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간(일본어: 菊 (きく)池 (ち) 寛 (かん), 1888년 12월 26일 ~ 1948년 3월 6일)은 일본 다이쇼…기쿠치 간(일본어: 菊 (きく)池 (ち) 寛 (かん), 1888년 12월 26일 ~ 1948년 3월 6일)은 일본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본명은 기쿠치 히로시(일본어: 菊 (きく)池 (ち) 寛 (ひろし))로 한자 표기는 같다. 1888년 다카마쓰시에서 태어나 법률가를 목표로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지만, 징병을 피하기 위해 중퇴. 다시 교토 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1916년 동대학 졸업 후 지지신보(時事新報) 기자로 근무했다. 제3-4차 '신시조' 동인으로서 1916년 희곡 <屋上の狂人(오쿠조노교진, 옥상의 광인)> 등을 발표했으나 이후에는 주로 단편소설을 집필, 1918년 <無名作家の日記(무메이사카노닛키, 무명작가의 일기)>를 써 <주오코론>에 발표하여 신진 작가의 위치를 확립했다. 1923년 <분게이슌주(文藝春秋)>를 창간, 1928년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업가로서 활약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 나오키 상 등을 제정하여 작가의 복지와 신인의 발굴. 육성 등에 공헌한 바 있다. 창작 면에서는 1920년의 '신주후진(眞珠夫人)'으로 시작되는 통속소설을 주로 집필하였다. 인생의 '극적 순간'을 포착하여, 명쾌한 합리적인 질서 속에 살리는 점에 그의 희곡과 소설의 특색이 있다.
야나기사와 야스쓰구(柳沢保承, 1888년 12월 20일~1960년 10월 25일)는 일본의 화족이다. 야마토 고리야마번…야나기사와 야스쓰구(柳沢保承, 1888년 12월 20일~1960년 10월 25일)는 일본의 화족이다. 야마토 고리야마번 제6대 번주 야나기사와 야스노부(柳沢保申)의 장남이다. 부친의 양자 야나기사와 야스토시(柳沢保恵)의 뒤를 이어 백작 작위를 계승하였다.
스즈키 데이이치(일본어: 鈴木 貞一, 1888년 12월 16일 ~ 1989년 7월 15일)는 지바현 출신의 일본제국 육군…스즈키 데이이치(일본어: 鈴木 貞一, 1888년 12월 16일 ~ 1989년 7월 15일)는 지바현 출신의 일본제국 육군 군인으로, 통칭은 "신사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삼간사우" (三奸四愚) 라고 불렸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측근의 3간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윤백남(尹白南, 본명: 윤교중, 본명 한자: 尹敎重, 1888년 11월 7일~1954년 9월 29일)은 일제강점기…윤백남(尹白南, 본명: 윤교중, 본명 한자: 尹敎重, 1888년 11월 7일~1954년 9월 29일)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예술가이다. 배우, 극작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영화제작자 등을 다양한 직업을 겸했다.
기무라 헤이타로(일본어: 木村 兵太郎, 1888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일본 제국…기무라 헤이타로(일본어: 木村 兵太郎, 1888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일본 제국 육군의 대장으로, 별칭은 버마의 도살자였다.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도야마 간켄(일본어: 遠山寛賢, 1888년 9월 24일 ~ 1966년 11월 24일)은 슈토칸 가라테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한…도야마 간켄(일본어: 遠山寛賢, 1888년 9월 24일 ~ 1966년 11월 24일)은 슈토칸 가라테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한 일본의 교사이자 가라테 사범이다.
