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노오 기로(일본어: 妹尾 (せのお) 義郎 (ぎろう): 1889년 12월 16일-1961년 8월 4일)는 일본의…세노오 기로(일본어: 妹尾 (せのお) 義郎 (ぎろう): 1889년 12월 16일-1961년 8월 4일)는 일본의 불교운동가다. 히로시마현 히바군 토죠정 출신. “사유 없는 공동사회”를 제창, 불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 집안은 술도가를 운영했고, 원래 밥화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폐병 등을 앓으면서 1고를 휴학하던 중 인연이 생긴 두부 상인이 열성 법화신도여서, 그의 권유로 법화경을 읽게 되었다. 1918년 혼다 닛쇼가 주재하는 법화단체 통일단(統一団)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19년 통일단의 청년신자들을 중심으로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大日本日蓮主義青年団)을 조직, 기관지를 발행하고 순회강연을 다니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청년단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에 관계하게 되어,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련주의청년단은 1931년 세노오의 주도 하에 발전적 해산하고 초종파적인 신흥불교청년동맹(신흥불청)으로 거듭났다. 4월 5일 열린 결성대회에서 세노오는 동맹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흥불청은 그 강령에서 “석가의 찬앙과 불국토 건설,” “기성종단의 배격,” “자본주의 경제조직의 혁정(革正)과 당래사회의 실현” 등을 내걸고 노동운동, 소비조합운동, 반전운동, 반파쇼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36년 2월 세노오는 특별고등경찰에게 검거되었고, 1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동년 12월 재검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1940년 12월 투옥되었다. 전후에는 불교사회동맹(仏教社会同盟) 위원장, 평화추진국민회의(平和推進国民会議) 의장, 일중우호협회 동경도련회장 등을 지냈다. 1959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61년 8월 나가노현의 자택에서 죽었다.
니시무라 쇼지(일본어: 西村 祥治, 1889년 11월 30일 ~ 1944년 10월 25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니시무라 쇼지(일본어: 西村 祥治, 1889년 11월 30일 ~ 1944년 10월 25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아키타현 오가시 출신이다. 지역 유지의 집안의 13남매 중 다섯째로 4남인 니시무라는 아키타 중학교(오늘날의 아키타 고등학교)에 입학하나 재학중, 강압적인 기숙사 사감이 이를 참다 못한 기숙사생들에게 습격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요코테 중학교(오늘날의 요코테 고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어 해군병학교 39기로 입학한 니시무라는 1911년에 이를 졸업하고 순양함 아소, 전함 미카사, 히에이 등에 승무했다. 이후 1917년부터 1922년까지 해군대학교를 다니고 나서 여러 배를 거쳐 1929년에 구축함 시라쿠모의 함장이 되었다. 이어 26구축대를 시작으로 여러 소규모 함대의 사령관을 전전하다가 1940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니시무라는 어뢰를 활용한 전투에 능한 사람으로, 감시의 명인(見張りの神様)으로도 불렸다. 1944년 10월, 레이테 만 전투 당시에 제1유격부대 제3부대, 통칭 니시무라 함대의 사령관으로 참전, 25일 벌어진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불과 7척의 함대를 이끌고 79척의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연합 함대를 상대로 분전했으나 전사했다. 주력 함대인 구리타 다케오의 함대가 전투로 늦어져 미국 함대를 양쪽에서 공격하는 원래 계획이 실현 불가능함을 인지하고도 그대로 진격한 니시무라의 지휘에 대해서 니시무라를 긍정적으로 평 했던 새뮤얼 모리슨(en)이 '최저의 제독'이라고 혹평하는 등 무모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오자와 지사부로는 레이테에서 진지하게 제대로 싸운 자는 니시무라 뿐이었다고 평하는 등 평이 엇갈리는 면이 있다. 니시무라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2남과 3남은 요절했으며, 장남 세이지(禎治)는 해군 대위까지 진급했으나 1941년 필리핀 근해에서 이동 중 사고로 숨졌다. 한편 우익운동가 니시무라 슈헤이는 자신이 니시무라 쇼지와 인척관계임을 주장했다.
