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나카 에이타로(일본어: 竹中 英太郎 (たけなか えいたろう): 1906년 12월 19일 - 1988년 4월 8일)는 일본의…다케나카 에이타로(일본어: 竹中 英太郎 (たけなか えいたろう): 1906년 12월 19일 - 1988년 4월 8일)는 일본의 삽화가, 노동운동가, 실업가다. 신좌파 활동가이자 문예평론가인 다케나카 로가 그의 장남이다. 차녀 카네코 무라사키(金子紫)는 “다케나카 에이타로 기념관” 관장이다. 후쿠오카시 우에나지마(현재의 후쿠오카시 중앙구 다이묘)의 몰락 사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 로에 따르면 심장역위증으로 심장이 오른쪽, 십이지장이 왼쪽에 있는 희귀신체의 소유자였다고 하는데, 차녀 무라사키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1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극빈 속에서 자랐다. 11세 때 구마모토로 이주, 구마모토중학교 야간부에서 배우면서 경찰의 급사(給仕)로 고학을 했다. 이 때 입수한 사회주의 관련 문건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24년 4월, 구마모토무산자동맹 설립에 동참했다. 그 밖에 피차별부락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마모토수평사 창립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는데, 스즈키 요시아키에 따르면 확실하게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며, “구마모토무산자동맹 등을 통해 측면에서 구마모토수평사의 활동에 협력한” 정도로 생각된다. 다케나카와 함께 구마모토무산자동맹을 결성한 이와노 타케시(岩野猛)・이와오 이에야다(岩尾家貞)는 모두 구마모토수평사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1924년 가을, 혁명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상경, 제1외국어학교 영문과 및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를 버는 수단으로 삽화나 제본 일을 시작하면서 삽화가가 되었고, 요코미조 세이시가 편집장으로 있던 『신청년』지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음수」의 삽화를 담당했다. 이후 『신청년』을 중심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코가 사부로・오오시타 우다루・유메노 큐사쿠 등의 소설에 삽화 작품을 실었다. 1936년 2·26 사건을 계기로 붓을 꺾고 단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월간 만주』, 『어린이 만주』의 편집에 종사했으나, 일본으로 송환되어 도쿄 시나가와에서 철공소를 경영했다. 1942년, 전쟁통에 후처 츠네코(つね子)의 고향 고후로 소개(疎開)했다. 1944년 야마나시일일신문에 입사해서 신문기자가 된다. 전후에는 야마나시일일신문 노조위원장, 일본신문노련 부위원장, 지노위 노동자측위원, 야마나시일일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현의원 보궐선거에도 입후보해 보았으나 낙선했다. 또 테레비 야마나시의 『일요방담』에 고정출연했다. 전후에는 이와타 센타로・츠보이 시게지 등이 화단으로 복귀하라고 권유했으나 고사하고 취미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1967년 장남 로의 부탁으로 『기온마츠리』 선전 팜플렛용 작품을 제작했고, 1974년 로의 프로모트로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방일했을 때 소묘와 영화 스틸컷을 콜라주한 포스터를 제작했다. 디트리히는 호텔방에 장식된 그 작품들이 마음에 들어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한다. 만년에는 장녀와 손자를 위해 서비스회사 “중부문교(中部文教)”를 설립했다. 1988년 도쿄 신주쿠 노상에서 허혈성 심부전 발작을 일으켜 급사했다. 향년 82세.
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해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안익태(安益泰, 1906년 12월 5일~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태생의 스페인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트럼페터…안익태(安益泰, 1906년 12월 5일~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태생의 스페인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했으나, 중반부터 당시 일본과 친밀감이 있던 독일로 넘어가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을 만들고 음악회를 지휘했다. 1941년에는 일본의 궁중 음악인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하였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호라 도미오(일본어: 洞 富雄 (ほら とみお), 1906년 11월 14일~2000년 3월 15일)는 일본의 역사가이다. 주…호라 도미오(일본어: 洞 富雄 (ほら とみお), 1906년 11월 14일~2000년 3월 15일)는 일본의 역사가이다. 주 연구 분야는 일본사이며, 와세다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본의 역사가 최초로 난징 대학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가 저술한 책인 《난징 사건》 일본에서 난징 대학살에 대해 다뤄진 최초의 역사서이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년 11월 6일 - 2002년 11월 11일)는 일본의 고고학자, 도쿄 대학(東京大学) 명예…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년 11월 6일 - 2002년 11월 11일)는 일본의 고고학자, 도쿄 대학(東京大学) 명예 교수이다. 야마구치현(山口県) 출신으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説)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기마민족설은 1948년에 「일본 민족 = 문화의 원류(源流)와 일본 국가의 형성」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일본의 통일국가의 출현과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의 창시는 동북아시아의 부여(夫餘) 계통의 기마민족이 세운 진(辰) 왕조에서 비롯되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에 달성되었다」는 것을 요지로 하였다.
