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요시시게(일본어: 安倍能成, 1883년 12월 23일 ~ 1966년 6월 7일)는 일본의 관료, 교육자이다. 의사 아베…아베 요시시게(일본어: 安倍能成, 1883년 12월 23일 ~ 1966년 6월 7일)는 일본의 관료, 교육자이다. 의사 아베 요시토(安倍義任)와 그의 부인 시나(品)의 여덟째 아들로 마쓰야마성하 고토진정(小唐人町, 지금의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오카이도(大街道))에서 태어났다. 법조인 아베 하카루(安倍恕)는 그의 동생이다.
마쓰노 쓰루헤이(일본어: 松野 鶴平 (まつの つるへい), 1883년 12월 22일~1962년 10월 18일)는 7선 중의원…마쓰노 쓰루헤이(일본어: 松野 鶴平 (まつの つるへい), 1883년 12월 22일~1962년 10월 18일)는 7선 중의원 의원과 3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아들인 마쓰노 라이조는 15선 중의원 의원을, 손자인 마쓰노 요시히사는 6선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일본어: 植芝 盛平, 1883년 12월 14일 ~ 1969년 4월 26일)는 일본의 무술가로, 아이키도의…우에시바 모리헤이(일본어: 植芝 盛平, 1883년 12월 14일 ~ 1969년 4월 26일)는 일본의 무술가로, 아이키도의 시조이다. 아이키도측에서는 개조(開祖 카이소[*]), 큰스승(大先生/翁先生 오오센세이[*])이라고 부른다. 다나베시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여러 무술을 배우다가 러일전쟁 때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종군했다. 1907년 제대하여 홋카이도 개척민으로 건너갔다가 대동류 합기유술의 시조인 타케다 소카쿠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919년 홋카이도를 떠나 본토로 돌아가 신토계의 신흥종교인 오모토에 가입하여 그 무술사범이 되었고 여기서 첫 도장을 열었다. 1924년 오모토 교단의 성사(聖師)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함께 몽골로 선교 여행을 갔으나 중국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이듬해 자기 말로는 엄청난 영적 개명을 경험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 무술 실력이 갑자기 더욱 고강해졌다고 한다. 1926년 도쿄로 이사가서 아이키카이 홈부 도장을 세웠다. 1931년 코부칸(皇武館)이라는 도장을 세워 황족, 군인, 사업가 등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명성을 쌓아갔다. 1942년 일본의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전쟁을 비판하며 전시정책의 일환인 대일본 무덕회(大日本武徳会)의 통제를 거부하고 은거하기도 했다. 대전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일본 안팎 전세계에 아이키도 전파에 힘썼다. 196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오카다 신이치로(岡田信一郎, 1883년 11월 20일 - 1932년 4월 4일)은 다이쇼·쇼와 초기 활약한 건축가이다. 도쿄…오카다 신이치로(岡田信一郎, 1883년 11월 20일 - 1932년 4월 4일)은 다이쇼·쇼와 초기 활약한 건축가이다. 도쿄 제국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와 와세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마와 지로, 이마이 겐지, 미쓰이 미치오, 요시다 이소야, 무라타 마사치가, 요시무라 쥰조 등 다수한 후진을 육성하였다. 몸이 약하여 외유를 통 가질 수 없었지만 해외의 건축잡지 등을 통하여 근대건축의 동향을 파악하였고 그로 하여 뛰어난 건축평론을 집필하였다. 설계작품에는 철근 콘크리트로써 화풍의장을 표현한 가부키자, 일본 서구양식건축에 있어 최고걸작으로 평가되는 메이지 생명관, 영국풍의 주택건축인 하토야마 회관 등이 있다. 화·양 건축을 막론하여 양건축의 양식을 자유자재 이용한 건축가였다. 이론 면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건축표현을 추구하면서도 한편 실작품에서는 과거의 양식을 다수 사용한 것으로서 모더니즘 건축파로부터 언행불일치라고 비판받았다. 메이지 건축의 문화사적 의의가 인정되어 관동대지진으로 대피해를 입은 니콜라이 성당(콘도르 설계) 및 일본적십자사 본사(쓰마기 요리나카 설계)의 수복을 수행하였다.
