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토미 아유미(安冨 歩, 1963년 3월 22일)은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다. 2014년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하기…야스토미 아유미(安冨 歩, 1963년 3월 22일)은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다. 2014년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하기 전부터 일본 밖에 번역서가 소개되는 등 유명한 학자였으며, 커밍아웃을 하면서 이름의 독음을 아유무에서 아유미로 바꿨다. 또한 레이와 신센구미 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오쓰카 고헤이(일본어: 大塚 耕平, 1959년 10월 5일 ~ 2026년 3월 2일)는 일본의 학자, 정치인으로 다마키…오쓰카 고헤이(일본어: 大塚 耕平, 1959년 10월 5일 ~ 2026년 3월 2일)는 일본의 학자, 정치인으로 다마키 유이치로와 함께 구 국민민주당의 공동 대표를 지냈으며 현재 신 국민민주당 대표대행이다. 주오 대학 대학원 객원교수, 와세다 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내각부 부대신, 후생노동성 부대신, 민진당 참의원 정책심의회장,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대리, 민진당 대표, 참의원의 북한의 납치 문제 등에 관한 특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사카네 요시히로(일본어: 坂根 嘉弘 (さかね よしひろ), 1956년 2월~)는 일본의 역사가이자 경제학자이다. 주 연구…사카네 요시히로(일본어: 坂根 嘉弘 (さかね よしひろ), 1956년 2월~)는 일본의 역사가이자 경제학자이다. 주 연구 분야는 일본경제사이며, 히로시마 수도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일(朴一, 1956년 - )은 재일한국인 3세 출신의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 경제학 연구과 교수(상학박사)이다. 일본…박일(朴一, 1956년 - )은 재일한국인 3세 출신의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 경제학 연구과 교수(상학박사)이다.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출생했다.
기요타키 노부히로(일본어: 清滝信宏, 1955년 6월 24일 ~ )은 일본의 경제학자아자,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다.…기요타키 노부히로(일본어: 清滝信宏, 1955년 6월 24일 ~ )은 일본의 경제학자아자,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다. 새케인즈학파이고,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기초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이케 아쓰시(일본어: 清家 篤, 1954년 4월 11일 ~ )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교수이며, 전 게이오기주쿠 대학…세이케 아쓰시(일본어: 清家 篤, 1954년 4월 11일 ~ )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교수이며, 전 게이오기주쿠 대학 총장이다. 도쿄도 태생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2009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여 2017년까지 맡았다. 전공은 노동경제학이며 게이오기주쿠 대학 상학부 교수 겸 상학연구과 위원, 내각부 경제사회종합연구소 명예소장이다.
다케나카 헤이조(일본어: 竹中 平蔵 타케나카 헤이조[*], 1951년 3월 3일 ~)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전직 정치인이다.…다케나카 헤이조(일본어: 竹中 平蔵 타케나카 헤이조[*], 1951년 3월 3일 ~)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전직 정치인이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글로벌 시큐러티 연구소 (グローバルセキュリティ) 소장, 대학원 미디어 디자인 연구과 교수·종합 정책 학부 교수, 주식회사 파소나 그룹 (株式会社パソナグループ) 이사회장, 아카데미 힐즈 (アカデミーヒルズ) 이사장을 맡고 있다. 참의원 의원 (2004년 7월 ~ 2006년 9월), 고이즈미 정권 (제1차 고이즈미 내각~제3차 고이즈미 내각)의 경제 재정 정책 담당대신, 제2차 고이즈미 내각의 금융 담당 특명 담당 대신, 제3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의 총무대신을 지냈다.