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 1889년 11월 28일 ~ 1982년 6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9년 8월…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 1889년 11월 28일 ~ 1982년 6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9년 8월 30일부터 1940년 1월 16일까지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대장대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대신을 지냈다. 사위 가토 이치로 (법학자)는 전 도쿄대학 총장이며, 손녀 고미야마 요코는 일본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오키는 1889년, 나가노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6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여러 직책을 거쳐 1934년, 이재국장이 되었으며, 가야 오키노리, 이시와타 소타로와 함께 대장성의 특출한 세 인물이라 불렸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요청에 따라 기획원에 창설에 참여해 차장에 취임하였고, 1939년, 총재 취임과 동시에, 귀족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 대장 대신 겸 기획원 총재로 첫 입각하였고, 왕징웨이 정권에의 특파 대사 고문으로서 난징에 부임해 경제 정책을 지도하였다. 1942년, 도조 내각에서 초대 대동아 대신에 임명되어, 대동아 회의 등의 시책을 전개하였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수용되었으나,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변호사로 일했으며,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에서 당선되어, 이후 네 차례 당선되었다. 1960년, 지바 사부로, 기무라 도쿠타로 등과 우파 집단 "소심회" (素心会)를 결성하여, 친 타이완파의 입장에서 일본과 중국 간의 국교 회복에 크게 반대하였다. 1968년, 나가노현 제2의 민간 방송 회사 나가노 방송이 설립되면서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구로다 나가미치(일본어: 黒田 長礼 (くろだ ながみち), 1889년 11월 24일 - 1978년 4월 16일)는 일본의…구로다 나가미치(일본어: 黒田 長礼 (くろだ ながみち), 1889년 11월 24일 - 1978년 4월 16일)는 일본의 화족(후작), 조류학자, 정치인이다. 지쿠젠 후쿠오카번주 가문인 구로다씨의 당주로, 초대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의 14대손이다. 일본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사토 이치로(일본어: 佐藤 市郎, 1889년 8월 28일 ~ 1958년 4월 12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해군중장, 교육자…사토 이치로(일본어: 佐藤 市郎, 1889년 8월 28일 ~ 1958년 4월 12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해군중장, 교육자, 역사가이자 해군 외교관이다. 사토-기시-아베 가문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의 친형이다.
오다 노부쓰네(織田信恒)는 일본의 정치인, 사업가, 만화 스토리 작가이다. 귀족원의원. 작위는 자작. 군인으로서 최종계급은…오다 노부쓰네(織田信恒)는 일본의 정치인, 사업가, 만화 스토리 작가이다. 귀족원의원. 작위는 자작. 군인으로서 최종계급은 육군 소위이다. 만화작가로서의 필명은 오다 쇼세이(織田小星). 주요 작품은 쇼짱의 모험(正チャンの冒険) 등이 있다. 오다 가문에 양자로 입적하기 전 이름은 소마 히데타네(相馬秀胤)이다. 친부는 자작 소마 도모타네(옛 이와키 나카무라 번주)이다.
기도 고이치(일본어: 木戸 幸一, 1889년 7월 18일 ~ 1977년 4월 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작위는 후작.…기도 고이치(일본어: 木戸 幸一, 1889년 7월 18일 ~ 1977년 4월 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작위는 후작.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의 종손(從孫)이자 양손(養孫)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쇼와 천황의 측근이었다.