사카구치 안고(일본어: 坂 (さか)口 (ぐち) 安 (あん)吾 (ご), 1906년 10월 20일 ∼ 1955년 2월 17일)은…사카구치 안고(일본어: 坂 (さか)口 (ぐち) 安 (あん)吾 (ご), 1906년 10월 20일 ∼ 1955년 2월 17일)은 일본의 문학가로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坂 (さか)口 (ぐち) 炳 (へい)五 (ご))이다.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 시절 이미 방랑벽이 있었으며,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싸움질을 하고 돌아다녀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한편, 주로 무사들의 군담을 숙독했고, 남몰래 닌자의 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1932년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6년, 전후의 시대적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파악한 <타락론>과 <백치>에 의해 일약 시대의 총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와 동시에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평가된다.
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을…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5대 해무청장이다. 본관은 통천(通川)이다.
우쓰노미야 도쿠마(일본어: 宇都宮 徳馬 (うつのみや とくま), 1906년 9월 24일~2000년 7월 1일)는 10선 중의원…우쓰노미야 도쿠마(일본어: 宇都宮 徳馬 (うつのみや とくま), 1906년 9월 24일~2000년 7월 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과 재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자 미노화겐제약을 창업한 사업가다.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조선군사령관을 역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장남이다.
쇼치 사부로(일본어: 曻地 三郎, 1906년 8월 16일 ~ 2013년 11월 27일)는 일본의 교육자, 교육 학자…쇼치 사부로(일본어: 曻地 三郎, 1906년 8월 16일 ~ 2013년 11월 27일)는 일본의 교육자, 교육 학자, 교육학, 심리학, 정신 의학 전문가이다. 옛 성씨는 야마모토(山本). 사재를 털어 일본 최초의 지적 장애아 통원 시설 시이노미 학원을 설립, 운영했다. 장애아동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교구를 제작했으며, 많은 건강 운동법을 남겼다. 장애아동들에게 한 글자를 가르치기 위해 6개월 간 끊임없이 교육하는 열정을 보였다. 향년 10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후쿠오카 교육 대학 교육 학부 교수, 한국 사회 사업 대학 (현 대구 대학교 ) 교수·대학원장, 사회 복지 법인 시이노미 학원 이사장 겸 원장을 역임했다. 히로시마 문장 이과 대학 문학 박사, 규슈 대학 의학 박사 . 후쿠오카 교육 대학 명예 교수, 한국·건양대 학교 명예 교수, 중국 장춘 대학 명예 교수, 상하이 화동 사범 대학 명예 교수, 모스크바 심리 교육 대학 명예 교수.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페스탈로치 교육상 수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 수상. 아사히 사회 복지 상등을 수상했다.
사이고 기치노스케(西郷吉之助)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사이고 도라타로 후작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조부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사이고 기치노스케(西郷吉之助)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사이고 도라타로 후작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조부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기치노스케라는 이름은 본디 조부 다카모리의 통칭으로 조부의 통칭을 따왔다. 한때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당주 도쿠가와 요시치카 후작(요시치카의 딸 하루코)의 사위였다.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에서는 법무대신을 지냈다. 형 사이고 다카테루 후작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그의 뒤를 이어 후작위를 습작하였다. 조부의 강직하고 대범한 성격을 닮은 인물로 평가되며, 현대 일본 정치·사회의 실질적 활동가로서, 참의원·법무대신 등 요직을 맡아 20세기 일본 정치에 족적을 남겼다.