시마다 시게타로(일본어: 嶋田 繁太郎, 1883년 9월 24일 ~ 1976년 6월 7일)는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시마다 시게타로(일본어: 嶋田 繁太郎, 1883년 9월 24일 ~ 1976년 6월 7일)는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해군 제독이다. 도조 내각에서 해군 대신으로 일한 바 있다.
고무라 긴이치(小村欣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화족, 정치인이다. 귀족원 후작 의원.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의 장남으로…고무라 긴이치(小村欣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화족, 정치인이다. 귀족원 후작 의원.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 중학·고등학교를 거쳐 1907년 7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동년 11월 외교관급영사관시험에 합격하여 청나라에 외교관보로 부임하게 된다. 이듬해 1908년 영국의 주영일본대사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3년 후 1911년 부친 주타로 후작이 위독하여 귀국하였고 부친 사후 동년 12월 22일 후작위를 습작하였고 귀족원 의원에 취임하였다. 이후 외무성 정무국 제1과장, 정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척무성을 설립하여 조선부장, 차관에 취임하였다. 하마구치 내각의 척무차관으로 유임. 1930년 12월 29일 급서하여 후작위는 동생 쇼지가 습작하게 된다.
하세가와 기요시(일본어: 長谷川 清, 1883년(메이지 16년) 5월 7일 ~ 1970년(쇼와 45년) 9월 2일)는 일본…하세가와 기요시(일본어: 長谷川 清, 1883년(메이지 16년) 5월 7일 ~ 1970년(쇼와 45년) 9월 2일)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정3위 훈1등 공1급 해군대장이다. 제3함대 사령장관, 군사참의관, 대만 총독 등을 역임하였다. 전후에 A급 전범 혐의로 2개월 동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호즈미 시게토(일본어: 穂積重遠, 1883년 4월 11일 ~ 1951년 7월 29일)은 일본의 민법학자이자 법조인이다.…호즈미 시게토(일본어: 穂積重遠, 1883년 4월 11일 ~ 1951년 7월 29일)은 일본의 민법학자이자 법조인이다. 작위는 남작. 도쿄 제국대학 교수와 최고재판소 판사를 역임하였다. 딸은 국문학자 이와사 미요코(岩佐美代子). 형법학자 남작 호즈미 노부시게(穗積陳重)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딸 우타코(歌子)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08년에 같은 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1910년에는 조교수가 되었으며, 구미 유학 이후인 1916년에 교수가 되었다. 가족법의 권위자로, 1944년에 귀족원 의원을 지내고, 1945년에는 동궁대부와 동궁시종장을 맡았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기타 잇키(일본어: 北 (きた) 一輝 (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는 일본의 사상가…기타 잇키(일본어: 北 (きた) 一輝 (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 정치철학자다.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일본어: 北 (きた) 輝次郎 (てるじろう))이다. 천황제와 메이지 헌법, 천황주권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기타는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국가주의, 우파사회주의적 접근법으로 일본을 개조하려 했다. 기타에게는 천황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천황이 현인신이라는 사고가 팽배했던 일본 제국에서 그런 기타는 매우 특이한 사상가였다.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1883년 3월 13일 ~ 1956년 4월 2일)는 일본에서 국민 시민으로 알려진 일본의…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1883년 3월 13일 ~ 1956년 4월 2일)는 일본에서 국민 시민으로 알려진 일본의 시인이자 조각가이다. 그의 생애 동안 720여 편에 달하는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70여 점의 조각 작품을 완성한 조각가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번역, 평론 등에서 업적을 남긴 예술인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와다 산조(일본어: 和田三造, 1883년 3월 3일 ~ 1967년 8월 22일)는 일본의 서양화가이다. 제국미술원(현재…와다 산조(일본어: 和田三造, 1883년 3월 3일 ~ 1967년 8월 22일)는 일본의 서양화가이다. 제국미술원(현재 일본예술원)의 회원이자 도쿄미술학교(현재 도쿄 예술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27년에 색의 표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일본표준색협회를 창립하였다. 1953년에 영화 《지옥문》(地獄門)의 색채와 의상 디자인을 담당하여 1954년 아카데미상의 의상디자인상을 수상하였다.
