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타니 겐은 일본의 제27대 방위대신이다. 다음인 제28대는 고이즈미 신지로.
고치현: 7명
나카타니 겐은 일본의 제27대 방위대신이다. 다음인 제28대는 고이즈미 신지로.
야마모토 유지(일본어: 山本有二, 1952년 5월 11일 ~ )는 일본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재무 부대신…
야마모토 유지(일본어: 山本有二, 1952년 5월 11일 ~ )는 일본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재무 부대신, 금융담당대신, 농림수산대신을 지냈다. 2016년 8월 제3차 아베 신조 내각 (제2차 개조)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내정되었다. 이번 내각에서 같은 성을 가진 야마모토 고이치 환경대신, 야마모토 고조 지방창생대신과 함께 '야마모토 트리오'로 불린다.
호소카와 리쓰오(일본어: 細川律夫, 1943년 8월 8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소속 정당은…
호소카와 리쓰오(일본어: 細川律夫, 1943년 8월 8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소속 정당은 민주당이었다. 중의원에서 환경위원장, 행정감시위원장을 지냈으며, 후생노동부대신을 맡다가 간 내각에서 후생노동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마구치 오사치(일본어: 濱口 雄幸, 1870년 5월 1일 ~ 1931년 8월 2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자 제27대…
하마구치 오사치(일본어: 濱口 雄幸, 1870년 5월 1일 ~ 1931년 8월 2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자 제27대 내각총리대신이다. 1895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 후 입헌민정당 총재가 되어 1929년 7월에 일본의 총리가 되는데 성공하나, 그가 총리에 오른 때에는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시기로 일본에도 큰 위기가 닥친 때였다. 경제대공황의 영향으로 불경기가 시작된 일본에서는 829개나 되는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속출했으며, 주식이 폭락하여 투자자가 자살하는 등의 큰 경제 위기가 닥쳤다.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워져서, 요리사 조수를 선발하는데 수십 명이 몰릴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만주 침략 반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우파 장교들은 불만을 품었다.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후, 1년 뒤 사망하였다.
다케우치 메이타로(일본어: 竹内明太郎, 1860년 3월 20일(만엔 원년 2월 28일) ~ 1928년 3월 23일)는 일본의…
다케우치 메이타로(일본어: 竹内明太郎, 1860년 3월 20일(만엔 원년 2월 28일) ~ 1928년 3월 23일)는 일본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고마쓰 제작소와 가라쓰철공소(唐津鉄工所, 현 가라쓰프레시전)의 창업자이며, 닛산자동차의 전신인 가이신샤(快進社) 설립에 출자했다. 와세다 대학 이공과 창설을 지원하고 사립 고치공업학교(현 고치현립 고치공업고등학교)를 세우는 등 공업 교육에도 관여했다. 뒷날 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의 친형이다.
고토 쇼지로(일본어: 後藤 象二郎 ごとう しょうじろう[*], 덴포 9년 음력 3월 19일(1838년 4월 13일) ~ 메이지…
고토 쇼지로(일본어: 後藤 象二郎 ごとう しょうじろう[*], 덴포 9년 음력 3월 19일(1838년 4월 13일) ~ 메이지 30년(1897년) 8월 4일)는 막말의 도사 번사이다. 메이지 시대에는 정치인 겸 기업인이다. 고치성 출신으로 고모부이자 양부인 요시다 도요와 함께 야마우치 요도의 번정 개혁을 뒷받침했다. 도요의 암살 후 존왕양이파들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도사 번 참정자리에 복귀한 그는 도사상회를 설립해 번의 근대화를 꾀했으며, 사카모토 료마가 제출한 선중팔책을 요도 공에게 올려 대정봉환을 이룩하는 등 메이지 유신에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귀족 관위 정2위 백작에 올랐다. 메이지 신정부 때는 미쓰비시 그룹 총수 이와사키 야타로와 함께 구채권을 매점해 큰 돈을 벌기도 했다. 이후 자유당과 진보당을 결성하는 등 메이지 시대의 자유민권운동을 이끌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사사키 다카유키와 함께 도사 3걸의 하나로 꼽히나, 미쓰비시 그룹과 부당 내부 거래, 뇌물수수 사건 등 정경유착의 부도덕성으로 오명을 썼다. 아명은 호야타(保弥太) 혹은 료스케(良輔). 휘는 마사모토(正本)에서 모토하루(元曄)로 변경했고, 자는 모토하루(日曄), 조야(暢谷), 후토오(不倒翁) 등이며, 아호는 조야(暘谷), 운주(雲濤), 고카이(光海), 오코(鷗公) 등이다.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高行)는 에도 시대 말기의 도사 번사이며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다. 작위는 후작(백작에서 승작).…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高行)는 에도 시대 말기의 도사 번사이며 일본 제국의 정치인이다. 작위는 후작(백작에서 승작). 후작으로 승작되기 전엔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와 함께 도사 3백(土佐三伯)으로 불렸다. 일부 책에는 사사키 다카유키(佐佐木高行)로 적히기도 한다. 아명은 만노스케(萬之助). 통칭은 산시로(三四郞). 원복 후 첫 이름은 다카아쓰(高喜), 다카노리(高春) 등으로 불리며 나중에 지금의 다카유키로 개명하였다. 번사(상사)와 향사(하사)간의 신분이 확실했던 도사 번에서 사사키 다카유키는 같은 상사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마찬가지로 하사들(사카모토 료마 등)에 관대함으로 유명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하였다. 원로원 부의장(元老院副議長)을 거쳐 1881년 공부경(工部卿)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 시절 고위 공직자 중에서도 보수파를 대표하는 한명이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얻어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의 제왕학 교육을 담당하였다. 한편 메이지 시대의 정치 체제를 둘러싸고 이토 히로부미 등과 대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