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신지로(일본어: 小泉 進次郎, 1981년 4월 14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으로…고이즈미 신지로(일본어: 小泉 進次郎, 1981년 4월 14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으로 2025년 10월부터 방위대신으로 재임하고 있다. 2025년 5월부터 10월까지 농림수산대신, 2019년 9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제27·28대 환경대신을 지냈다. 전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로, 탤런트인 고이즈미 코타로의 동생이다. 간토 가쿠인 대학,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비서로 일했다.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고노 다로(일본어: 河野太郎, 1963년 1월 10일 ~ )는 일본의 정치인 가문,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고노 다로(일본어: 河野太郎, 1963년 1월 10일 ~ )는 일본의 정치인 가문,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9선)이며 제150·151대 외무대신과 제20대 방위대신을 지냈으며 행정개혁 담당대신을 역임했고 현재는 자유민주당의 홍보본부장을 맡고 있다. 조부는 부총리, 건설대신, 농림대신 등을 지낸 고노 이치로이고 부친은 외무대신, 부총리 등을 지낸 고노 요헤이이며 종조부는 중의원 및 참의원 의원을 지낸 고노 겐조이다.
이시하라 노부테루(일본어: 石原伸晃, 1957년 4월 19일 ~)는 일본의 전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이시하라 노부테루(일본어: 石原伸晃, 1957년 4월 19일 ~)는 일본의 전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10선)의원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전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이며, 동생 요시즈미(良純), 요시타카(宏高), 노부히로(延啓)도 일본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쓰모토 준(일본어: 松本純, 1950년 4월 11일 ~ 2026년 3월 19일)은 일본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이다.…마쓰모토 준(일본어: 松本純, 1950년 4월 11일 ~ 2026년 3월 19일)은 일본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2016년 8월 제3차 아베 신조 내각 (제2차 개조)에서 방위상으로 내정되었다.
아마리 아키라(일본어: 甘利 明, 1949년 8월 27일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아마리 아키라(일본어: 甘利 明, 1949년 8월 27일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13선)이다. 지역구는 가나가와현 제13구이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경제산업대신이었던 그는 아소 다로 내각에서 규제개혁을 담당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을 지내기도 하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일본어: 小泉 純一郎, 1942년 1월 8일~)는 일본의 정치가이다. 중의원 의원(12선)과…고이즈미 준이치로(일본어: 小泉 純一郎, 1942년 1월 8일~)는 일본의 정치가이다. 중의원 의원(12선)과 내각총리대신(제87·88·89대), 우정대신(제56대)과 후생대신(제73·74·86대), 자유민주당 총재(제20대)를 지냈으며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두번 째로 긴 장기 집권기간 (1,980일)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그의 첫 임무인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온전한 한일 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대한민국의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 내각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또한 고이즈미의 노선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등 200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퇴임 후 수년간 대중 앞에 나서지 않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13년 후쿠시마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포기 옹호론자로 복귀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 임기 중과 이후 모두 포함해서 자민당이 지지해 왔던 친 원자력 발전과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3대에 걸친 정치인 집안 출신이다. 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몸에 큰 문신을 하고 다녀 "문신 장관"이라고도 불렸는데, 하마구치 총리와 와카쓰키 총리 내각에서 우정성 장관을 지냈으며 우편 민영화의 초기 옹호자였다. 부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는 방위청 장관도 역임했다.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는 배우로 활동 중이며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2009년 7월 21일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준이치로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출마, 당선되었다.