오타 세이이치(太田誠一 (おおた せいいち), 1945년 10월 31일 ~ 2024년 12월 4일)는 중의원을 역임한 일본의…오타 세이이치(太田誠一 (おおた せいいち), 1945년 10월 31일 ~ 2024년 12월 4일)는 중의원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고가파의 자유민주당 (일본)(LDP) 의원이었다.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결혼한 후쿠다 기요코의 사촌이었다. 오타는 2024년 12월 4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모토야마 요시히코(일본어: 本山美彦 もとやま よしひこ[*], 1943년 1월 1일~)는 일본의 교육자이자 경제학자이다. 교토…모토야마 요시히코(일본어: 本山美彦 もとやま よしひこ[*], 1943년 1월 1일~)는 일본의 교육자이자 경제학자이다. 교토 대학 세계체제론 명예 교수이며 경제학 박사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국제경제학회 회장이었으며 현재 오사카 산업대학 총장을 재임중이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榊原 英資, 1941년 3월 27일 ~ )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1941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도쿄…사카키바라 에이스케(榊原 英資, 1941년 3월 27일 ~ )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1941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까지 마친 후 미국 미시건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료했다. 일본의 대장성에서의 역할로 세계 외환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타나베 도시오(일본어: 渡辺 利夫, 1939년 6월 22일~ )는 일본의 경제학자로 개발경제학을 주 전공으로 하고 있다.…와타나베 도시오(일본어: 渡辺 利夫, 1939년 6월 22일~ )는 일본의 경제학자로 개발경제학을 주 전공으로 하고 있다. 야마나시현 고후시 출신이다. 신탈아론(新脫亞論)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니시베 스스무(일본어: 西部 邁 (にしべ すすむ): 1939년 3월 15일 - 2018년 1월 2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니시베 스스무(일본어: 西部 邁 (にしべ すすむ): 1939년 3월 15일 - 2018년 1월 2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도쿄대학 교양학부 교수, 격월간지 『표현자』 고문을 역임했다. 북해도 출신으로, 동경대 입학 후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멤버가 되어 동경대 자치회 위원장으로서 60년 안보투쟁에 참여했다. 안보투쟁 이후 동경대 대학원에서 근대경제학을 전공하여 요코하마국립대학 조교수, 동경대 조교수, 영미 유학을 거쳐 동경대 정교수가 된다. 1980년대부터 보수논객으로 전향했고, 동경대 고바마 소동 때 교수직을 사직하고 이후로는 재야평론가로서 활동했다. 새역모에서도 활동했고, 핵무장과 징병제 도입을 주장했다. 2018년 타마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윤기중(尹起重, 1931년 12월 19일~2023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윤기중(尹起重, 1931년 12월 19일~2023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이며,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의 부친이다.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 1923년 6월 18일 ~ 2004년 7월 13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그는 중국에서 일하던…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 1923년 6월 18일 ~ 2004년 7월 13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그는 중국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방학을 중국에서 보냈고, 쿄토 대학 졸업 후 영국에 유학하였다.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교수를 역임했다. 2004년에 작고한 그는 수리경제학, 비교사회연구, 경제성장론에 기여하였다. 대표 저작으로는 『왜 일본은 성공하였는가?(Why Has Japan Succeeded? Western Technology and Japanese Ethos)』,『왜 일본은 몰락하는가(なぜ日本は沒落するか?)』 등이 있다.
이정환(李廷煥, 1919년 11월 13일~2008년 8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은행가, 기업인, 정치인이다.…이정환(李廷煥, 1919년 11월 13일~2008년 8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은행가, 기업인, 정치인이다. 1919년 부산 출생으로, 동래고등학교,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부산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62년 농협 회장, 1963년 한국은행 총재직을 거쳐 1964년에는 대한민국의 제18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1974년 한국합성고무(금호석유화학의 전신) 회장을 지내다가 1992년 명예회장으로 퇴임하였다. 1998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였다. 2008년 8월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경제학원론》, 《국민소득론》, 《케인즈 경제이론》 등이 있다.
오키타 사부로(일본어: 大来 佐武郎, 1914년 11월 3일 ~ 1993년 2월 9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오키타 사부로(일본어: 大来 佐武郎, 1914년 11월 3일 ~ 1993년 2월 9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일본의 전후의 개발과 일본-미국 관계들에서 자신의 역할로 알려졌다.