아키야마 도쿠조(일본어: 秋山 徳蔵 あきやま とくぞう[*], 1888년 (메이지 21년) 8월 30일~1974년 (쇼와…아키야마 도쿠조(일본어: 秋山 徳蔵 あきやま とくぞう[*], 1888년 (메이지 21년) 8월 30일~1974년 (쇼와 49년) 7월 14일)는 메이지에서 쇼와 시대의 일본의 요리사이다. 다이쇼 시기부터 쇼와 시기에 걸쳐 궁내성 (후의 궁내청)에서 주방장을 맡았다. 위계는 정4위, 훈등은 훈3등이다. 프랑스 요리 아카데미 명예회원이다. 그의 생애를 그린 소설이나 드라마화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천황의 요리사(天皇の料理番)"로 알려져 있다. 황실의 식탁을 맡아 궁중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의 음식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서양 음식 보급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오우치 효에(大内 兵衛, 1888년 8월 29일 ~ 1980년 5월 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과를…오우치 효에(大内 兵衛, 1888년 8월 29일 ~ 1980년 5월 1일)는 일본의 경제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재무성에서 근무하다가 신설된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에 들어가 조교수가 되었다. 1920년 모리토 다쓰오의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유학하였다가 1923년 복직했다. 1938년 제2차 인민전선 사건으로 검거되어 기소되면서 휴직하여 전후인 1945년 11월에 복직하였다. 1950년부터 1959년까지 호세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1953년 일본통계학회 회장을 맡았다. 1965년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1일 사망했다.
미카와 군이치(일본어: 三川 軍一, 1888년 8월 29일 ~ 1981년 2월 25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미카와 군이치(일본어: 三川 軍一, 1888년 8월 29일 ~ 1981년 2월 25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 제독이다. 미카와는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해군병학교 38기를 나왔고, 1929년부터 국제 연맹 해군 대표 임원을 지냈으며, 프랑스 대사관 무관으로 프랑스에 주재했다. 귀국 후 중순양함 아오바, 도리우미, 전함 기리시마의 함장을 역임하고 1936년, 제2함대 참모장에 취임했다. 그는 진주만 공격에 참가해 1942년 7월, 제8함대 사령관으로 제1차 솔로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항해학교장, 제2남파함대사령장관, 남서방면함대 사령장관, 제 13항공대 사령장관을 역임하였고, 1945년 5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제1차 솔로몬 해전에서 적 순양함 5척을 격파하고, 적의 수송선단을 궤멸하는 등 지금도 훌륭한 제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카츠 쿠와시(일본어: 勝 精 かつ くわし[*], 1888년 (메이지 21년) 8월 23일 - 1932년 (쇼와 7년) 7월…카츠 쿠와시(일본어: 勝 精 かつ くわし[*], 1888년 (메이지 21년) 8월 23일 - 1932년 (쇼와 7년) 7월 10일)는 일본의 화족이자 사업가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데릴사위로 들어오기 전 성씨는 도쿠가와이다.
히구치 기이치로(일본어: 樋口 季一郎, 1888년 8월 20일 ~ 1970년 10월 11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최종계급은…히구치 기이치로(일본어: 樋口 季一郎, 1888년 8월 20일 ~ 1970년 10월 11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중장이며, 보직은 제5방면 군사령관 겸 북부군관구사령관이었다. 이스라엘 건국공로자로 인정받았다. 일본 효고현 미나미아와지시에서 5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가 그를 맡게 되었다. 18살 때는 기후현 오가키시의 히구치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거쳐 장교가 되고 나서는 주로 만주와 러시아쪽 부서에서 근무하였다. 하얼빈 특무기관장(소장)으로 재직했던 1938년에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을 부하인 대좌(한국군의 대령에 해당)와 함께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이들이 만주국과 상하이 조계지로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오토볼 사건). 이 일 덕분에 나중에 유대인들이 로비를 벌여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뒤에 부하 야스에 노리히로와 더불어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로서 <황금의 비>에 그 이름이 새겨졌으며 이스라엘 정부가 그 공적을 치하했다.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郎)와 함께 사쿠라카이(일본군부의 극우비밀결사조직)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나, 의견 차이로 다투고 나서 서로 갈라섰다. 또 2.26사건을 일으킨 청년장교와도 각별한 사이로 무력에 의한 실력행사를 조장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이자와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사건 당사자인 아이자와 사부로의 직속상관이었다.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인도적 차원에서 유대인을 도운 공적은 인정받았으나, 옛 일본군부 우익강경파로, 그 평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할 수 있으며, 공과론으로 대표되는 긍정론과 두 얼굴의 제국주의자로 대표되는 부정론이 있다.