유만겸(兪萬兼, 1889년 7월 13일 ~ 1944년 12월 13일)은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유길준의 맏아들이며, 유억겸의…유만겸(兪萬兼, 1889년 7월 13일 ~ 1944년 12월 13일)은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유길준의 맏아들이며, 유억겸의 형이기도 하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미키 로후(三木露風, 1889년 6월 23일 ~ 1964년 12월 29일)는 시인이자 비평가·동요 작가·작사가·수필가이다.…미키 로후(三木露風, 1889년 6월 23일 ~ 1964년 12월 29일)는 시인이자 비평가·동요 작가·작사가·수필가이다. 미키 로후는 필명으로, 본명은 미키 마사오(三木操)이다. 문학을 비롯해 미술사와 미학 등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어 다양한 이론서를 남겼으며 강의를 통해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는 효고현(兵庫県) 다쓰노정(龍野町)에서 은행원인 아버지 세쓰지로와 어머니 미도리카와 가타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로후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부모가 이혼을 하게 되는데, 어머니는 당시 한 살이던 로후의 동생만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고 로후는 조부모의 집에 맡겨진다. 청소년기에는 수석으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문학에만 관심을 쏟은 탓에 졸업이 어려워 오카야마현에 있는 시즈타니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1905년 진학을 위해 도쿄에 가서도 문학에만 심취해 중학교 편입 시험에 떨어지기도 한다. 1907년부터 소마 교후(相馬御風), 노구치 우조(野口雨情) 등과 함께 <와세다 시사(早稲田詩社)>를 결성하고 그해 9월 와세다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단카(短歌)와 절연하고 시에만 전념했는데 매월 서너 군데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이듬해 그동안의 불안정한 생활로 병을 얻게 되어 와세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결국 귀향해 요양 생활을 한다. 스물한 살에는 ≪폐원(廢園)≫(1909)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1년 만에 다시 ≪적막한 새벽(寂しき曙)≫(1910)을 상재하며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입지를 다진다. 그렇지만 1911년 부모를 대신하던 조부가 사망하자 깊은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흰 손의 사냥꾼(白き手の獵人)≫(1913)을 발표하며 비로소 완성도 높은 상징시의 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사이조 야소(西條八十), 야나기사와 다케시(柳澤健) 등과 함께 <미래사(未來社)>라는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한다. 이렇듯 공백이 없는 활발한 전성기와 높은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고독과 공허함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고 이로 인해 이 시기 종교에 서서히 빠져들며 신앙과 시작(詩作)을 병행한다. ≪환상의 전원(幻の田園)≫(1915)을 출간한 이후에는 홋카이도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Trappist Monastery)에 머물며 그 체험 중에 쓴 시를 바탕으로 종교시집인 ≪양심(良心)≫(1915)을 발표한다. 이후 두 차례 더 수도원에 체재한 뒤 1920년 5월에는 문학 개론 및 미학론의 강사직을 제안받아 정주(定住)하기에 이른다. 이후 약 5년간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로후는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창작을 이어 간다. 그러나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급격히 변모하는 시단의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워 서서히 문단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1924년 수도원에서 나온 로후는 지금의 도쿄 미타카(三鷹)에 터전을 잡고 문학 활동과 후학의 양성에 힘쓴다. 이 무렵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종교와 관련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고 강연을 하며 포교 활동에 힘썼는데, 이에 1927년 일본 최초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훈4등급(勳四等) 훈장인 성 세퓔크레 기사장(Chevalier Saint Sépulcre)과 홀리나이트(Holy Knight)의 칭호를 받는 영예를 얻는다. 1964년 12월 21일 로후는 미타카 자택 근처의 우체국 앞에서 택시에 치이는 사고로 치료를 받던 중 12월 29일 76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다. 12월 31일 장례식 이후 다마(多摩) 화장터에서 화장했고, 다음 해 1월 18일 가톨릭 기치조지(吉祥寺)교회에서 고별식을 거행했다. 그의 묘는 미타카시 다이세이사(大盛寺) 별원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세고에 겐사쿠(瀬越 (せごえ)憲作 (けんさく), 1889년 5월 22일~1972년 7월 27일)는 일본의 프로 바둑…세고에 겐사쿠(瀬越 (せごえ)憲作 (けんさく), 1889년 5월 22일~1972년 7월 27일)는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이다. 제자로는 오청원, 하시모토 우타로, 조훈현 등이 있다. 1946~48년에는 일본기원 이사장을 지냈고, 제자 조훈현이 병역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으로 귀국한지 넉 달 뒤인 1972년 7월에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했다.
