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하라 쇼코(일본어: 麻原 彰晃, 본명: 마쓰모토 지즈오·松本 智津夫, 1955년 3월 2일 ~ 2018년 7월 6일)는…
아사하라 쇼코(일본어: 麻原 彰晃, 본명: 마쓰모토 지즈오·松本 智津夫, 1955년 3월 2일 ~ 2018년 7월 6일)는 일본의 종교가, 테러리스트, 연쇄살인범이다.
구마모토현: 5명
아사하라 쇼코(일본어: 麻原 彰晃, 본명: 마쓰모토 지즈오·松本 智津夫, 1955년 3월 2일 ~ 2018년 7월 6일)는…
아사하라 쇼코(일본어: 麻原 彰晃, 본명: 마쓰모토 지즈오·松本 智津夫, 1955년 3월 2일 ~ 2018년 7월 6일)는 일본의 종교가, 테러리스트, 연쇄살인범이다.
오카모토 고조(일본어: 岡本 公三 (おかもと こうぞう): 1947년 12월 7일 ~ 2026년 7월 23일)는 일본 신좌파…
오카모토 고조(일본어: 岡本 公三 (おかもと こうぞう): 1947년 12월 7일 ~ 2026년 7월 23일)는 일본 신좌파 정파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출신 활동가, 테러리스트다. 로드 공항 사건의 실행범 가운데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적군 멤버로 취급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적군 성립 이전의 멤버였다. 이스라엘에서 석방된 후 레바논으로 망명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일본 경찰은 그를 국제수배 중이다. 요도 호 그룹의 오카모토 다케시의 동생이다.
다카미 게이시(일본어: 高 (たか)見 (み) 圭 (けい)司 (し): 1932년 1월 23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활동가다.…
다카미 게이시(일본어: 高 (たか)見 (み) 圭 (けい)司 (し): 1932년 1월 23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활동가다. 일본사회당 청년대책부장 출신으로, 사청동 해방파 간부였다. 혁노협 분열 이후 해방파 전협에 참여했다. 현재는 스페이스 21의 중심적 존재다. 1932년 구마모토현 구마군 다라기정에서 태어났다. 1950년 구마모토현립 히토요시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고 웅변회에 입부했다(2학년 때 퇴부). 마츠나가 히카루가 동기였다. 와세다 재학 중에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만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사회당에 입당한다. 1955년 와세다대학 제1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사회당 분쿄지부 서기가 된다. 동년 10월에는 마츠마에 시게요시 의원비서가 되었다. 1957년 사회당 중앙본부 청년부 부부장에 취임, 당내에서 에다파에 속했으며, 그 안의 비공개 계파 "타카미파"를 만들었다. 1960년 사회당 제2차 방중사절단으로 아사누마를 수행하여 중공을 방문한다. 우호적으로 생각했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목격하고 그 소감을 남겼다. 1962년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 제3회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었다. 1964년 사청동 제4회 대회에서 협회파・해방파 공동제안의 수정동의가 가결되어 집행부가 총사퇴, 타카미도 서기장에서 물러난다. 1965년 반전청년위원회 전국사무국원이 되었고, 좌경화하여 해방파와 밀접해졌다. 1967년 사회당 청년대책부장에 취임했으나 1970년 제33회 사회당대회에서 청년대책본부장에서 해임되었다. 반전청년위원회 활동이 사회주의협회의 비판을 받고 동년 10월 사회당에서 제명당한다. 1971년 제9회 참의원의원 통상선거 전국구에 출마, 13만 5620표를 획득하고 52위로 낙선했다. 출마 당시 무소속이었지만 "70년대 전선"을 소속으로 칭했고, 아라하타 칸손・오다 마코토・하니 고로・토무라 잇사쿠 등이 이 "전선"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선거 포스터 슬로건은 “제2, 제3의 산리즈카를! 의회에 게릴라를!”이었다. 1972년 신산별운전자노동조합(신운전)에 가맹했다. 1981년 사청동 해방파가 분열하자 혁명적노동자당 건설을 노리는 해방파 전국협의회(해방파 전협, 연대사, 노대파)에 참여했다. 1990년 스페이스 90에 참여했다. 현재 스페이스 90을 스페이스 21로 개칭하고 해방파 전협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신운전에서는 비주류에 속하며, 주류 집행부와 조합 운영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송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산리즈카 투쟁에도 결합하여 2017년에도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 구 아츠타파 활동에 스페이스 21 소속으로 참가하고 있다.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카마타 사토시・카와이 히로유키・세토우치 쟈쿠쵸・유카와 레이코 등과 함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지지했다.