스즈키 쓰네오(일본어: 鈴木 恒夫 스즈키 츠네오[*], 1941년 2월 10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민당 소속의 전…스즈키 쓰네오(일본어: 鈴木 恒夫 스즈키 츠네오[*], 1941년 2월 10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민당 소속의 전 중의원 의원이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 개조내각에서 문부과학대신을 지냈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제1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마이니치 신문 도쿄 본사에 들어가 정치부 기자로 15년간 일했으며, 1977년 중의원 의원 고노 요헤이(당시 신자유클럽 대표)의 비서가 되었다. 1983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가나가와 1구에 처음으로 입후보 했으나 낙선하였고, 같은 해 자치대신 다카와 세이이치의 대신 비서관이 되었다. 1986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두 번째 입후보로 출마해 첫 당선되었고, 총 여섯 번(1986년, 1990년, 1996년, 2000년, 2003년, 2005년)에 당선되었다. 당선된 해에 신자유클럽이 해산되자 자민당에 들어갔으며, 1992년 문부정무차관부터 2007년 중의원 재해 대책 특별위원회원장까지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다. 2007년 10월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 은퇴를 표명했으며, 자민당의 스즈키 게이스케가 지반(地盤)을 계승하였다. 2008년 8월 후쿠다 다케오 개조 개조내각의 문부과학대신에 임명되었지만 후쿠다 개조내각이 2개월도 못 가는 바람에 그 해 9월, 문부과학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2009년 7월, 중의원 해산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케다 모토히사(池田 元久, 1940년 12월 20일 ~ 2024년 1월 22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6기).…이케다 모토히사(池田 元久, 1940년 12월 20일 ~ 2024년 1월 22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6기). 일본사회당출신 민주당의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일본어: 小此木 彦三郎 (おこのぎ ひこさぶろう), 1928년 1월 26일~1991년 11월 4일)는 8선…오코노기 히코사부로(일본어: 小此木 彦三郎 (おこのぎ ひこさぶろう), 1928년 1월 26일~1991년 11월 4일)는 8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아스카타 이치오(일본어: 飛鳥田 一雄, 1915년 4월 2일~1990년 10월 11일)는 4선 요코하마시장과 6선 중의원…아스카타 이치오(일본어: 飛鳥田 一雄, 1915년 4월 2일~1990년 10월 11일)는 4선 요코하마시장과 6선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사쿠라우치 요시오(일본어: 櫻内義雄, 1912년 5월 8일 ~ 2003년 7월 5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스즈키 젠코…사쿠라우치 요시오(일본어: 櫻内義雄, 1912년 5월 8일 ~ 2003년 7월 5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1981년 11월 30일부터 1982년 11월 27일까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버지 사쿠라우치 유키오(櫻内幸雄)는 농림대신과 대장대신을, 형 사쿠라우치 기미오(櫻内乾雄)는 주고쿠 전력(中国電力)의 회장을 지냈다.
고노 겐조(일본어: 河野 謙三 (こうの けんぞう), 1901년 5월 14일~1983년 10월 16일)는 5선 참의원 의원을…고노 겐조(일본어: 河野 謙三 (こうの けんぞう), 1901년 5월 14일~1983년 10월 16일)는 5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오카자키 가쓰오(일본어: 岡崎 勝男 오카자키 카츠오[*], 1897년 7월 10일 ~ 1965년 10월 10일)는 일본의…오카자키 가쓰오(일본어: 岡崎 勝男 오카자키 카츠오[*], 1897년 7월 10일 ~ 1965년 10월 10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전 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이며, 제2차 세계 대전 후 요시다 시게루에 의해 추진된 대미 협조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시 출신으로, 1922년에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파리에서 근무 중이었던 1924년, 파리 올림픽 (1924년 5월 4일 ~ 1924년 7월 27일) 에 참가해, 남자 육상 5,000m에서 15.22.2e의 기록을 냈다. 그는 일본제국 육군의 난징 함락과 난징대학살 이후, 난징의 총영사를 지냈으며, 이오섬에서 일본 사절단과 미국 군사 당국 사이의 항복 협상 초반부에 참여하였다. 전후,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함께 1945년 9월,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가하였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외무대신을 지냈으며, 1954년에 상호 방위 원조 (Mutual Security Assistance, MSA) 협정에 미국 대사 존 앨리슨 (John Moore Allison) 과 서명하였다. 오카자키는 일본 및 미국의 피겨 스케이트 선수 이나 교코 (伊奈 恭子)의 할아버지이다.