신태환(申泰煥, 1912년 1월 7일~1993년 12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제8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신태환(申泰煥, 1912년 1월 7일~1993년 12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제8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아호는 안당(安堂), 본관은 평산이다. 인천에서 태어났다. 1939년 도쿄 상과대학 본과를 졸업했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동국대학 교수를 거쳐 1951년 서울대 법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2년 11월 부산에서 한국경제학회를 창립했다. 1964년에는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1961년 부흥부 장관, 1969년에 초대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오카자키 지로(일본어: 岡崎 次郎 (おかざき じろう): 1904년 6월 29일 - ?? )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오카자키 지로(일본어: 岡崎 次郎 (おかざき じろう): 1904년 6월 29일 - ?? )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 홋카이도 에사시 출신.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1929년 동 경제학부를 졸업. 전후 1950년부터 큐슈대학 교양부 교수, 호세이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1968년 호세이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저술에 전념했다. 전후 일본 마르크스 경제학계의 대부였던 사키사카 이츠로가 번역했다고 알려진 이와나미판 『자본론』을 하도급받아 번역한 실제 번역자다. 명의만 사키사카였을 뿐, 거의 관여하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오카자기의 번역이다. 1983년 『마르크스에 기댄 60년: 자조생애기』라는 자서전을 출판해서 사키사카를 비판했다. 친구 지인들에게 책을 돌리는 책모임을 겸해 이별모임을 가진 오카자키는 서쪽으로 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이듬해 1984년 6월 6일, 모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가출했다. 부부의 발걸음은 시나가와의 호텔에 투숙한 것을 시작으로 이즈반도의 오오히토온천・하마마츠・경도・오카야마・하기・히로시마까지 신용카드 사용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해 9월 30일 오사카의 한 호텔에 투숙한 것을 끝으로 생활반응이 끊겨, 현재까지도 생사 불명이다.
미노베 료키치(일본어: 美濃部亮吉, 1904년 2월 5일~1984년 12월 24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미노베 료키치(일본어: 美濃部亮吉, 1904년 2월 5일~1984년 12월 24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7·8대(1967년부터 1979년까지) 도쿄도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회주의자 중 한 명이다.
아리사와 히로미(일본어: 有沢 広巳, 1896년 2월 16일 ~ 1988년 3월 7일)는 일본의 경제학자, 통계학자이다.…아리사와 히로미(일본어: 有沢 広巳, 1896년 2월 16일 ~ 1988년 3월 7일)는 일본의 경제학자, 통계학자이다. 호세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호세이 대학과 도쿄 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1896년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제2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웠으며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독일에 유학하였다. 1938년 인민전선 사건(人民戦線事件)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도쿄 제국대학에서 휴직처리되었다. 1944년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도쿄 대학에 복귀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통계학회 회장,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호세이 대학 총장,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학사원 원장을 지냈다. 1988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후쿠모토 가즈오(일본어: 福本 和夫 (ふくもと かずお): 1894년 7월 4일 - 1983년 11월 16일)는 일본의…후쿠모토 가즈오(일본어: 福本 和夫 (ふくもと かずお): 1894년 7월 4일 - 1983년 11월 16일)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경제학자・과학기술사학자・사상사학자・문화사학자다. 제2차 일본공산당의 이론적 지도자로, 1920년대 일본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장남이 후쿠모토 쿠니오. 돗토리현 쿠메군 시모호쿠죠촌(지금의 토하쿠군 호쿠에이정)에서 후쿠모토 노부조(福本 信蔵)의 3남으로 태어났다. 구제 쿠라요시중학교, 구제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마츠에고등학교(현재의 시마네대학) 교수로 취임. 1922년 문부성 재외연구원으로서 영국・독일・프랑스를 2년 반 유학했다. 유학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에서 헝가리 철학자 루카치 죄르지와 독일 사상가 카를 코르슈의 지도하에 마르크스주의를 배웠다. 