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 유이치로(羽田雄一郎, 1967년 7월 29일 ~ 2020년 12월 2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나가노현: 11명
하타 유이치로(羽田雄一郎, 1967년 7월 29일 ~ 2020년 12월 2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다무라 도모코(田村 智子, 1965년 7월 4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노세 나오키(일본어: 猪瀨 直樹, 1946년 11월 20일 ~ )는 일본의 작가이자 정치인으로 전직 도쿄도지사이다.…
이노세 나오키(일본어: 猪瀨 直樹, 1946년 11월 20일 ~ )는 일본의 작가이자 정치인으로 전직 도쿄도지사이다. 이시하라 신타로의 사퇴로 실시된 도쿄도지사 보궐선거에서 2위 후보를 300만여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2013년 4월, 2020년 하계올림픽 유치경쟁국가인 터키를 종교에 빗대어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었으나 사과하였고 터키가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일단락되었지만, 2013년 12월 19일 비리의혹으로 자진사퇴하게 된다.
고사카 겐지(小坂 憲次, 1946년 3월 12일 ~ 2016년 10월 21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의 전…
고사카 겐지(小坂 憲次, 1946년 3월 12일 ~ 2016년 10월 21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의 전 중의원 의원이다. 제3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의 문부과학대신을 지냈다. 나가노현 출신으로, 1968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법률학 학과를 졸업하였다. 1968년 일본항공에 입사하였고, 1984년 일본 항공을 퇴사하고, 나가노시로 돌아가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비서를 지내고, 1990년 중의원 의원으로 첫 당선되어, 총 여섯 번 (1990년, 1993년, 1996년, 2000년, 2003년, 2005년) 당선되었다. 1999년 오부치 내각 제2차 개조내각의 우정 정무 차관, 2000년 모리 내각의 우정 총괄 정무 차관, 2001년 1월 초대 총무 부대신, 그 해 4월 고이즈미 내각의 총무 부대신이 되었다. 2002년 중의원 재무 금융 상임위원장, 2003년 중의원 의원 운영 위원회 필두 이사,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회 부위원장, 2004년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회 필두 부위원장, 2005년 제3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의 문부과학대신, 2006년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 필두 부회장, 2007년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회 필두 부위원장, 2008년 중의원 의원 운영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였다. 2010년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비례구로 당선되었다.
노자와 다이조(野沢 太三, 1933년 5월 6일 ~2024년 12월 12일)는 일본의 기술사·공학박사·정치인으로, 전 참의원…
노자와 다이조(野沢 太三, 1933년 5월 6일 ~2024년 12월 12일)는 일본의 기술사·공학박사·정치인으로, 전 참의원 의원이다.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 제2차 고이즈미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지냈으며, 현재 한일해저터널 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다쓰노정 출신으로, 도쿄 대학 공학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국유 철도에 입사해 오사카 철도 관리국 시설 부장, 나가노 철도 관리 국장, 본부 시설 국장을 지냈다. 1986년, 국회의원 선거 비례구에서 자유민주당 공인으로 출마해 첫 당선되었다. 당선 후 홋카이도 개발 정무차관을 시작으로, 참의원에서 외무 위원장, 결산 위원장을 지냈다. 2002년, 참의원 헌법 연구 회장이 되었고, 이후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법무장관이 되었다. 제2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참의원 의원 임기 만료 후인 2004년 9월, 법무대신에서 물러났다.