다나카 지로(일본어: 田中二郞, 1906년 7월 14일 ~ 1982년 1월 16일)는 일본 효고현 출신의 법학자이다. 전문은…다나카 지로(일본어: 田中二郞, 1906년 7월 14일 ~ 1982년 1월 16일)는 일본 효고현 출신의 법학자이다. 전문은 행정법과 조세법. 1964년~1973년 최고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미노베 다쓰키치의 제자이다. 1976년 일본학사원회원, 1980년 일본 문화공로자.
권태하(權泰夏, 1906년 6월 2일 ~ 1971년 10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육상 선수이었고, 대한민국의 체육인이다.…권태하(權泰夏, 1906년 6월 2일 ~ 1971년 10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육상 선수이었고, 대한민국의 체육인이다. 1932년 하계 올림픽 육상 남자 마라톤에 출전하여 2시간 42분 52초로 9위를 기록하였다.
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소설가 겸 법학자 등으로…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소설가 겸 법학자 등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교육자(대학 교수) 겸 정치인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호(號)는 현민(玄民)이며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일제 시대 때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지냈고 고려대학교의 창립 초기 멤버이며,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카프가 민중문제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불참하였으며 경성제대에 결성되었던 경제연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사회주의 좌파 문학인으로 활동했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친일 칼럼, 논설 등을 기록 및 기고하는 친일 어용 단체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여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제헌 헌법을 입안하였으며, 정치 활동으로는 제1공화국 기간 중 민국당과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며, 1959년 장택상 등과 함께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 뒤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언론, 법률 활동 외에 제3공화국, 제4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신민당 총재 등을 지내다가 1969년 3선개헌이 통과되자 충격을 받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박정희 정부 하에서는 줄곧 야당 지도자로 정부 비판에 앞장섰으나, 제5공화국 출범 이후 국정자문회의 위원과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지내기도 했다.
이야나가 쇼키치(일본어: 彌 (いや)永 (なが) 昌 (しょう)吉 (きち) , 1906년 4월 2일 ~ 2006년 6월…이야나가 쇼키치(일본어: 彌 (いや)永 (なが) 昌 (しょう)吉 (きち) , 1906년 4월 2일 ~ 2006년 6월 1일)는 일본의 수학자로,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서적과 논문을 내고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여, 일본 수학계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도모나가 신이치로(일본어: 朝 (とも)永 (なが) 振 (しん)一 (いち)郎 (ろ), 1906년 3월 31일 ~ 1979년…도모나가 신이치로(일본어: 朝 (とも)永 (なが) 振 (しん)一 (いち)郎 (ろ), 1906년 3월 31일 ~ 1979년 7월 8일)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공로로 1965년 리처드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거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연구는 소립자 물리학의 발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모리 시게오(일본어: 森 茂雄, 1906년 3월 18일 ~ 1977년 6월 24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모리 시게오(일본어: 森 茂雄, 1906년 3월 18일 ~ 1977년 6월 24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및 사업가이다.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구본웅(具本雄, 1906년 3월 7일 ~ 1952년 2월 2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이다.…구본웅(具本雄, 1906년 3월 7일 ~ 1952년 2월 2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이다. 아호는 서산(西山)이다.
다케노코시 시게마루(일본어: 竹腰 重丸 (たけのこし しげまる), 1906년 2월 15일 ~ 1980년 10월 6일)는 일본의…다케노코시 시게마루(일본어: 竹腰 重丸 (たけのこし しげまる), 1906년 2월 15일 ~ 1980년 10월 6일)는 일본의 축구인으로 축구 지도자 겸 심판직도 수행했다.