당시 일본공산당원 대부분은 마르크스 등 사상가들의 저술의 번역본을 읽고 논의한 반면,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3개국 유학 경험이 있던 후쿠모토는 각국 언어 원문으로 글을 이해하고 읽었다고 한다. 1924년 귀국해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현재의 야마구치대학) 교수로 전임한다. 귀국 직후 『마르크스주의』지에 게재한 논문 「경제학 비판 가운데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범위를 논함」에서 후쿠다 도쿠조・카와카미 하지메・타카하타 모토유키 등 선행 자본론 연구자들을 비판해서 일약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야마구치고상을 사직하고 상경, 당시 탄압으로 인해 해산되었던 일본공산당의 재건을 도모하였고, 1925년 사노 마나부가 결성한 공산당 재건뷰로에 참여했다. 후쿠모토는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야마카와 히토시의 논문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1922년)을 『마르크스주의』 1926년 2・5월호에 발표한 「야마카와씨의 방향전환론의 전환보다 시작을 해야 한다」에서 비판했다. 이어서 발표한 논문 「방향전환은 어떠한 제과정을 취할까」, 「경제학 비판에 있어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범위를 논함」 등에서는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적 방법으로 자본주의 사회현실의 운동법칙을 밝히고 “분리・결합론”을 전개했다. 『마르크스주의』 1925년 2월호에 발표한 「유물사관의 구성과정」에서는 카와카미 하지메의 유물사관 연구방법론을 공격했다. 후쿠모토는 야마카와주의를 경제운동과 정치운동의 차이를 명확히 하지 않은 “절충주의”이자 “조합주의”라고 비판하고, 운동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론투쟁을 통해 노동자 외부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의식을 주입하는 첨예한 전위당에 의한 이론투쟁과 정치투쟁이 필요함을 설했다. 1926년 2월 12일 『사회의 구성: 나란한 변화의 과정』, 1926년 3월 22일 『유물사관과 중간파사관』, 1926년 5월 27일 『경제학 비판의 방법론』, 1926년 11월 20일 『이론투쟁』이 연달아 간행되고, 이 무렵 후쿠모토주의가 일본 좌파 사상계를 풍미했다. 1926년 12월, 고시키온천에서 극비리에 개최된 일본공산당 제3회 대회에서 당의 재건이 결의되자 입당하여 제2차 일본공산당 상임위원・당정치부장에 취입하고, 이론적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에서 발령한 27년 테제에서 후쿠모토주의가 비판받자 냉큼 실각당하여 당내 영향력을 상실했다. 1928년 6월 3・15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이후 1942년까지 14년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문화사에 대한 관심으로 야나기타 쿠니오와 서신을 왕래했다. 아들 후쿠모토 쿠니오(당시 17세)를 보내 책을 빌려가기도 했다고 야나기타의 일기에도 기재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요양하다가 1950년 당활동에 복귀했다. 같은 해 실시된 제2회 참원선에서 돗토리현 선거구에 일본공산당 공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후쿠모토는 2만 6508표를 득표했고, 당선자 나카타 요시오(일본사회당)는 13만 1376표, 차점 낙선자 토쿠야마 지츠조는 9만 5731표였다. 1951년 9월 미군정 점령정책을 위반했다고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코민포름의 일본공산당 비판에서 비롯된 50년 문제에서는 통일협의회를 조직해 당의 재건을 주장했다. 육전협 이후 당중앙과의 대립이 심화되어 1958년경 당에서 제명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로는 독립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입장을 취했다. 다만 후쿠모토가 정말 제명되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공산당에서 쫓겨난 뒤로는 농업문제, 과학기술사 연구에 전념했다. 후쿠모토는 근세 포경기술 등을 연구하여 일본 르네상스론을 구축하려 한 독특한 과학기술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옥중에서부터 우키요에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관계의 연구자로서의 개척자가 되어 『호쿠사이와 인상파・입체파 사람들』(1955년) 등을 출판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을 일정 유보하면서도 지지했다. 1983년 사망. 향년 89세. 혁마르파의 코부시서방에서 저작집이 간행되었고, 2011년 5월 완결기념모임이 개최되었다.
백남운(白南雲, 1894년 2월 11일 ~ 1979년 6월 12일)은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 겸 교육자이자…백남운(白南雲, 1894년 2월 11일 ~ 1979년 6월 12일)은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 겸 교육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학자 겸 정치인이다.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와 조선공산당의 경제이론가였고, 이순탁과 함께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경제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광복 후에는 일부 자산계급과 연대를 전제로 '조선 민족의 진로'라는 글에서 '연합성 신민주주의(민족 통일전선)'를 제창하였다. 해방 후 김두봉, 허정숙, 최창익 등과 연결, 남조선신민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차 김구, 김규식, 장건상 등과 함께 월북한 후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문교상과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다.
