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이 마사유키(Masayuki Imai, 1961년 4월 21일 ~ 2015년 5월 28일)는 일본의 배우, 각본가…
이마이 마사유키(Masayuki Imai, 1961년 4월 21일 ~ 2015년 5월 28일)는 일본의 배우, 각본가, 연출가, 탤런트, 텔레비전 배우이다. 고토구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대장암이다.
효고현: 8명
이마이 마사유키(Masayuki Imai, 1961년 4월 21일 ~ 2015년 5월 28일)는 일본의 배우, 각본가…
이마이 마사유키(Masayuki Imai, 1961년 4월 21일 ~ 2015년 5월 28일)는 일본의 배우, 각본가, 연출가, 탤런트, 텔레비전 배우이다. 고토구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대장암이다.
히구치 기이치로(일본어: 樋口 季一郎, 1888년 8월 20일 ~ 1970년 10월 11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히구치 기이치로(일본어: 樋口 季一郎, 1888년 8월 20일 ~ 1970년 10월 11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중장이며, 보직은 제5방면 군사령관 겸 북부군관구사령관이었다. 이스라엘 건국공로자로 인정받았다. 일본 효고현 미나미아와지시에서 5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가 그를 맡게 되었다. 18살 때는 기후현 오가키시의 히구치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거쳐 장교가 되고 나서는 주로 만주와 러시아쪽 부서에서 근무하였다. 하얼빈 특무기관장(소장)으로 재직했던 1938년에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을 부하인 대좌(한국군의 대령에 해당)와 함께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이들이 만주국과 상하이 조계지로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오토볼 사건). 이 일 덕분에 나중에 유대인들이 로비를 벌여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뒤에 부하 야스에 노리히로와 더불어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로서 <황금의 비>에 그 이름이 새겨졌으며 이스라엘 정부가 그 공적을 치하했다.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郎)와 함께 사쿠라카이(일본군부의 극우비밀결사조직)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나, 의견 차이로 다투고 나서 서로 갈라섰다. 또 2.26사건을 일으킨 청년장교와도 각별한 사이로 무력에 의한 실력행사를 조장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이자와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사건 당사자인 아이자와 사부로의 직속상관이었다.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인도적 차원에서 유대인을 도운 공적은 인정받았으나, 옛 일본군부 우익강경파로, 그 평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할 수 있으며, 공과론으로 대표되는 긍정론과 두 얼굴의 제국주의자로 대표되는 부정론이 있다.
이소가이 렌스케(일본어: 磯谷 廉介, 1886년 9월 3일 ~ 1967년 6월 6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태평양 전쟁…
이소가이 렌스케(일본어: 磯谷 廉介, 1886년 9월 3일 ~ 1967년 6월 6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홍콩 점령지 총독을 지냈다.
고모토 다이사쿠(일본어: 河本 大作, 1883년 1월 24일 ~ 1955년 8월 25일)는 관동군 참모로 이른바 황고둔…
고모토 다이사쿠(일본어: 河本 大作, 1883년 1월 24일 ~ 1955년 8월 25일)는 관동군 참모로 이른바 황고둔 사건(皇姑屯事件)의 주역이다.
안도 기사부로(일본어: 安藤紀三郎, あんどう きさぶろう, 1879년 2월 11일 ~ 1954년 5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안도 기사부로(일본어: 安藤紀三郎, あんどう きさぶろう, 1879년 2월 11일 ~ 1954년 5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관료이다. 최종계급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 태평양 전쟁 당시에 대정익찬회 (大政翼賛会) 부총재, 국무대신, 내무대신을 지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안도는 효고현에서 태어나, 189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육군 보병 소위, 1901년 타이완 수비 보병 제10대대부 (守備歩兵第10大隊附), 육군 보병 중위, 1904년 보병 제10연대 중대장, 육군 보병 대위, 육군 보병 소좌를 거쳐 1918년 미국 출장 후 육군 보병 중령이 되어 귀국하였다. 1922년 육군 보병 대령, 1927년 육군 소장이 되었으며, 1932년 육군 중장이 되어 뤼순 요새 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예비역이 되었다. 1941년에는 대정익찬회 (大政翼賛会) 부총재, 그 다음 해에는 대일본익찬장년단장 (大日本翼賛壮年団長) 이 되었다. 1942년 도조 히데키의 심복으로서 도조 내각의 무임소 국무 대신 (無任所国務大臣) 이 되었고, 이어서 대일본익찬장년단의 중앙본부장이 되었다. 1943년 도조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으며, 1944년 대신 직에서 물러나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45년 제3차 전범 지명으로 A급 전범으로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48년 석방되었다.
혼조 시게루(일본어: 本庄 繁, 1876년 5월 10일 ~ 1945년 11월 30일)는 일본 제국의 일본 제국 육군 군인…
혼조 시게루(일본어: 本庄 繁, 1876년 5월 10일 ~ 1945년 11월 30일)는 일본 제국의 일본 제국 육군 군인, 화족이다. 작위는 남작. 일본 제국 육군 제10사단장·관동군 사령관·시종무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일 전쟁 당시에는 육군 대장이었다. 1896년 9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97년 11월에 졸업, 1898년 6월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보병 제4여단장, 육군 무관, 제10사단장을 거쳐 1931년 8월에 관동군 사령관과 군사참의관에 차례로 올라 만주사변의 정점에 섰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1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서 체포령이 내려졌고, 11월 30일 할복으로 자살했다.
혼고 후사타로(本郷房太郎)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인이다. 군사참의원, 칭다오 수비군사령관, 제1·제17사단장을 역임하였다.…
혼고 후사타로(本郷房太郎)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인이다. 군사참의원, 칭다오 수비군사령관, 제1·제17사단장을 역임하였다. 계급은 육군 대장 정2위 훈1등 공3급. 단바 사사야마번사·검술사범 혼고 간노스케(本郷貫之助)의 장남이며 정치인 고노 다로의 외외증조부이다.
오니시 다키지로(일본어: 大西 瀧治郎, 1891년 6월 2일- 1945년 8월 16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일본의…
오니시 다키지로(일본어: 大西 瀧治郎, 1891년 6월 2일- 1945년 8월 16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일본의 해군 군인이다. 그는 전황이 악화되자 자살공격을 제안하여 '신풍 특공대의 아버지'(特攻生みの親)라고 불린다. 효고현 단바시 출신으로, 1912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함정 승조원 생활을 하다가 해군 항공대의 조직자로 선발되어, 1918년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되어 좀 더 심화된 교육을 받았다. 일본에 돌아와서 요코스카 항공대에 교관이 되었고, 이후 가스미가우라 해군항공대에 파견되었다. 소좌 시절에 항공모함 호쇼의 비행대장이 되고, 1939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일본해군 제11 비행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성에서 비행기의 기술적 문제를 담당하였다. 오니시 개인적으로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진주만 공격을 반대했다고 한다. 1943년 그는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1944년 제1 항공함대의 사령관이 되어 필리핀에서 미군에 맞서게 되었다. 그는 "카미카제 특공대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자살공격은 이전부터 제안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그도 자살공격을 반대했다. 그러나 매리애너 해전의 손실로 전력이 크게 감소되어 정상적인 공격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생각을 바꾸어 자살공격을 명령하였다. 필리핀이 함락되자 일본으로 돌아와 1945년 5월 군령부 차장(육군의 참모차장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후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15시간 후에 사망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전사자에게 자살공격을 명령한 것을 사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재건과 세계 평화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그가 할복에 사용한 칼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