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한민(胡漢民, 1879년 12월 9일~1936년 5월 12일)은 중화민국의 정치가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가…호한민(胡漢民, 1879년 12월 9일~1936년 5월 12일)은 중화민국의 정치가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광동 번우 사람으로, 근대 시기의 민주 혁명가이며 정치인이다. 일본 유학중에 손문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중화민국정부 총참의 겸 문관장, 정치부장, 육군대원수대본영 총참의, 총통비서장 등을 지냈다.
나가이 가후(일본어: 永井 荷風 나가이 카후[*], 1879년 12월 3일 ~ 1959년 4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나가이 가후(일본어: 永井 荷風 나가이 카후[*], 1879년 12월 3일 ~ 1959년 4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 수필가, 번역가이다. 주로 메이지 시대와 쇼와 시대에 걸쳐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 《힘겨루기》(腕くらべ), 《묵동기담》(濹東綺譚) 등이 있다. 본격적으로 문학에 뜻을 둔 것은 1901년경이며, 1909년 12월부터 도쿄 아사히 신문>에 <레이쇼>를 연재, 다음해부터 <미다분가쿠>의 창간에 참가했다. '와세다분가쿠'의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탐미주의로 기울어져서 이른바 미다파의 신인들에게 탐미·퇴폐의 문학 취미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후에 에도적 화류 세계에의 탐닉으로 자폐하여 많은 화류소설의 걸작을 낳았다.
오기와라 로쿠잔(荻原 碌山, 1879년 12월 1일 ~ 1910년 4월 22일)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조각가이다. 본명은…오기와라 로쿠잔(荻原 碌山, 1879년 12월 1일 ~ 1910년 4월 22일)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조각가이다. 본명은 오기와라 모리에(荻原 守衛)이다. 일본에서 모더니즘 조소를 개척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있으며, 주로 동상을 작업했다.
가와카미 하지메(일본어: 河上肇, 1879년 10월 20일 ~ 1946년 1월 3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일본…가와카미 하지메(일본어: 河上肇, 1879년 10월 20일 ~ 1946년 1월 3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교토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의 언론인, 교수, 시인이자 경제학자로서, 가난 문제와 그 해결 방안을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루어 많은 독자의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을 졸업했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에드윈 셀리그먼(Edwin Robert Anderson Seligman)의 《역사의 경제적 해석》(Economic Interpretation of History)을 번역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했다. 가난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주의 사상과 결부한 그는 1913년에는 유럽에서 유학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귀국한다. 1915년에 교토대학 교수직을 맡아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1917년 《가난 이야기》(貧乏物語)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그는 1928년에 정치 활동이 문제가 되어 결국 정부의 탄압으로 교토대학을 떠났고, 1932년에는 사회주의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는 교토에 있는 동안 개인잡지인 《사회문제연구》(일본어: 社會問題硏究 샤카이몬다이겐큐[*])를 창간해,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전파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경제학 대강》과 《자본론 입문》은 1920~30년대 일본의 이론경제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사회주의 평론》(1905), 《가난 이야기》(1917), 《자본주의 경제학의 사적 발전》(1924), 《경제학 대강》(1928), 《제2 가난 이야기》(1930), 《자본론 입문》(1932) 등 다수가 있다.
이시하라 시노부(일본어: 石 (いし)原 (はら) 忍 (しのぶ), 1879년 9월 25일 ~ 1963년 1월 3일)는 일본의…이시하라 시노부(일본어: 石 (いし)原 (はら) 忍 (しのぶ), 1879년 9월 25일 ~ 1963년 1월 3일)는 일본의 안과의사이자 일본 제국 육군 소속의 군의관이다. 이시하라 색각 검사표를 개발하였다.
시오텐 노부타카(일본어: 四王天延孝, 1879년 9월 2일 - 1962년 8월 8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 정치가이다. 최종…시오텐 노부타카(일본어: 四王天延孝, 1879년 9월 2일 - 1962년 8월 8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 정치가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음모론을 역설했으며 유대인 음모론 관련 서적인 시온 장로 의정서의 일본어 번역을 행하였다. 우익 단체 고쿠혼샤(国本社)의 이사 및 일본반유대협회 회장직 또한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5년 12월 A급 전범 용의로 체포되나 공직추방을 당한 후 1947년 석방되었다.
