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 다쓰오(일본어: 土井辰雄, どい たつお), 1892년 12월 22일 ~ 1970년 2월 21일)은 일본의 가톨릭…도이 다쓰오(일본어: 土井辰雄, どい たつお), 1892년 12월 22일 ~ 1970년 2월 21일)은 일본의 가톨릭 성직자이다.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960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미야기현 센다이 출신이며, 1902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신학교를 마친 후 사제 서품을 받았고, 로마에 유학했다. 그 후 일본의 교황 대사 비서를 지냈다.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도쿄 대교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계속 대주교로 재직했으며, 일본 가톨릭 발전을 위한 기대 속에 교황 요한 23세 시대인 1960년, 일본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필린핀 포로학대죄로 유일하게 중장으로서 교수형 판결을 받았으며,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노동총연맹의 후보로 출마했으며 3위로 낙선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같은 선거구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전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 1978년 6월 12일)는…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 1978년 6월 12일)는 중국의 신문학 활동가, 극작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공작자이다. 본명은 카이전(開貞), 호는 딩탕(鼎堂)이며, 모뤄(沫若)는 자이다. 하카계 출신이며, 쓰촨성 쟈딩 푸(嘉定府)의 중류 정도의 지주의 셋째 아들로서 출생하였다. 쓰촨성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1914년 일본 제국의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근대적 연구 방법을 익혔다. 이 사이에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혁명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하였으며 중국에서 반봉건 혁명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초기 활동가 중 하나였다. 그는 그러다 일본 제국의 여자와 결혼하고 극작가로서 여성 해방을 혁명 테마로 한 <3인의 반역적 여성>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중국 공산당의 신문학 운동 시기의 본격적 사극의 하나로 말해지기도 한다. 중국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고조된 후 1926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자 리다자오 등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영에서 거기에 참가하여 우한·상하이 등지에서 여러 직책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난창 봉기에 가담한 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피해서 일본 제국에 망명하였고, 이 기간에 유물사관을 가지고 중국 고대 사회를 연구하는 혁명 작업을 하였으며, 그것은 중국 고대 사회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각을 가져다 연구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때 충칭으로 귀국해서 중국 공산당 측의 문학 평론 공작의 책임을 맡고 공산당 혁명의 항일 전선에 참가하여 선전 활동에 종사하는 중에 극작(劇作)이나 평론 등도 많이 발표하였다. 그때 발표된 희곡 <굴원(屈原)>(1942)의 내용은 굴원을 항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중국 고대 애국 시인의 말을 따서 국민당의 부패 양상을 들춰내기도 하였다. 1949년, 1950년 파리와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 마오쩌둥 측의 문인 대표로 참가하였고, 중국 공산당 정권 성립 이후로 정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장,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과기대 학장, 중국 공산당 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 중국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등을 맡았으며, 마오둔, 저우양, 천보다 등과 함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정권에서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노선의 조타수가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크게 권력을 행사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 사상 방면의 공작자 중의 하나이었다. 문혁 초기에는 사인방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 마오쩌둥은 그의 보호를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에게 요구하였다. 문혁이 끝난 뒤는 화궈펑에 의해서 당내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였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화궈펑 정권에서 마오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 사다노스케(定之助)이다. 도쿄부 출신으로 백작 아리마 요리쓰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정치인 마쓰다 마사히사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마사히사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마사유키는 후작 하치스카 마사하키(후작 하치스카 모치아키의 장남)의 사위이며 외교관 가야 하루노리(가야 쓰네노리의 차남)의 장인이다.
야마구치 다몬(일본어: 山口 多聞, 1892년 8월 17일 ~ 1942년 6월 6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야마구치 다몬(일본어: 山口 多聞, 1892년 8월 17일 ~ 1942년 6월 6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으로,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시이 시로(일본어: 石井 四郎,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는 일본의 군인 및 정수기 개발자로…이시이 시로(일본어: 石井 四郎,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는 일본의 군인 및 정수기 개발자로, 731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일전쟁 중 일본 제국 군대의 생물학전을 담당했다.