윤병호(1889년 8월 5일~1974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윤병호(1889년 8월 5일~1974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호소가야 보시로(細萱 戊子郎, Hosogaya Boshirō; 1888년 6월 24일 – 1964년 2월 8일)는 제2차…호소가야 보시로(細萱 戊子郎, Hosogaya Boshirō; 1888년 6월 24일 – 1964년 2월 8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해군의 해군제독이었다.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해방…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독립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유자와 미치오(일본어: 湯沢 三千男, ゆざわ みちお, 1888년 5월 20일 ~ 1963년 2월 21일)는 일본의 내무…유자와 미치오(일본어: 湯沢 三千男, ゆざわ みちお, 1888년 5월 20일 ~ 1963년 2월 21일)는 일본의 내무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미야기, 히로시마, 효고 현 지사, 도조 내각의 내무대신, 자유민주당 소속 참의원을 지냈다. 유자와는 1888년, 도치기현에서 태어나, 1912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내무성에 들어갔으며, 1929년에 미야기현 지사, 1931년에 토목국장, 히로시마현 지사, 1935년에 효고현 지사가 되었으며, 1936년, 우시오 시게노스케 (潮恵之輔) 내무대신 아래에서 내무차관을 맡았다. 히로타 내각이 무너진 후 물러나, 1938년에 중화민국 임시 정부 고문으로 중국에 건너가, 그곳에서 북지나방면군 (北支那方面軍)의 참모장인 무토 아키라와 친해졌다. 무토와의 인연으로 육군과 가까워진 그는, 1940년에 대일본산업보국회 (大日本産業報国会)의 이사장이 되었다. 1941년 도조 내각이 성립되고, 도조 히데키 수상이 개전파에 의한 쿠데타 방지를 이유로 내무 대신을 겸임하자, 그는 도조의 보좌를 위해 내무차관에 추천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총선거는 정세를 이유로 연기되었으나, 초반 승리에 열광하는 국민 감정을 이용해 국회를 독점하고자 한 도조 히데키는, 후에 익찬선거 (翼賛選挙)의 준비를 위해 1942년 2월, 유자와에게 내무대신의 지위를 양보하였다. 내무대신이 된 유자와는, 익찬의원동맹 (翼賛議員同盟)의 실력자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山崎達之輔)의 동생으로, 내무성의 요직을 지낸 야마자키 이와오 (山崎巌)를 내무차관으로 삼아, 구 (舊) 기성 정당 관계자와 제휴를 도모하였다. 1943년, 지방자치 개정 법안을 둘러싼 문제로 내무대신에서 경질되었고, 직후 귀족원 의원을 지내고, 종전을 맞이하였다. 전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추방 해제 후에 중앙사회보험의료 협의회 회장, 시읍면 건설 촉진 중앙 심의회 회장, 메이지 신궁 대표 등을 지냈고, 1959년 제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 후보로서, 도치기현 선거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1963년, 사망하였다.
류래완(柳來琬, 1888년 5월 12일~1956년 9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 국회의원이었으며, 본관은…류래완(柳來琬, 1888년 5월 12일~1956년 9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 국회의원이었으며, 본관은 진주이며, 경기도 양평군 출신이다.
가지쓰카 류지(梶塚 隆二, 1888년 ~ 1976년 5월 3일)는 일본의 육군 군의관이다. 최종 계급은 중장. 1914년…가지쓰카 류지(梶塚 隆二, 1888년 ~ 1976년 5월 3일)는 일본의 육군 군의관이다. 최종 계급은 중장. 1914년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1939년 관동군군의부장이었고 1940년 육군군의중장이 됐다.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귀국했다.