고사카 젠타로(일본어: 小坂 善太郎, 1912년 1월 23일 ~ 2000년 11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의…
고사카 젠타로(일본어: 小坂 善太郎, 1912년 1월 23일 ~ 2000년 11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의 중의원 의원으로, 외무대신, 노동대신,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냈다. 1912년, 나가노현 나가노시에서 태어나, 가쿠슈인을 거쳐, 1935년에 도쿄상과대학(지금의 히토쓰바시대학) 을 졸업하였다. 미쓰비시 은행(三菱銀行)과 신에쓰 화학공업 근무를 거쳐, 1946년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당시 나가노 1구에 입후보하여 첫 당선되었고, 이후 16번 당선되었다.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 노동대신을 지냈다. 1960년, 제1차 이케다 내각에서 외무대신이 되었고, 미국과 협조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와 함께 고도 경제성장에 의한 경제대국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케다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 후에는 경제기획청 장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외교 조사회장을 지냈다. 미키 개조내각에서는 외무대신이 되었으나, 직후 오히라 파벌에서 이탈하였다. 1982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국제 연합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12월,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낙선을 경험하였고,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국정에 복귀해,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 파벌에 속하였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고, 차남 겐지에게 지반(地盤)을 양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95년, 국제 연합 50주년 기념 국내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0년 11월 26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구라이시 다다오(일본어: 倉石 忠雄 (くらいし ただお), 1900년 7월 2일~1986년 11월 8일)는 14선 중의원…
구라이시 다다오(일본어: 倉石 忠雄 (くらいし ただお), 1900년 7월 2일~1986년 11월 8일)는 14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 1889년 11월 28일 ~ 1982년 6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9년 8월…
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 1889년 11월 28일 ~ 1982년 6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9년 8월 30일부터 1940년 1월 16일까지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대장대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대신을 지냈다. 사위 가토 이치로 (법학자)는 전 도쿄대학 총장이며, 손녀 고미야마 요코는 일본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오키는 1889년, 나가노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6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여러 직책을 거쳐 1934년, 이재국장이 되었으며, 가야 오키노리, 이시와타 소타로와 함께 대장성의 특출한 세 인물이라 불렸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요청에 따라 기획원에 창설에 참여해 차장에 취임하였고, 1939년, 총재 취임과 동시에, 귀족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 대장 대신 겸 기획원 총재로 첫 입각하였고, 왕징웨이 정권에의 특파 대사 고문으로서 난징에 부임해 경제 정책을 지도하였다. 1942년, 도조 내각에서 초대 대동아 대신에 임명되어, 대동아 회의 등의 시책을 전개하였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수용되었으나,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변호사로 일했으며,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에서 당선되어, 이후 네 차례 당선되었다. 1960년, 지바 사부로, 기무라 도쿠타로 등과 우파 집단 "소심회" (素心会)를 결성하여, 친 타이완파의 입장에서 일본과 중국 간의 국교 회복에 크게 반대하였다. 1968년, 나가노현 제2의 민간 방송 회사 나가노 방송이 설립되면서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아카이케 아쓰시(일본어: 赤池濃, 1879년 1월 27일 ~ 1945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아카이케 아쓰시(일본어: 赤池濃, 1879년 1월 27일 ~ 1945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아카이케 아쓰시는 1879년 1월 27일에 아카이케 나나에몬(赤池七右衛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제일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의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02년 7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었을 당시,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가 마련한 자리에서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던 오현주가 부인회의 비밀문건을 넘기는 대가로 오현주, 강낙원 부부와 그의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약속하며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후에 경시총감이 되어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함께 한국인 학살의 빌미가 되었던 한국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를 지시하였다. 일본 민족위원회(日本民族会)나 국제정치경제학회(国際政経学会) 등에서 반유대주의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
우에하라 에쓰지로(일본어: 植原 悦二郎 우에하라 에츠지로[*], 1877년 5월 15일 ~ 1962년 12월 2일)는 일본의…
우에하라 에쓰지로(일본어: 植原 悦二郎 우에하라 에츠지로[*], 1877년 5월 15일 ~ 1962년 12월 2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정치학자로, 국무대신과 내무대신을 지냈다. 1877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나, 1899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싱턴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귀국 후, 메이지 대학, 릿쿄 대학 교수, 도쿄고등공업학교 (지금의 도쿄 공업대학) 강사를 지냈으며, 정치학과 비교헌법론을 강의하였다. 그는 요시노 사쿠조(植原悦二郎)의 민본주의 (民本主義) 에 대하여, 일본 천황에게 통치권은 있지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론을 주장하는 등, 급진적인 다이쇼 민주주의자로서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이누카이 쓰요시의 요청으로 총선거에 입헌국민당 (立憲国民党) 공인으로 구 나가노 현 전체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고, 이후 13번 당선되었다. 보통선거법 실현에 힘쓰면서, 이누카이를 따라 혁신구락부 (革新倶楽部)에서 입헌정우회 (立憲政友会) 로 소속을 옮겼다.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체신참여관, 1926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외무참여관이 되었고,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중의원의 부의장을 지냈다. 1940년 결성된 관제 국민조직 대정익찬회 (大政翼贊會) 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1942년 익찬선거 (翼賛選挙)에서 낙선하였다. 전후 하토야마 이치로, 아시다 히토시, 안도 마사즈미 (安藤正純) 등과 일본 자유당 결성에 참가하였다. 1945년,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국무대신이 되었고, 개조 (改造) 후에는 내무대신이 되었다. 1962년, 사망하였다.
와타나베 구니타케(일본어: 渡邊 國武 와타나베 쿠니타케[*], 1846년 3월 29일 ~ 1919년 5월 11일)는 일본의…
와타나베 구니타케(일본어: 渡邊 國武 와타나베 쿠니타케[*], 1846년 3월 29일 ~ 1919년 5월 11일)는 일본의 관료이다. 작위는 자작. 본성은 고이케(小池). 제2차 이토 내각의 대장 대신, 체신 대신, 그리고 제4차 이토 내각의 대장 대신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