나루세 세이이치(成瀬正一, 1892년 4월 26일 ~ 1936년 4월 13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프랑스 낭만주의 연구자이다.…나루세 세이이치(成瀬正一, 1892년 4월 26일 ~ 1936년 4월 13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프랑스 낭만주의 연구자이다. 규슈 대학의 프랑스 문학 교수이기도 한 그는 로맹 롤랑과 교류한 첫 일본인으로, 고지로 마쓰카타와 협업하여 회화와 조각상을 수집한 도쿄 우에노 국립서양미술관의 마쓰카타 컬렉션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시노 나오키(일본어: 星野 直樹, ほしの なおき, 1892년 4월 10일~1978년 1월 26일)는 일본의 관료이자…호시노 나오키(일본어: 星野 直樹, ほしの なおき, 1892년 4월 10일~1978년 1월 26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로, 만주국의 총무 장관이었다. 호시노 나오키는 1892년 4월 10일, 일본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 고등 문관 시험에 급제한 뒤, 191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건설할 당시에 관동군으로부터 대장성에서 인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만주에 건너간 이후에는 만주국 재정부 이사관, 재정부 총무사장, 재정부 차장, 국무원 총무청장을 거쳤고, 1937년에는 국무원 총무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선 일본인이 맡는 국무원 총무 장관이 실질적으로 총리 역할을 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며, 호시노 나오키는 재임 기간 중 만주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2키 3스케 중 한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A급 전범이 된 호시노 나오키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1958년에 석방돼 후에는 도쿄 힐튼 호텔 부사장, 도쿄 급행 전철 이사, 아사히 해운 사장, 다이아몬드 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1892년 4월 9일 ~ 1964년 5월 6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일본의 다이쇼 시대와…사토 하루오(佐藤春夫, 1892년 4월 9일 ~ 1964년 5월 6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일본의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우울감을 탐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미우리상 4등을 수상했다.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1892-03-04) ~ 1950년 10월 25일(1950-10-25))는 일제강점기…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1892-03-04) ~ 1950년 10월 25일(1950-10-25))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 등과 함께 변절한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 필명은 춘원생·경서학인(京西學人)·노아자닷뫼당백·Y생·장백·장백산인 등.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아울러 순한글체 소설을 쓰며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망명, 1919년 도쿄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된 이후 친일(대일협력) 성향으로 기울어 친일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전선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혔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을 집필하고 연설을 한 것이 눈에 띄며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징병제도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 제하에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 한국인 유학생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일본어: 芥川 龍之介 (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년 3월 1일~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일본어: 芥川 龍之介 (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년 3월 1일~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당주인(澄江堂主人)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我鬼)이다.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우지슈이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고전들에서 제재를 취해 「참마죽」, 「덤불 속」, 「지옥변」 등과 같은 단편 소설들을 주로 저술했고 「거미줄(원제: 蜘蛛の糸)」, 「두자춘(杜子春)」 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들,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방황한다는 내용의 「방황하는 유대인」을 저술했다.
단 이노(團伊能, 1892년 2월 21일 ~ 1973년 2월 9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남작 단…단 이노(團伊能, 1892년 2월 21일 ~ 1973년 2월 9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남작 단 다쿠마의 장남으로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히라사와 사다미치(일본어: 平沢 貞通, ひらさわ さだみち, 1892년 2월 18일 ~ 1987년 5월 10일)는 일본의…히라사와 사다미치(일본어: 平沢 貞通, ひらさわ さだみち, 1892년 2월 18일 ~ 1987년 5월 10일)는 일본의 템페라 화가이다. 도쿄도에서 태어났으며 홋카이도에서 자랐다. 호(號)는 대장 (일본어: 大暲 다이쇼[*])이다.