다키 렌타로(일본어: 瀧 廉太郎, 1879년 8월 24일 ~ 1903년 6월 29일)는 일본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이자…다키 렌타로(일본어: 瀧 廉太郎, 1879년 8월 24일 ~ 1903년 6월 29일)는 일본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일본의 서양음악 도입 초창기인 메이지 시대에 활동하였다.
데라우치 히사이치(일본어: 寺内寿一, 1879년 8월 8일 ~ 1946년 6월 12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인, 정치인이다.…데라우치 히사이치(일본어: 寺内寿一, 1879년 8월 8일 ~ 1946년 6월 12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인, 정치인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육군 대장. 위계는 종2위, 훈등은 훈1등, 공급은 공1급. 작위는 백작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 남방군 총사령관이었다.
하타 슌로쿠(일본어: 畑 俊六, 1879년 7월 26일 ~ 1962년 5월 1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하타 슌로쿠(일본어: 畑 俊六, 1879년 7월 26일 ~ 1962년 5월 1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원수이자 육군 대장이었다. 그는 가이코샤(偕行社)의 회장이었으며, 그의 형인 하타 에이타로(畑英太郎)는 육군 대장, 육군성 군무 국장, 관동군 사령관 등을 역임한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었다.
구니에다 히로시(일본어: 國枝 博 くにえだ ひろし[*], 1879년 6월 20일 ~ 1943년 8월 6일)는 오사카를…구니에다 히로시(일본어: 國枝 博 くにえだ ひろし[*], 1879년 6월 20일 ~ 1943년 8월 6일)는 오사카를 거점으로 활약한 일본 건축가이다. 조선총독부에 재임중, 주임기사로 조선총독부 청사의 설계에 종사하였다.
안도 기사부로(일본어: 安藤紀三郎, あんどう きさぶろう, 1879년 2월 11일 ~ 1954년 5월 10일)는 일본 제국의…안도 기사부로(일본어: 安藤紀三郎, あんどう きさぶろう, 1879년 2월 11일 ~ 1954년 5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관료이다. 최종계급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 태평양 전쟁 당시에 대정익찬회 (大政翼賛会) 부총재, 국무대신, 내무대신을 지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안도는 효고현에서 태어나, 189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육군 보병 소위, 1901년 타이완 수비 보병 제10대대부 (守備歩兵第10大隊附), 육군 보병 중위, 1904년 보병 제10연대 중대장, 육군 보병 대위, 육군 보병 소좌를 거쳐 1918년 미국 출장 후 육군 보병 중령이 되어 귀국하였다. 1922년 육군 보병 대령, 1927년 육군 소장이 되었으며, 1932년 육군 중장이 되어 뤼순 요새 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예비역이 되었다. 1941년에는 대정익찬회 (大政翼賛会) 부총재, 그 다음 해에는 대일본익찬장년단장 (大日本翼賛壮年団長) 이 되었다. 1942년 도조 히데키의 심복으로서 도조 내각의 무임소 국무 대신 (無任所国務大臣) 이 되었고, 이어서 대일본익찬장년단의 중앙본부장이 되었다. 1943년 도조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으며, 1944년 대신 직에서 물러나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45년 제3차 전범 지명으로 A급 전범으로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48년 석방되었다.
아카이케 아쓰시(일본어: 赤池濃, 1879년 1월 27일 ~ 1945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이다.…아카이케 아쓰시(일본어: 赤池濃, 1879년 1월 27일 ~ 1945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아카이케 아쓰시는 1879년 1월 27일에 아카이케 나나에몬(赤池七右衛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제일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의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02년 7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었을 당시,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가 마련한 자리에서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던 오현주가 부인회의 비밀문건을 넘기는 대가로 오현주, 강낙원 부부와 그의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약속하며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후에 경시총감이 되어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함께 한국인 학살의 빌미가 되었던 한국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를 지시하였다. 일본 민족위원회(日本民族会)나 국제정치경제학회(国際政経学会) 등에서 반유대주의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