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네 기미히로(일본어: 石兼 公博, 1958년 1월 4일 ~ )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 외무성…이시카네 기미히로(일본어: 石兼 公博, 1958년 1월 4일 ~ )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 주캐나다 특명전권대사 겸 국제 민간 항공 기구 대표부 대사를 거쳐 2019년부터 주유엔 일본대표부 대사를 맡고 있다.
오가와 도시오(일본어: 小川敏夫, 1948년 3월 18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전직 변호사, 판사, 검사이다.…오가와 도시오(일본어: 小川敏夫, 1948년 3월 18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전직 변호사, 판사, 검사이다. 입헌민주당 소속 참의원 의원이자 입헌민주당 상임고문이며, 제32대 참의원 부의장이다. 간 제1차 개조 내각 및 간 제2차 개조 내각, 노다 내각에서 법무 부(副)대신을 지냈으며, 노다 제1차 개조 내각에서 법무대신(제89대)을 지냈다. 과거 재판관 탄핵재판소의 재판장을 맡았으며, 민진당 시기에 참의원 간사장, 참의원 의원회장을 지냈다. 민주당 시절에는 민주당 참의원 간사장 및 참의원 정책심의회장,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 위원장, 농림수산위원회 위원장, 내각위원회 위원장, 결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에다 사쓰키(일본어: 江田 五月 (えだ さつき), 1941년 5월 22일~2021년 7월 28일)는 4선 중의원 의원과 4선…에다 사쓰키(일본어: 江田 五月 (えだ さつき), 1941년 5월 22일~2021년 7월 28일)는 4선 중의원 의원과 4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아버지는 일본사회당 부위원장을 지낸 전 중의원 의원 에다 사부로다.
야스오카 오키하루(일본어: 保岡興治, 1939년 5월 11일 ~ 2019년 4월 19일)는 일본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야스오카 오키하루(일본어: 保岡興治, 1939년 5월 11일 ~ 2019년 4월 19일)는 일본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 제2차 모리 요시로 내각·후쿠다 야스오 내각 개조 내각의 법무대신을 지냈다. 아버지 야스오카 다케히사 (保岡武久, 1902년 ~ 1983년)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도쿄도 출신으로, 중학교 재학 도중까지 가고시마현에서 생활하였다. 도쿄 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64년 주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72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아마미 군도 선거구 (奄美群島選挙区) 에 무소속으로 입후보 해 첫 당선되었고, 당선 후 자민당에 들어갔다.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의 국토 정무 차관, 스즈키 젠코 내각의 대장 정무 차관, 중의원 건설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90년 제39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하였다. 1993년에 행해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아마미 군도구와 통합된 구 가고시마 1구에서 입후보 해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하였다. 1994년, 총리를 지냈던 가이후 도시키를 따라 자유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가이후를 대표로 하는 원내회파 (院内会派), 자유개혁연합 (自由改革連合) 을 거쳐, 1994년 신진당 (新進党) 에 참여했으나, 1995년 신진당을 탈퇴하고 자유민주당에 복귀하였다. 2000년, 제2차 모리 내각에 법무대신으로 첫 입각했으며, 법무대신 재임 중에 세 명의 사형수에 사형 집행을 명령하였다. 2005년 우정 국회에서 우정국 법안에 찬성표를 던져, 그 해 9월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에 성공했으나, 우정 민영화 법안 찬반을 둘러싼 당 조직 혼란의 책임을 지고 그 해 12월 자유민주당 가고시마 현 지부 연합회 회장 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후쿠다 내각 개조 내각에서 다시 법무대신이 되었으며, 재임 중 세 명의 사형수에 사형 집행 명령을 내려, 제2차 모리 내각 때와 합쳐 총 여섯 명의 사형 집행을 명령하였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는 공명당의 추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이토 마사미(일본어: 伊藤正己, 1919년 9월 21일 ~ 2010년 12월 27일)는 효고현 출신의 법학자다. 전문은…이토 마사미(일본어: 伊藤正己, 1919년 9월 21일 ~ 2010년 12월 27일)는 효고현 출신의 법학자다. 전문은 영미법 및 헌법으로 특히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의 관계성에 대해 연구했다. 최고재판소 재판관, 도쿄 대학 명예교수, 일본 학사원 회원(제2분과 법률학·정치학)을 역임했다. 동생인 이토 다다시는 전 스이토모 상사 사장이다. 다른 사람의 저서에서 이름의 ‘己’가 종종 ‘已’나 ‘巳’로 적히는 경우가 있다.
이병하(李炳夏, 1913년 11월 18일 ~ 2000년 11월 2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이병하(李炳夏, 1913년 11월 18일 ~ 2000년 11월 2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진보이며, 경상북도 문경군(진보 이씨 집성촌) 출신. 제4·5대 민의원을 지냈고, 제12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아호는 효정(曉汀)이다.
야마구치 요시타다(일본어: 山口 良忠, 1913년 11월 16일 ~ 1947년 10월 11일)는 일본의 법률가이다. 사가현…야마구치 요시타다(일본어: 山口 良忠, 1913년 11월 16일 ~ 1947년 10월 11일)는 일본의 법률가이다. 사가현 기시마군 후쿠지촌 (현재의 시로이시정) 출신으로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 대학원 재학 중에 고등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41년 판사로 임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도쿄구재판소에서 경제사범을 담당하는 판사로 일하면서 식량관리법에 따라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음식을 거부하다가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조재천(曺在千, 1912년 11월 19일 ~ 1970년 7월 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법시험에…조재천(曺在千, 1912년 11월 19일 ~ 1970년 7월 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로 근무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 해방 뒤 경북도경찰국장 등을 지내고 1954년 총선거 때 경북 달성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6년의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를 내걸고 민주당 선전부장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던 반공보수주의자였다. 1958년 대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0년 제2공화국에서는 제5대 민의원의원으로 당선, 법무장관에 이어 1961년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정당활동이 금지되어 잠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63년 정치규제가 풀리고, 그해 전국구로 제6대 국회의원(민주당)으로 당선되어 야당통합에 앞장섰으며, 1965년 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반대해 '황태성 생존설’을 계속 주장했다.