다카기 다케오(일본어: 高木武雄, 1892년 1월 25일 ~ 1944년 7월 1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후쿠이현…다카기 다케오(일본어: 高木武雄, 1892년 1월 25일 ~ 1944년 7월 1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후쿠이현 출신이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다카기는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해 최연소로 소위에 임관되었고,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는 제5전대 사령관으로 산호해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 후에는 사이판에 갇힌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중장에게 대본영의 철수 명령을 알리려 가다 미군에 의해 사이판에서 전사했다. 사후에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 大學, 1892년 1월 8일 ~ 1981년 3월 15일)는 일본의 시인, 가인, 번역가이다.…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 大學, 1892년 1월 8일 ~ 1981년 3월 15일)는 일본의 시인, 가인, 번역가이다. 초현실주의 등 프랑스의 시문학을 번역하여 번역시선집 《월하의 일군》(月下の一群, 1925) 등으로 일본에 소개하였으며 《달빛과 피에로》(月光とピエロ, 1919), 《모래베개》(砂の枕, 1926), 《저녁의 무지개》(夕の虹, 1957) 등의 시집을 냈다. 일본 예술원 회원으로 1970년 11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1979년 11월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오다치 시게오(일본어: 大達 茂雄 오오다치 시게오[*], 1892년 1월 5일 ~ 1955년 9월 25일)는 일본의…오다치 시게오(일본어: 大達 茂雄 오오다치 시게오[*], 1892년 1월 5일 ~ 1955년 9월 25일)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전 내무대신·문부대신이다. 오다치는 1892년, 시마네현에서 주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에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지방국 재무 국장을 거쳐 1932년 후쿠이현 지사가 되었으며, 만주국 법제국장,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장 등을 지냈으나, 관동군과의 대립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베 내각, 요나이 내각의 내무차관을 맡은 후, 1942년에 쇼난특별시 (昭南特別市, 지금의 싱가포르) 시장을 지냈다. 1943년 7월, 도쿄 시와 도쿄 부를 폐지하였으며, 도쿄도를 설치 (도쿄 도제, 東京都制) 하고, 초대 도쿄 도 장관 (東京都長官) 이 되었다. 1944년 7월, 고이소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고이소 내각의 각료였다는 이유로 1946년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1952년에 추방 해제되었다.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시마네 선거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1953년,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성립되면서, 내각 조성 참모 오가타 다케토라 (緒方竹虎)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문부대신이 되었으며,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일본교직원조합의 영향력을 억제시키고자 하였다. 1955년, 위암으로 6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宮崎 繁三郎, 1892년 1월 4일 ~ 1965년 8월 30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최종…미야자키 시게사부로(宮崎 繁三郎, 1892년 1월 4일 ~ 1965년 8월 30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지금의 기후현 기후시 출신으로, 기후중학(현 기후 현립고등학교)를 나와 육사 26기로 임관했다. 장남은 같은 육사 출신으로 메이지 대학 총장을 지낸 미야자키 시게키(宮崎繁樹)다. 장교에 임관한 뒤 육군대학에 들어가 참모 교육을 받았다. 참모본부, 정보기관에서 오래 근무하긴 했지만, 할힌골 전투, 임팔 작전 등 일본군이 열세에 몰려 있던 전투에서 항상 전공을 거둔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 일본 육군 굴지의 야전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다.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하에서 싸우는 일이 많았고, 눈부신 ‘승리’를 얻지도 못했지만, 부대를 끝까지 지켜내고 끈질기게 싸웠다. 하지만 언제나 한정적인 부대 내 지휘권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가시오 세이이치로(일본어: 柏尾 誠一郎, 1892년 1월 2일 ~ 1962년 9월 6일)는 일본의 남자 테니스 선수이며…가시오 세이이치로(일본어: 柏尾 誠一郎, 1892년 1월 2일 ~ 1962년 9월 6일)는 일본의 남자 테니스 선수이며, 구마가에 이치야와 함께 일본의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미국의 월터 웨스트브룩을 3-6, 6-3, 6-1, 11-9로 꺾으면서 캐나다 마스터스를 우승하였다.
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 해방을 위한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며, 「수평사」(水平社), 「규탄」(糺弾) 등의 명칭을 고안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