다케나카 에이타로(일본어: 竹中 英太郎 (たけなか えいたろう): 1906년 12월 19일 - 1988년 4월 8일)는 일본의…
다케나카 에이타로(일본어: 竹中 英太郎 (たけなか えいたろう): 1906년 12월 19일 - 1988년 4월 8일)는 일본의 삽화가, 노동운동가, 실업가다. 신좌파 활동가이자 문예평론가인 다케나카 로가 그의 장남이다. 차녀 카네코 무라사키(金子紫)는 “다케나카 에이타로 기념관” 관장이다. 후쿠오카시 우에나지마(현재의 후쿠오카시 중앙구 다이묘)의 몰락 사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 로에 따르면 심장역위증으로 심장이 오른쪽, 십이지장이 왼쪽에 있는 희귀신체의 소유자였다고 하는데, 차녀 무라사키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1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극빈 속에서 자랐다. 11세 때 구마모토로 이주, 구마모토중학교 야간부에서 배우면서 경찰의 급사(給仕)로 고학을 했다. 이 때 입수한 사회주의 관련 문건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24년 4월, 구마모토무산자동맹 설립에 동참했다. 그 밖에 피차별부락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마모토수평사 창립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는데, 스즈키 요시아키에 따르면 확실하게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며, “구마모토무산자동맹 등을 통해 측면에서 구마모토수평사의 활동에 협력한” 정도로 생각된다. 다케나카와 함께 구마모토무산자동맹을 결성한 이와노 타케시(岩野猛)・이와오 이에야다(岩尾家貞)는 모두 구마모토수평사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1924년 가을, 혁명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상경, 제1외국어학교 영문과 및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를 버는 수단으로 삽화나 제본 일을 시작하면서 삽화가가 되었고, 요코미조 세이시가 편집장으로 있던 『신청년』지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음수」의 삽화를 담당했다. 이후 『신청년』을 중심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코가 사부로・오오시타 우다루・유메노 큐사쿠 등의 소설에 삽화 작품을 실었다. 1936년 2·26 사건을 계기로 붓을 꺾고 단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월간 만주』, 『어린이 만주』의 편집에 종사했으나, 일본으로 송환되어 도쿄 시나가와에서 철공소를 경영했다. 1942년, 전쟁통에 후처 츠네코(つね子)의 고향 고후로 소개(疎開)했다. 1944년 야마나시일일신문에 입사해서 신문기자가 된다. 전후에는 야마나시일일신문 노조위원장, 일본신문노련 부위원장, 지노위 노동자측위원, 야마나시일일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현의원 보궐선거에도 입후보해 보았으나 낙선했다. 또 테레비 야마나시의 『일요방담』에 고정출연했다. 전후에는 이와타 센타로・츠보이 시게지 등이 화단으로 복귀하라고 권유했으나 고사하고 취미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1967년 장남 로의 부탁으로 『기온마츠리』 선전 팜플렛용 작품을 제작했고, 1974년 로의 프로모트로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방일했을 때 소묘와 영화 스틸컷을 콜라주한 포스터를 제작했다. 디트리히는 호텔방에 장식된 그 작품들이 마음에 들어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한다. 만년에는 장녀와 손자를 위해 서비스회사 “중부문교(中部文教)”를 설립했다. 1988년 도쿄 신주쿠 노상에서 허혈성 심부전 발작을 일으켜 급사했다. 향년 82세.
미야자키 토라조(일본어: 宮 (みや)崎 (ざき) 寅 (とら)蔵 (ぞう): 1871년 1월 23일(메이지 3년 음력 12월…
미야자키 토라조(일본어: 宮 (みや)崎 (ざき) 寅 (とら)蔵 (ぞう): 1871년 1월 23일(메이지 3년 음력 12월 3일 ~ 1922년(다이쇼 11년) 12월 6일)는 일본에서 쑨원의 신해혁명을 지원한 혁명가, 로쿄쿠시이다. 서양의 침략을 받고 있는 아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문명의 중심인 중국의 독립과 중국 민중의 자유가 선결되어야 하며, 그것이 세계평화로 이어진다는 신념 아래 대륙낭인으로 활동했다. 호는 도텐(일본어: 滔 (とう)天 (てん))으로 본명보다 많이 불린다. 로쿄쿠시로서 이름은 도추켄 우시에몬(일본어: 桃 (とう)中 (ちゅう)軒 (けん) 牛 (う)右 (し)衛 (え)門 (もん))이다. 도추켄 구모에몬의 대본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