쿠루마 사메조(일본어: 久留間 (くるま) 鮫造 (さめぞう): 1893년(메이지 26년) 9월 24일-1982년(쇼와 57년)…쿠루마 사메조(일본어: 久留間 (くるま) 鮫造 (さめぞう): 1893년(메이지 26년) 9월 24일-1982년(쇼와 57년) 10월 2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호세이대학 명예교수, 호세이대학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전공은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렉시콘』의 편자로 유명하다. 릿쿄대학 명예교수 쿠루마 켄의 아버지다.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종이 도매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을 계승하기를 원한 부모의 바람에 반하여,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중학교, 제6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1개월 후 정치학과로 전과한다. 병으로 1년 휴학하고 졸업했다. 1918년 스미토모은행에 입사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또한 쌀 소동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힘에 충격을 받아 3개월 남짓만에 퇴사했다. 일단 본가로 귀향한 뒤 이듬해 2월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에 입소했다. 1920년부터 2년간 쿠시다 타미조와 함께 자료수집을 위한 유럽행을 명받고 쿠루마는 영국에서, 쿠시다는 독일에서 도서자료를 모았다. 1923년부터 3년간 도시샤대학에서 경제학사를 강의했다. 동시기 벌어지던 일본자본주의 논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공습으로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의 사무소・장서각이 전소했다. 전후 소장 타카노 이와사부로와 함께 연구소 재건을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 1946년 9월 오오우치 효에의 권유로 호세이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호세이대학에서는 경제학사를 담당했다. 1960년 호세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 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말년에는 호세이와 릿쿄의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자들을 모아 마르크스 사전인 『마르크스 경제학 렉시콘』을 만들었다. 겸임교수로서 아이치대학에서, 비상근강사로서 동경대학, 홋카이도대학, 가쿠슈인대학 등에서 경제학사를 강의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1893년 1월 27일 ~ 1961년 12월 25일) 일본의 경제학자・식민정책 학자로 일본…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1893년 1월 27일 ~ 1961년 12월 25일) 일본의 경제학자・식민정책 학자로 일본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다. 도쿄의 제일고등학교 재학 중 니토베 이나조,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했다.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일본의 무교회파 기독교 지도자로도 알려져 있다. 성경의 여러 책을 주석하였다. 한국의 김교신에게 큰 영향을끼쳤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를 가지고 1937년 중일전쟁을 비판하여 도쿄대학 교수를 사직하였으나, 전후에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도쿄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중앙공론(中央公論)사가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근대 일본의 대지식인 10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오우치 효에(大内 兵衛, 1888년 8월 29일 ~ 1980년 5월 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과를…오우치 효에(大内 兵衛, 1888년 8월 29일 ~ 1980년 5월 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재무성에서 근무하다가 신설된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에 들어가 조교수가 되었다. 1920년 모리토 다쓰오의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유학하였다가 1923년 복직했다. 1938년 제2차 인민전선 사건으로 검거되어 기소되면서 휴직하여 전후인 1945년 11월에 복직하였다. 1950년부터 1959년까지 호세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1953년 일본통계학회 회장을 맡았다. 1965년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1일 사망했다.
가와카미 하지메(일본어: 河上肇, 1879년 10월 20일 ~ 1946년 1월 3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일본…가와카미 하지메(일본어: 河上肇, 1879년 10월 20일 ~ 1946년 1월 3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교토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의 언론인, 교수, 시인이자 경제학자로서, 가난 문제와 그 해결 방안을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루어 많은 독자의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을 졸업했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에드윈 셀리그먼(Edwin Robert Anderson Seligman)의 《역사의 경제적 해석》(Economic Interpretation of History)을 번역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했다. 가난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주의 사상과 결부한 그는 1913년에는 유럽에서 유학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귀국한다. 1915년에 교토대학 교수직을 맡아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1917년 《가난 이야기》(貧乏物語)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그는 1928년에 정치 활동이 문제가 되어 결국 정부의 탄압으로 교토대학을 떠났고, 1932년에는 사회주의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는 교토에 있는 동안 개인잡지인 《사회문제연구》(일본어: 社會問題硏究 샤카이몬다이겐큐[*])를 창간해,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전파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경제학 대강》과 《자본론 입문》은 1920~30년대 일본의 이론경제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사회주의 평론》(1905), 《가난 이야기》(1917), 《자본주의 경제학의 사적 발전》(1924), 《경제학 대강》(1928), 《제2 가난 이야기》(1930), 《자본론 입문》(1932) 등 다수가 있다.