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 14일-1981년(쇼와 56년) 3월 6일)은 일본의 노동운동가다. 사회주의자에서 시작해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끝에 전후 일본사회당에서 의원을 지냈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이라쿠정의 요코하마 유곽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요코하마시 노바(野庭, 현재의 고난구)에서 보냈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외국인상관의 보-이로 일하다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근무하던 가운데 『만조보』에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가 쓴 반전시, 퇴사의 변을 보고 감동하의 노동운동에 투신, 코토쿠와 사카이가 발행한 주간지 『평민신문』의 비전론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자가 된다. 이후 사카이의 주선으로 와카야마현 무로군의 『무로신보』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1904년 『평민신문』 편집주간으로 참여했다. 『평민신문』에서 6살 연상의 칸노 스가와 내연관계가 되어 1907년 결혼했다. 이 때 사회주의 전도 과정에서 타나카 쇼조를 알게 되어 아시오 광독사건을 소재로 「야나카촌 멸망사」를 저술했다. 1908년 적기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금고 1년에 처해진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 스가가 코토쿠와 불륜관계가 되었다. 코토쿠는 모로오카 치요코와 이혼했고, 스가도 일방적으로 옥중의 아라하타에게 이혼장을 보냈다. 분노한 아라하타는 2년 뒤 출옥하여 권총으로 스가를 죽이려 했다가 단념하고 대신 카츠라 타로 총리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한편 스가 및 코토쿠와 소원해진 때문에 이후 코토쿠 대역사건에서 검거 및 처형을 면했다. 코토쿠와 스가는 불륜 사건으로 동료들에게 백안시되었기 때문에 아라하타 외에도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연좌를 면했다. 출옥 후 사카이가 설립한 매문사에 참여, 야마카와 히토시, 타카바타케 모토유키 등과 함께 꾸준히 체제변혁을 도모했다. 1912년에는 오스기 사카에와 『근대사상』을 창간했다. 하지만 생디칼리슴을 주장한 오스기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아라하타의 대립이 가시화된 끝에 둘은 결별했다. 아라하타는 관서 지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0년 일본사회주의동맹, 1922년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에 각각 참여했다. 그러나 1923년 제1차 일본공산당 사건으로 사카이 토시히코와 함께 검거되었고, 제1차 일공당은 아라하타의 유일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아라하타는 잔무 처리를 위한 뷰로에 참여하여 당재건을 목표로 했지만 뷰로 내에서 후쿠모토 카즈오의 이론이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당재건 활동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후쿠모토이즘에 의문을 제기한 아라하타는 후쿠모토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있던 젊은 활동가들에게 격렬하게 비방을 받았다. 이후 일공당은 후쿠모토이즘에 따라 제2차 일본공산당으로 재건되지만, 아라하타는 제1차 일공당 해산에 찬성했던 사노 마나부, 토쿠다 큐이치가 재건 중심세력이 된 것에 분노하여 애제자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일공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27년 야마카와 히토시, 이노마타 츠나오 등과 함께 『노농』을 창간, 노농파의 중심 멤버로서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향도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반파시스트 운동을 주도한 일본무산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1937년 인민전선 사건으로 야마카와, 카토 칸쥬 등 400여명과 함께 투옥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살이를 한다. 전후 전금동맹 위원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중의원 의원을 2기(중선거구 도쿄 제4구) 맡지만, 1948년 일사당을 탈당했다. 1949년 1월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주의정당결성추진협의회(소위 간손 신당)을 모체로 무소속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관동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뒤로는 정치에서 물러나 평론활동에 전념했다. 1950년 12월 소련에 대한 평가를 놓고 코보리 진지와 야마카와 히토시·사키사카 이츠로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아라하타는 코보리의 주장에 찬동하지는 않았지만 코보리가 간손 신당의 실무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코보리의 편을 들어 1951년 결성된 사회주의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소련파 경향을 선명하게 한 사키사카의 사회주의협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신좌파 운동이 흥기할 때 일시적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지만 내부 게발트 등 막장짓에 실망하여 다시 문필활동에만 전념했다.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의 토무라 잇사쿠가 출마했을 때 오다 마코토 등이 ‘산리즈카 투쟁과 토무라 잇사쿠씨에 연대하는 회’를 만들자 거기 참가했다. 1981년 3월 6일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타마가와 병원에서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오자키 유키오(일본어: 尾崎 行雄, 1858년 11월 20일 ~ 1954년 10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자이다.…오자키 유키오(일본어: 尾崎 行雄, 1858년 11월 20일 ~ 1954년 10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자이다. 일본에선 "헌정의 신" (憲政の神様), "의회 정치의 아버지" (議会政治の父) 로 불리며, 1889년부터 1952년까지 중의원 의원에 모두 25번이나 당선되어, 총 63년 동안 국회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칭호는 중의원 명예 의원과 도쿄 도 명예 도민이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영어공용어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딸 소마 유키카(相馬雪香)는 평화 운동가이며 나카무라 소마 자작가의 마지막 자작부인이었다. 사위는 소마 야스타네(相馬恵胤) 자작이다.
마키시마 가렌(牧島 かれん, 1976년 11월 1일~)는 일본의 정치인, 정치과학자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4선)…마키시마 가렌(牧島 かれん, 1976년 11월 1일~)는 일본의 정치인, 정치과학자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4선) 의원으로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서 초대와 2대 디지털대신을 맡고 있다. 지역구는 가나가와현 제17구이다.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출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