어우양위첸(중국어 간체자: 欧阳予倩, 정체자: 歐陽予倩, 병음: Ōuyáng Yǔqiàn, 1889년 5월 12일~1962년…어우양위첸(중국어 간체자: 欧阳予倩, 정체자: 歐陽予倩, 병음: Ōuyáng Yǔqiàn, 1889년 5월 12일~1962년 9월 21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극작가다. 후난성 류양 시 출신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춘류사' 동인(同人)이다. 그는 경극 여역(女役)의 명우인 매란방과 함께 단 역(旦役)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텐한(田漢)의 '남국극사'에도 협력하는 한편, 광저우에 '광동희극연구소'를 설립, 많은 작품을 상연했다. 대표작 <충왕 이수성(忠王李秀成)> <도화선(桃花扇)> 등의 역사극이 있고, 만년에는 북경중앙희극학원 원장직을 맡고 일생동안 연극 교육에 헌신했다.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일본어: 鷹司信輔)는 일본의 조류학자이다. 별명은 새공작(鳥の公爵). 오섭가의 일문인 다카쓰카사가…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일본어: 鷹司信輔)는 일본의 조류학자이다. 별명은 새공작(鳥の公爵). 오섭가의 일문인 다카쓰카사가 제26대 당주. 다카쓰카사 히로미치 공작의 아들로서 도쿄시 고지마치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의 장녀 다카노미야 야스코이다.
구리타 다케오(일본어: 栗田健男, 1889년 4월 28일 ~ 1977년 12월 19일)는 일본의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다.…구리타 다케오(일본어: 栗田健男, 1889년 4월 28일 ~ 1977년 12월 19일)는 일본의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해군 중장. 해군병학교 38기생. 레이테만 전투에서 적의 수송선단을 눈 앞에 두고 공격함대를 회항시켜 유명해졌다.
야나기 무네요시(일본어: 柳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는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야나기 무네요시(일본어: 柳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는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학습원(學習院) 고등부에 재학할 때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를 만들었다. 1913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유럽 유학 후 귀국하여 1919년에서 1923년까지 도요 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있었다. '사라지는 한 조선 건축물에 대하여'를 1922년 《개조》(改造) 9월호에 발표하는 등의 논설 활동을 했고, 1924년 서울에 조선 민속 미술관을 세우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했다. 한국의 전통 미술 및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평론 및 수집을 하였다. 한국의 미를 설명하면서 한국 민족의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민예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대표적인 성과가 1936년 도쿄도 메구로구에서의 민예관 설립이다. 일제 강점기 광화문 철거 당시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타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표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쓰쓰미 야스지로(일본어: 堤康次郎, 1889년 3월 7일 ~ 1964년 4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일본…쓰쓰미 야스지로(일본어: 堤康次郎, 1889년 3월 7일 ~ 1964년 4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일본 시가현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세이부(西武) 그룹을 창업하였고, 제44대 중의원의장을 역임하였다. 시가 현 오쓰시의 명예시민이며, 정3위 훈1등이다.
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 1889년 3월 1일 ~ 1939년 2월 18일)는 일본의 저자, 시인, 불교 학자의 필명으로…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 1889년 3월 1일 ~ 1939년 2월 18일)는 일본의 저자, 시인, 불교 학자의 필명으로, 다이쇼와 초기 쇼와 시대를 지낸 인물이다.
