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요시타다(일본어: 山口 良忠, 1913년 11월 16일 ~ 1947년 10월 11일)는 일본의 법률가이다. 사가현…야마구치 요시타다(일본어: 山口 良忠, 1913년 11월 16일 ~ 1947년 10월 11일)는 일본의 법률가이다. 사가현 기시마군 후쿠지촌 (현재의 시로이시정) 출신으로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 대학원 재학 중에 고등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41년 판사로 임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도쿄구재판소에서 경제사범을 담당하는 판사로 일하면서 식량관리법에 따라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음식을 거부하다가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야부우치 기요시(일본어: 薮内 (やぶうち) 清 (きよし):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2일-2000년(헤이세이…야부우치 기요시(일본어: 薮内 (やぶうち) 清 (きよし):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2일-2000년(헤이세이 12년) 6월 2일)는 일본의 천문학자・과학사학자다. 경도대학 명예교수. 처음에는 순수 천문학자였으나 신죠 신조의 영향을 받아 중국 역법사 연구로 전향했다. 효고현 고베시 출신. 코요중학교, 구제오사카고등학교(현 오사카대학) 이과병류를 거려 쇼와 4년(1929년) 경도제국대학 이학부 우주물리학과 졸업. 1929년 경도제국대학 부수(副手), 1935년(쇼와 10년) 동방문화학원 경도연구소(현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촉탁, 후에 동 기관 연구원을 역임했다. 1948년(쇼와 23년) 경도대학 연구원, 1949년(쇼와 24년) 동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로 임용되어 중국과학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진행시켰다. 1967년(쇼와 42년) 동 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그 사이 1955년(쇼와 30년)부터 일본천문학회 부이사장을 맡았다. 1969년(쇼와 44년) 경도대를 정년퇴직하고 동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쇼와 54년)까지 류코쿠대학 교수를 지냈다. 1970년(쇼와 45년) 자수포장 및 아사히상, 1972년(쇼와 47년) 미국과학사학회 조지 서튼 메달을 수상했다. 1976년(쇼와 51년)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83년 1월 일본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1959년 8월 10일)은 일본 도쿄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농생물과학자, 식물학자…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1959년 8월 10일)은 일본 도쿄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농생물과학자, 식물학자, 원예육종학자이며 농학박사이다.
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 사다노스케(定之助)이다. 도쿄부 출신으로 백작 아리마 요리쓰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정치인 마쓰다 마사히사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마사히사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마사유키는 후작 하치스카 마사하키(후작 하치스카 모치아키의 장남)의 사위이며 외교관 가야 하루노리(가야 쓰네노리의 차남)의 장인이다.
이시이 시로(일본어: 石井 四郎,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는 일본의 군인 및 정수기 개발자로…이시이 시로(일본어: 石井 四郎,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는 일본의 군인 및 정수기 개발자로, 731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일전쟁 중 일본 제국 군대의 생물학전을 담당했다.
마쓰야마 모토노리(일본어: 松 (まつ)山 (やま) 基 (もと)範 (のり), 1884년 10월 25일 ~ 1958년 1월…마쓰야마 모토노리(일본어: 松 (まつ)山 (やま) 基 (もと)範 (のり), 1884년 10월 25일 ~ 1958년 1월 27일)은 일본의 지구물리학자이자 고지자기학자이다.
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 도야마현립도야마고등학교)와 제6고등학교를 나온 뒤 1908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8년 도쿄공소원 판사가 되었다. 히로시마공소원장으로 재직중이던 1944년 2월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법조 관계자들이 전시 체제에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헌법을 위반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2월 이와타 주조 사법대신의 천거로 제23대 대심원장에 취임했다. 두 사람은 사법권 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했으며 알프레드 C. 오플러 연합군 최고사령부 민정국 사법법제과장과도 사법 개혁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이와타가 공직추방되자 후임에 보수파인 기무라 도쿠타로가 취임했는데 기무라는 호소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도파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다니무라 다다이치로도 사법차관이 된 뒤 호소노에 비협조적으로 나와 사법 개혁은 난관에 봉착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심원을 대신해 최고재판소가 신설되었다. 곧이어 재판관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전전부터 사법권 독립을 주장한 호소노파와 이에 반발하는 반호소노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설치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의 위원이었던 호소노는 자신이 도조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던 것처럼 중책을 담당하는 감독직에 있으면서 한 마디 항의도 못하는 사람은 최고재판소재판관의 자격이 없다고 연셜하며 재판관 선출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바라 시게루 외의 동조자가 없어 호소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재판관 후보자를 30명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호소노는 낙선했다. 그런데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최고재판소재판관 선출은 신헌법 이후 출범한 내각이 선임해야 한다고 지명하여 요시다 내각에 의해 구성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는 해산하고 신헌법하에서 최초로 구성된 가타야마 내각에 의해 새롭게 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헌법이 시행될 때 최고재판소가 구성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대심원장이던 호소노가 최고재판소장관 대행직을 수행해야 했다. 새롭게 꾸려지는 위원회에서도 여전히 호소노파와 반호소노파의 대립이 이어졌고 수적 열세로 인해 호소노파는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위원회가 선임한 재판관 후보 30명에 호소노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1947년 8월 4일 호소노는 장관 대행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다음날부터 시행되는 「재판소법」이 8월 4일까지 최고재판소재판관 대행직에서 물러난 사람은 대심원 판사로의 자격을 가지지만 8월 5일부터 물러난 사람은 도쿄고등재판소 판사 자격만 가진다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퇴임 후 호소노는 도쿄도 마루노우치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1일 향년 66세로 서거했다. 같은 날 훈1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가노 나오키(일본어: 狩野 直喜 (かの なおき), 1868년 2월 11일∼1947년 12월 13일)는 일본의 중국학자이다.…가노 나오키(일본어: 狩野 直喜 (かの なおき), 1868년 2월 11일∼1947년 12월 13일)는 일본의 중국학자이다. 자는 자온(子溫)이며 별호(別號)는 군산(君山), 반농인(半農人), 규원(葵園)이다.
아다치 분타로(일본어: 足 (あ)立 (だち) 文 (ぶん)太 (た)郎 (ろう), 게이오 원년 6월 15일(1865년 8월…아다치 분타로(일본어: 足 (あ)立 (だち) 文 (ぶん)太 (た)郎 (ろう), 게이오 원년 6월 15일(1865년 8월 6일) ~ 1945년 4월 1일)는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해부학자로, 일본인과 유럽인 간의 인종적 차이를 의학적으로 연구 및 분석하였다. 오사카 고등의학전문학교(현 오사카 의과약과대학)의 초대 교장으로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