김달호(金達鎬, 일본식 이름: 金橋 健, 1912년 3월 26일 ~ 1979년 3월 4일)는 해방 이후 사회대중당…김달호(金達鎬, 일본식 이름: 金橋 健, 1912년 3월 26일 ~ 1979년 3월 4일)는 해방 이후 사회대중당 앙집행위원장, 제3대민의원 등을 역임한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본관 울산(蔚山)이다.
장경근(張暻根, 일본식 이름: 長山暻根 나가야마 게이콘, 1911년 5월 18일~ 1978년 7월 25일)은 대한민국의…장경근(張暻根, 일본식 이름: 長山暻根 나가야마 게이콘, 1911년 5월 18일~ 1978년 7월 25일)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제14대 내무부장관과 제3,4대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김의준(金意俊, 1909년 4월 28일 ~ 1985년 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었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김의준(金意俊, 1909년 4월 28일 ~ 1985년 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었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판사, 검사, 변호사를 지냈다. 법사위원장, 고등고시위원, UN총회한국대표, 자유당 중앙당 선전부장과 제2대, 제3대, 제4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1985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별세하였다.
김종열(金鍾烈, 1900년 - 198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김종열(金鍾烈, 1900년 - 198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다나카 고타로(田中 耕太郎, たなか こうたろう, 1890년 10월 25일 ~ 1974년 3월 1일)는 일본의 법학자이자…다나카 고타로(田中 耕太郎, たなか こうたろう, 1890년 10월 25일 ~ 1974년 3월 1일)는 일본의 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대학 법학부장, 제1차 요시다 내각 문부대신,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 국제사법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 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출신.
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 도야마현립도야마고등학교)와 제6고등학교를 나온 뒤 1908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8년 도쿄공소원 판사가 되었다. 히로시마공소원장으로 재직중이던 1944년 2월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법조 관계자들이 전시 체제에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헌법을 위반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2월 이와타 주조 사법대신의 천거로 제23대 대심원장에 취임했다. 두 사람은 사법권 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했으며 알프레드 C. 오플러 연합군 최고사령부 민정국 사법법제과장과도 사법 개혁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이와타가 공직추방되자 후임에 보수파인 기무라 도쿠타로가 취임했는데 기무라는 호소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도파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다니무라 다다이치로도 사법차관이 된 뒤 호소노에 비협조적으로 나와 사법 개혁은 난관에 봉착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심원을 대신해 최고재판소가 신설되었다. 곧이어 재판관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전전부터 사법권 독립을 주장한 호소노파와 이에 반발하는 반호소노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설치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의 위원이었던 호소노는 자신이 도조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던 것처럼 중책을 담당하는 감독직에 있으면서 한 마디 항의도 못하는 사람은 최고재판소재판관의 자격이 없다고 연셜하며 재판관 선출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바라 시게루 외의 동조자가 없어 호소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재판관 후보자를 30명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호소노는 낙선했다. 그런데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최고재판소재판관 선출은 신헌법 이후 출범한 내각이 선임해야 한다고 지명하여 요시다 내각에 의해 구성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는 해산하고 신헌법하에서 최초로 구성된 가타야마 내각에 의해 새롭게 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헌법이 시행될 때 최고재판소가 구성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대심원장이던 호소노가 최고재판소장관 대행직을 수행해야 했다. 새롭게 꾸려지는 위원회에서도 여전히 호소노파와 반호소노파의 대립이 이어졌고 수적 열세로 인해 호소노파는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위원회가 선임한 재판관 후보 30명에 호소노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1947년 8월 4일 호소노는 장관 대행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다음날부터 시행되는 「재판소법」이 8월 4일까지 최고재판소재판관 대행직에서 물러난 사람은 대심원 판사로의 자격을 가지지만 8월 5일부터 물러난 사람은 도쿄고등재판소 판사 자격만 가진다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퇴임 후 호소노는 도쿄도 마루노우치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1일 향년 66세로 서거했다. 같은 날 훈1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오다 미키지로(일본어: 小田幹治郎, 1875년 ~ 1929년)는 일본의 법조인,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효고현 출신이다.…오다 미키지로(일본어: 小田幹治郎, 1875년 ~ 1929년)는 일본의 법조인,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효고현 출신이다. 법조인 출신이면서 조선어 사전과 유적 조사, 구관(舊慣) 조사 등에 관여하며 문화적 방면에 조예가 있었다.
고지마 이켄(일본어: 児島 惟謙 코지마 이켄[*], 1837년 3월 7일 ~ 1908년 7월 1일)는 메이지 시대의 사법관…고지마 이켄(일본어: 児島 惟謙 코지마 이켄[*], 1837년 3월 7일 ~ 1908년 7월 1일)는 메이지 시대의 사법관, 정치인이다. 오쓰 사건에서 대심원장으로서 "사법권의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여 "법 수호의 신" (일본어: 護法の神様 고호노 가미사마[*])으로 칭송받았다. 귀족원 의원, 중의원 의원도 지냈다. 호는 덴샤엔(일본어: 天赦園), 자는 유슈(일본어: 有終)이다. 이켄이라는 이름 외에도 고레카타, 고레카네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