)는 일본의 소설가, 사회 활동가이자…
미야모토 유리코(일본어: 宮本 百合子, 1899년 2월 13일 ~ 1951년 1월 21일)는 일본의 소설가, 사회 활동가이자 문학평론가로 다이쇼 시대와 초기 쇼와 시대에 활동하였다.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여성 해방 운동에 참여한 것과 그의 자서전으로 알려져 있다. 미야모토는 미국과 소련을 다녀와 귀국하였으나 여러 저술들이 검열되었고 정치적 관점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구속되었다. 주요한 저술로 《반슈 평야》(播州平野), 《풍지초》(風知草) 등이 있다. 그와 남편인 미야모토 겐지는 일본의 여성과 노동계급 해방운동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혼전 성은 주조(中條)이다.
오다카 도모오(일본어: 尾高 朝雄 (おだかともお)、1899년 1월 28일~1956년 5월 15일)는 일본의 법철학자이다.…
오다카 도모오(일본어: 尾高 朝雄 (おだかともお)、1899년 1월 28일~1956년 5월 15일)는 일본의 법철학자이다. 일본학사원 회원이자, 제3기 일본학술회의 부회장이었다.
다카야나기 겐지로(高柳健次郎, 1899년 1월 20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 1990년 7월 23일 요코스카시)는 일본의…
다카야나기 겐지로(高柳健次郎, 1899년 1월 20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 1990년 7월 23일 요코스카시)는 일본의 공학자이자 텔레비전 발전의 선구자였다. 서방 세계에서 큰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세계 최초의 전자식 텔레비전 수신기를 만들었고, '일본 텔레비전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
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공동농장의 운영을 맡고 좌익 농민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 우익으로 전향하고 1926년 메이데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국제"(建国祭)를 기획하며 이름을 알렸다. 1942년 익찬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패전 이후 GHQ에 의해 공직추방당했다. 조치가 해제된 뒤 1951년 우익 정당인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国党)을 조직하여 매번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에 성공한 적은 없다. 1960년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한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과 고모리 가즈타카의 시마나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재판을 받기도 했다. 선거운동 중에는 차에 깃발을 내걸고 길거리 연설을 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군소 우익단체들 특유의 "가선차"(街宣車) 문화의 시초라고 여겨진다. 1990년 91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요코타 마사토시(일본어: 横田 正俊, 1899년 1월 11일~1984년 7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강기문(姜己文, 1908년~?)은 한국의 정치인이다.
최윤식(崔允植, 1899년 ~ 1960년 8월 3일)은 대한민국의 수학자이다.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최윤식(崔允植, 1899년 ~ 1960년 8월 3일)은 대한민국의 수학자이다.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제1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도쿄 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해 귀국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경성공업학교 등의 교사로 있었다. 194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에 이어 대한 수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대한수학회가 창립되자 초대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해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1954년 4월 6일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할 때 '재적의원 203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것을, 최윤식 교수가 203명의 2/3이 135.33…명이므로, 반올림해서 135명만 찬성하면 된다고 이승만 측에 말해주었다. 당시 개헌에 필요한 한표가 모자랐던 상황에 '사사오입'(四捨五入, 4는 버리고 5는 올린다)이라는 아이디어는 궤변이라고 알려져 있다. 1955년 그후, 55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귀국, 56년 서울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문교부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교부로부터 교육자 근속상을 수여받았다. 사사오입 개헌에 기여하였다.
박정근(朴定根, 1899년 ~ 1980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박정근(朴定根, 1899년 ~ 1980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 중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에 출마했으며 15.8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자유당에 입당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소속으로 전주시에 공인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완주군 갑에 출마하게 됨에 따라 당에서 제명처분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같은 해 치러진 진안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