아사쿠라 후미오(일본어: 朝倉文夫, 1883년 3월 1일 ~ 1964년 4월 18일)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활약한…아사쿠라 후미오(일본어: 朝倉文夫, 1883년 3월 1일 ~ 1964년 4월 18일)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활약한 일본의 조각가이다. 호는 홍소(紅塐)이며 동양의 로댕으로 불리었다. 무대미술가이자 화가인 아사쿠라 세쓰(朝倉摂)와 조각가인 아사쿠라 쿄코(朝倉響子)가 딸이다.
시가 나오야(일본어: 志賀 直哉, しが なおや, 1883년 2월 20일~1971년 10월 21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시가 나오야(일본어: 志賀 直哉, しが なおや, 1883년 2월 20일~1971년 10월 21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활동했으며,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아리시마 다케오, 사토미 돈 등과 함께 시라카바파(일본어: 白樺派)의 주요 창설 일원 중 한 사람이다. "시가 문체"라는 독자적인 문체를 구축하였고,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소설 《암야행로》(暗夜行路), 단편인 《화해》(和解), 《꼬마점원의 신》(小僧の神様), 《기노사키에서》(城の崎にて) 등이 있다. 소설의 신(小説の神様)라고 불렸으며 많은 일본인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다자이 오사무가 죽기직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출생으로,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일제 강점기에 민족 운동에 참여하여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 활동과 민족자본 운동을 벌이며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았고,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 남측의 여운형 등과 함께 북측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소련군정 당국과 대립하다가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0월에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 도야마현립도야마고등학교)와 제6고등학교를 나온 뒤 1908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8년 도쿄공소원 판사가 되었다. 히로시마공소원장으로 재직중이던 1944년 2월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법조 관계자들이 전시 체제에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헌법을 위반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2월 이와타 주조 사법대신의 천거로 제23대 대심원장에 취임했다. 두 사람은 사법권 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했으며 알프레드 C. 오플러 연합군 최고사령부 민정국 사법법제과장과도 사법 개혁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이와타가 공직추방되자 후임에 보수파인 기무라 도쿠타로가 취임했는데 기무라는 호소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도파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다니무라 다다이치로도 사법차관이 된 뒤 호소노에 비협조적으로 나와 사법 개혁은 난관에 봉착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심원을 대신해 최고재판소가 신설되었다. 곧이어 재판관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전전부터 사법권 독립을 주장한 호소노파와 이에 반발하는 반호소노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설치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의 위원이었던 호소노는 자신이 도조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던 것처럼 중책을 담당하는 감독직에 있으면서 한 마디 항의도 못하는 사람은 최고재판소재판관의 자격이 없다고 연셜하며 재판관 선출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바라 시게루 외의 동조자가 없어 호소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재판관 후보자를 30명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호소노는 낙선했다. 그런데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최고재판소재판관 선출은 신헌법 이후 출범한 내각이 선임해야 한다고 지명하여 요시다 내각에 의해 구성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는 해산하고 신헌법하에서 최초로 구성된 가타야마 내각에 의해 새롭게 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헌법이 시행될 때 최고재판소가 구성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대심원장이던 호소노가 최고재판소장관 대행직을 수행해야 했다. 새롭게 꾸려지는 위원회에서도 여전히 호소노파와 반호소노파의 대립이 이어졌고 수적 열세로 인해 호소노파는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위원회가 선임한 재판관 후보 30명에 호소노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1947년 8월 4일 호소노는 장관 대행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다음날부터 시행되는 「재판소법」이 8월 4일까지 최고재판소재판관 대행직에서 물러난 사람은 대심원 판사로의 자격을 가지지만 8월 5일부터 물러난 사람은 도쿄고등재판소 판사 자격만 가진다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퇴임 후 호소노는 도쿄도 마루노우치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1일 향년 66세로 서거했다. 같은 날 훈1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하토야마 이치로(일본어: 鳩山 一郎, 1883년 1월 1일 ~ 1959년 3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다.…하토야마 이치로(일본어: 鳩山 一郎, 1883년 1월 1일 ~ 1959년 3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다. 제52·53·5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