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 隆篤, 1888년 ~ 1952년)는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 1928년 도쿄…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 隆篤, 1888년 ~ 1952년)는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 1928년 도쿄 대학 농학부를 졸업했다. 1933년 관동군 임시병마수용소 소장을 지냈다. 1935년 관동군 수의부장이 됐다.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952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기무라 고자에몬(일본어: 木村 小左衛門 키무라 코자에몬[*], 1888년 2월 2일 ~ 1952년 2월 28일) 은 일본의…기무라 고자에몬(일본어: 木村 小左衛門 키무라 코자에몬[*], 1888년 2월 2일 ~ 1952년 2월 28일) 은 일본의 기업가이자 정치인이다. 전쟁 전에는 헌정회 (憲政会), 입헌민정당 (立憲民政党) 소속이었으며, 전후에는 일본 진보당, 국민민주당, 개진당에 소속하였다. 고자에몬은 1888년,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 군 (郡) 회의원, 군 (郡) 회의장을 거쳐 1924년, 제15회 중의원 총선거에 헌정회 공인으로 첫 당선되어, 이후 통산 총선거에서 8번 당선되었다. 와카쓰키 레이지로의 측근으로서, 헌정회와 민정당 소속 시절에는 내상 (内相) 비서관, 수상 비서관을 지냈고, 그 후에도 장상 (蔵相) 비서관, 척무(拓務) 참여관 등을 지냈다. 전후 제1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농림대신 (지금의 농림수산대신), 가탸아마 내각에서 일본의 마지막 내무대신 (1947년 6월 1일 ~ 12월 31일), 제3차 요시다 내각에서 지방 재정 위원회 위원장, 지방자치청 장관, 초대 건설원 총재 (뒤에 건설대신, 1948년 1월 1일 ~ 3월 10일)를 맡았다. 전후 진보당과 민주당에 소속해 있었을 때는 전쟁 전의 민정당의 흐름을 계승하는 정당이라고 평가해 이누카이 다케루 (犬養健) 가 민주당 총재가 되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민주당이 분열될 때에 일단 연립파에 속했으나, 민주자유당과의 합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민주당 야당파와 국민협동당과 함께 국민민주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마지막 소속당이었던 개진당이 결성된 것은 1952년, 그가 6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20일전이었다.
오가타 다케토라(일본어: 緒方 竹虎, 1888년 1월 30일 ~ 1956년 1월 28일)는 일본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다.…오가타 다케토라(일본어: 緒方 竹虎, 1888년 1월 30일 ~ 1956년 1월 28일)는 일본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다. 자유당 총재, 국무대신, 내각정보국 총재, 내각관방방관, 부총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삼위 훈일등 욱일대수장(正三位勲一等旭日大綬章) 을 받은 바 있다. 아들 오가타 시주로(緒方四十郎)는 일본 은행 이사를 지냈다.
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인이며…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인이며 시인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출신(出身)이며, 본관(本貫)은 울산(蔚山), 호는 가인(街人)이다. 일제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이인, 허헌과 함께 조선국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결국 한국민주당의 정책 관련 노선에 반발하여 1946년 10월에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 후에 분단의 현실을 느껴 노선을 선회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初代)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고, 대법원장 퇴임 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야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삼각산로 5)에 안장되어 있다.
야스에 노리히로(일본어: 安江 仙江 やすえ のりひろ[*], 1886년 ~ 1950년)는 구 일본 육군의 군인으로서, 이스라엘…야스에 노리히로(일본어: 安江 仙江 やすえ のりひろ[*], 1886년 ~ 1950년)는 구 일본 육군의 군인으로서,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로 인정받은 인물이며 이름은 仙弘로 표기하기도 한다. 대좌(대령에 해당)로서 하얼빈 특무기관에 재직 중이던 1938년에 나치 독일의 박해로부터 도망쳐온 2만 명의 유대인에 대하여 특무기관장인 히구치 기이치로(樋口季一郎) 소장과 함께 급식 및 의류, 연류 등의 배급과 함께 환자에 대한 치료 실시, 이들의 제3국 출국 알선, 만주국 내의 정착 알선, 상하이 조계로의 이동 등의 활동으로 유대인을 도왔다(→ 오토폴 사건). 전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 중 한 사람으로 히구치 소장과 더불어 황금비에 그 공적을 기리는 이름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