야부우치 기요시(일본어: 薮内 (やぶうち) 清 (きよし):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2일-2000년(헤이세이…야부우치 기요시(일본어: 薮内 (やぶうち) 清 (きよし):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2일-2000년(헤이세이 12년) 6월 2일)는 일본의 천문학자・과학사학자다. 경도대학 명예교수. 처음에는 순수 천문학자였으나 신죠 신조의 영향을 받아 중국 역법사 연구로 전향했다. 효고현 고베시 출신. 코요중학교, 구제오사카고등학교(현 오사카대학) 이과병류를 거려 쇼와 4년(1929년) 경도제국대학 이학부 우주물리학과 졸업. 1929년 경도제국대학 부수(副手), 1935년(쇼와 10년) 동방문화학원 경도연구소(현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촉탁, 후에 동 기관 연구원을 역임했다. 1948년(쇼와 23년) 경도대학 연구원, 1949년(쇼와 24년) 동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로 임용되어 중국과학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진행시켰다. 1967년(쇼와 42년) 동 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그 사이 1955년(쇼와 30년)부터 일본천문학회 부이사장을 맡았다. 1969년(쇼와 44년) 경도대를 정년퇴직하고 동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쇼와 54년)까지 류코쿠대학 교수를 지냈다. 1970년(쇼와 45년) 자수포장 및 아사히상, 1972년(쇼와 47년) 미국과학사학회 조지 서튼 메달을 수상했다. 1976년(쇼와 51년)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83년 1월 일본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하마무라 준(Jun Hamamura, 1906년 2월 7일 ~ 1995년 6월 21일)은 일본의 배우이다. 후쿠오카시에서…하마무라 준(Jun Hamamura, 1906년 2월 7일 ~ 1995년 6월 21일)은 일본의 배우이다.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으며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경북 대구~1989년 6월 18일)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경북 대구~1989년 6월 18일)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5·6·7·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12월부터 1971년 6월까지는 7년 6개월 간 국회의장(6대~7대)을 역임했다. 이는 역대 국회의장 중 최장 재임기간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고 세례명은 아길로이다. 본관은 성산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코타니 마사오(일본어: 小谷 正雄 (こたに まさお): 1906년 1월 14일 - 1993년 6월 6일)는 일본의 물리학자다.…코타니 마사오(일본어: 小谷 正雄 (こたに まさお): 1906년 1월 14일 - 1993년 6월 6일)는 일본의 물리학자다. 동경대학・동경이과대학 겸임교수, 동경이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덴 테이키치의 차남 덴 테츠와, 가이바라정장 코타니 호타로의 장녀 코타니 후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 졸업 이후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강사, 이학부 조교수, 정교수를 역임했고, 동경대 이학부장, 오사카대학 기초공학부 교수를 지냈다. 또한 경도대에서도 교편을 잡아 겸임교수도 지냈다. 1960년 일본생물물리학회를 창설하고, 같은 해부터 20년 내리 동경이과대학 학장을 맡았고, 양자역학, 자전관리론, 배위자장이론, 생체고분자 연구 등에서 업적을 쌓았다. 아키히토의 교육계를 지내기도 했다.
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 たなかいさじ, 1906년 1월 3일 ~ 1987년 4월 11일)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법학…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 たなかいさじ, 1906년 1월 3일 ~ 1987년 4월 11일)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법학 박사이다. 중의원 의원 (1942년 ~ 1947년, 1949년 ~ 1983년), 제7-8대 자치청 장관 (1956년 ~ 1957년), 제44대 중의원 부의장 (1963년 ~ 1965년), 제22-23대 법무대신 (1966년 ~ 1967년), 제31대 법무대신 (1972년 ~ 1973년) 등을 지낸 바 있다.
정주얼자부(正珠爾扎布, 1906년 ~ 1967년 11월)는 만주국의 몽골족 출신 군인이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에 맞서…정주얼자부(正珠爾扎布, 1906년 ~ 1967년 11월)는 만주국의 몽골족 출신 군인이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에 맞서 만주-몽골 독립 운동을 벌이다 전사한 바보자부의 셋째 아들이며 링성의 사위로, 일본에서 교육받고 군인이 되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이었으며, 그때 보직은 제10군관구 참모장.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나카 다다시(田中正). 1945년 8월 소련군이 참전한 이후 해랍이 교외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계 군관들을 죽이고 소련군에 투항했다. 그 뒤 하바로프스크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푸순 전범관리소로 이감되었다. 사상개조를 받은 뒤 1960년 11월 28일 특사로 풀려나 국영 영림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반성실에 격리되었고, 1967년 11월 중순 어느 밤 영림장 텃밭의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