야마자키 가쿠지로(일본어: 山崎覚次郎, 1868년 8월 3일 ~ 1945년 6월 28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법학박사…야마자키 가쿠지로(일본어: 山崎覚次郎, 1868년 8월 3일 ~ 1945년 6월 28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법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화폐론과 금융론을 주로 연구했다.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출신으로, 1889년 도쿄 제국 대학 정치학과를 수료했으며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도쿄 제국 대학 법학조교수, 경제학부 교수 등을 지낸 뒤 경제학부장이 되었다. 1897년에 사회정책학회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학회에서 물러난 뒤 주오 대학 교수, 일본은행 고문, 금융학회 초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쇼와 천황의 경제학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타지마 킨지(일본어: 田島 (たじま) 錦治 (きんじ), 1867년 10월 4일(게이오 3년 음력 9월 7일) -…타지마 킨지(일본어: 田島 (たじま) 錦治 (きんじ), 1867년 10월 4일(게이오 3년 음력 9월 7일) - 1934년(쇼와 9년 6월 28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호는 적성(赤城). 교토 제국대학 경제학부 초대 학부장. 리쓰메이칸 대학 제2대 학감. 리쓰메이칸 대학 제3대 학장, 재단법인 리쓰메이칸 초대 협의원, 대일본무덕관 궁도 범사, 일본조정협회 제3대 회장, 관서조정협회 초대 회장, 제국학사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 에도 우시고메 아카기모토정(오늘날의 도쿄도 신주쿠구 아카기모토정) 출신. 구제1고를 거쳐 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동대 칠박사 중 하나인 카나이 노부루의 지도를 받았고 서양 유학도 경험했다. 귀국 후에는 경도제대 법과대학에서 "경제이론", "재정학" 강의를 담당했다. 경도대학 법대에서 경제학부가 독립한 것을 기회로 1919년(대정 8년) 경도제대 초대 경제학부장에 취임했다. 경도대 재직 중에 동경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의 학생을 받아들인다거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를 초빙하는 등, 경도대 특유의 자유로운 학풍 확립에 공헌했다. 경도대 퇴직 후 리츠메이칸대의 학감・학장으로 취임해 경제학부 확충에 힘썼다. 다키가와 사건으로 경도대를 퇴직한 교수들을 리쓰메이칸 대학에 받아주기도 했다.
아베 이소오(일본어: 安部 (あべ) 磯雄 (いそお), 겐지 2년 음력 2월 4일(1865년 3월 1일) ~ 1949년(쇼와…아베 이소오(일본어: 安部 (あべ) 磯雄 (いそお), 겐지 2년 음력 2월 4일(1865년 3월 1일) ~ 1949년(쇼와 24년) 2월 10일)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정치가다. 기독교적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활발히 선전했으며,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다. 실제 인권변호사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아베 이소오 등의 기독교 사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또한 일본 야구 발전에 공헌해 “일본 야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카나이 노부루(일본어: 金井 (かない) 延 (のぶる): 1865년 2월 26일(원치 2년 2월 1일-1933년 8월…카나이 노부루(일본어: 金井 (かない) 延 (のぶる): 1865년 2월 26일(원치 2년 2월 1일-1933년 8월 13일)는 일본의 법학자・경제학자・정책학자다. 러일전쟁 개전 때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동대 칠박사 중 한 명이다. 시즈오카현 출신.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 구스타프 폰 슈몰러, 아돌프 바그너 등 강단사회주의자들에게 사사했다. 귀국 후 사회정책학회에 참가해 그 중심 멤버가 됨가 동시에 동경제대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9년 동경제대 경제학부가 신설되자 초대 학장, 1925년까지 교수로 재임했다. 독일에서 습득한 사회정책 이장에 따라 귀국 후 사회정책학회에서 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하고 국가에 의한 노동자 보호 및 금은복본위제 등을 제창했다. 러일전쟁에 앞서 1903년 6월 다른 학자들과 함께 개전을 주장하는 칠박사 의견서를 제출해 여론을 개전 방향으로 몰았다. 또한 러일강화조약에 대해서도 반대 주장을 했다. 1908년 11월 28일 제국학사원 회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