와쓰지 데쓰로(和辻 哲郎, 1889년(메이지 22년) 3월 1일 - 1960년(쇼와 35년) 12월 26일)는 일본의…와쓰지 데쓰로(和辻 哲郎, 1889년(메이지 22년) 3월 1일 - 1960년(쇼와 35년) 12월 26일)는 일본의 철학자, 윤리학자, 문화사학자, 일본사상사학자이다. 『고사순례(古寺巡礼)』, 『풍토(風土)』 등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윤리학 체계는 와쓰지 윤리학이라고도 불린다. 호세이대학 교수, 교토제국대학 교수,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본 윤리학회 회원이자,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효고 현 출신이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여, 니체 등의 서양철학을 연구했다. 나라의 사찰 건축과 불상의 미를 재발견하여 『고사순례(古寺巡礼)』(1919년)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인간학으로서의 윤리학(人間の学としての倫理学)』(1934년)으로 새로운 윤리학의 체계를 구축했다. 『풍토(風土)』(1935년), 『얼굴과 페르소나(面とペルソナ)』(1937년)으로도 유명하다.
다니 마사유키(일본어: 谷 正之 타니 마사유키[*], 1889년 2월 9일 ~ 1962년 10월 16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다니 마사유키(일본어: 谷 正之 타니 마사유키[*], 1889년 2월 9일 ~ 1962년 10월 16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다.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과 정치학 학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아시아 국장, 만주국 대사관 참사관, 오스트리아 겸 헝가리 공사를 지냈다. 1939년 외무차관이 되었으며, 1942년 도조 내각에서 외무대신, 정보국 총재가 되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대사를 지냈으며, 전후 A급 전범 피지정자가 되었으나 불기소 되었고, 시게미쓰 마모루의 심복으로 활약하며, 시게미쓰가 부총리 및 외상을 맡았던 시절인 1956년 주 미국 대사를 지냈다.
이시바시 쇼지로(石橋 正二郎, 1889년 2월 1일 ~ 1976년 9월 11일)는 일본의 기업인으로, 타이어 회사…이시바시 쇼지로(石橋 正二郎, 1889년 2월 1일 ~ 1976년 9월 11일)는 일본의 기업인으로, 타이어 회사 브리지스톤의 창업주다. 1931년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서 타이어 제조업체인 브리지스톤을 창업하였다. 브리지스톤은 창업자인 이시바시(石橋)의 한자명을 본뜬 후, 한자를 거꾸로 배치하여 영어로 직역한 것이다. 일본어로 이시(石)는 "돌"을 뜻하고, 바시(橋)는 "다리"를 뜻한다. 쇼지로의 아들 간이치로는 자작 단 이노의 딸과 혼인하였다. 쇼지로의 딸 야스코는 이시바시에게 물려받은 거액의 상속 재산을 그녀 가족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녀는 전 일본의 외무대신 하토야마 이이치로와 결혼하였다. 그 둘 사이에는 이시바시 쇼지로에게는 손자가 되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하토야마 유키오는 일본의 총리가 되었고, 둘째 하토야마 구니오는 일본의 총무대신을 지냈다.
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1951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1951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 시대의 정치인이다. 호는 근촌(芹村)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생이며 미군정청 비상국민회의 예하 교통위원장·초대 대한민국 초선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일본 유학 중 1919년 신익희 등과 함께 일본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잠시 교육 활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 투신,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헌법기초를 담당하였다.
이시와라 간지(일본어: 石原 莞爾, 1889년 1월 18일 ~ 1949년 8월 15일)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활약한…이시와라 간지(일본어: 石原 莞爾, 1889년 1월 18일 ~ 1949년 8월 15일)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활약한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별명으로 "육군의 이단아"가 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 근무하였으며, 1918년 장교의 출세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로 있을 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와 함께 1931년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 정부나 육군, 심지어는 관동군 상부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일으킨 일이었다. 그 뒤 1936년 청년 장교 쿠테타인 2.26 사건 때에는 참모본부 제2작전과장으로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여 1941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태평양 전쟁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