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쓰 루이(일본어: 小松 塁 (こまつ るい), 1983년 8월 29일 ~ )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다.
고치 오테마에 고등학교: 6명
고마쓰 루이(일본어: 小松 塁 (こまつ るい), 1983년 8월 29일 ~ )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다.
하라 치사코(Chisako Hara, 1936년 1월 6일 ~ 2020년 1월 19일)는 일본의 배우이다. 고치시에서…
하라 치사코(Chisako Hara, 1936년 1월 6일 ~ 2020년 1월 19일)는 일본의 배우이다. 고치시에서 태어났으며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야나세 다카시(일본어: やなせたかし, 1919년 2월 6일 ~ 2013년 10월 13일)는 일본의 만화가, 그림책 작가…
야나세 다카시(일본어: やなせたかし, 1919년 2월 6일 ~ 2013년 10월 13일)는 일본의 만화가,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시인이다. 일본 만화가 협회 이사장 (2000년 5월 ~ 2012년 6월), 일본 만화가 협회 회장 (2012년 6월 ~ 2013년 10월), 유한회사 야나세 스튜디오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도쿄부 기타토시마 군 다키노가와구 (현 도쿄도 기타구)에서 태어나 고치현 가미 군 在所村 (현 가미시)에서 자랐다. 《호빵맨》의 아버지로 불린다. 과거에는 디자이너, 편집자, 무대 미술가, 연출가, 사회자, 카피라이터, 작곡가, 시나리오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경력이 있으며, 작곡가로는 미셸 카마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편집자로는 산리오에서 간행된 잡지 《시와 동화》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지냈다(1973년 ~ 2003년). 이후 타계 전까지 계간 잡지 《시와 판타지》에 책임 편집 형태로 참여하였다. 위와 같이 다양한 일을 다루고 있지만, 《호빵맨》의 인기가 올라 인기인이 되었을 땐 이미 50대 후반이였다. 나이가 90세를 넘어 2010년에는 은퇴도 생각하였지만, 다음 해 3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여, 현역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2013년 10월 13일 심부전으로 사망하여 가족장 후 15일 언론에 사망 소식이 공표되었다.
아리사와 히로미(일본어: 有沢 広巳, 1896년 2월 16일 ~ 1988년 3월 7일)는 일본의 경제학자, 통계학자이다.…
아리사와 히로미(일본어: 有沢 広巳, 1896년 2월 16일 ~ 1988년 3월 7일)는 일본의 경제학자, 통계학자이다. 호세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호세이 대학과 도쿄 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1896년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제2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웠으며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독일에 유학하였다. 1938년 인민전선 사건(人民戦線事件)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도쿄 제국대학에서 휴직처리되었다. 1944년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도쿄 대학에 복귀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통계학회 회장,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호세이 대학 총장,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학사원 원장을 지냈다. 1988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데라다 도라히코(일본어: 寺田寅彦, 1878년 11월 28일~1935년 12월 31일)는 일본의 물리학자, 수필가이다.…
데라다 도라히코(일본어: 寺田寅彦, 1878년 11월 28일~1935년 12월 31일)는 일본의 물리학자, 수필가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로, 수필가로서의 데라다 도라히코는 유럽의 과학 기술과 문물이 일본에 들어오던 메이지 시대를 사는 과학자의 관점에서 인간이 만든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는 자연재해를 통해 인간이 만든 과학 기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언급하며, 일본이라는 고유한 상황 속에 유럽에서 비판 없이 수용된 과학 기술의 문제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또한 그는 과학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과학 상식을 통해 일본에 과학이 널리 퍼졌음에도 대중이 과학을 인식하는 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당시 유언비어와 가학 대상으로서의 재일조선인 학살을 두고, 조선인들이 그런 중요성이 떨어지는 변두리 마을까지 휩쓸며 일본인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우물에 독을 풀려고 얼마나 많은 폭탄과 독이 동원되어야 하냐는 의문을 통해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의 전파와 그 책임을 언급하며 일본에 도래한 과학주의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마구치 오사치(일본어: 濱口 雄幸, 1870년 5월 1일 ~ 1931년 8월 2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자 제27대…
하마구치 오사치(일본어: 濱口 雄幸, 1870년 5월 1일 ~ 1931년 8월 2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자 제27대 내각총리대신이다. 1895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 후 입헌민정당 총재가 되어 1929년 7월에 일본의 총리가 되는데 성공하나, 그가 총리에 오른 때에는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시기로 일본에도 큰 위기가 닥친 때였다. 경제대공황의 영향으로 불경기가 시작된 일본에서는 829개나 되는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속출했으며, 주식이 폭락하여 투자자가 자살하는 등의 큰 경제 위기가 닥쳤다.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워져서, 요리사 조수를 선발하는데 수십 명이 몰릴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만주 침략 반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우파 장교들은 불만을 품었다.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후, 1년 뒤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