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모토오미(山口素臣)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인이다. 보병 제3·10여단장, 제5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종 계급은…야마구치 모토오미(山口素臣)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인이다. 보병 제3·10여단장, 제5사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정3위 훈1등 공2급 자작. 야마구치번사 야마모토가 출신으로 후에 야마구치가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보신 전쟁 당시에는 기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웨이하이 전투에 전공을 세워 그 해 8월 남작위를 수여받았다. 말년에 육군 대장 군사참의관이 되었으나 사망하여 자작으로 추증, 작위는 양자 주하치(고다마 겐타로의 양사위)가 습작하였다.
이노우에 요시카(일본어: 井上良馨, 1845년(고카 2년 11월 3일) ~ 1929년(쇼와 4년) 3월 22일)는 막말부터…이노우에 요시카(일본어: 井上良馨, 1845년(고카 2년 11월 3일) ~ 1929년(쇼와 4년) 3월 22일)는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원수·해군대장 종일위 대훈위 공이급 자작이다. 사쓰마 번사 이노우에 시치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75년(메이지 8년) 가와무라 스미요시의 명령에 따라 운요호의 함장이었던 이노우에 소좌는 조선군 강화도 포대에 대한 도발을 개시하여 운요호 사건이 발발하게 된다.
이시구로 다다노리(일본어: 石黒忠悳, 1845년 3월 18일(고카 2년 2월 11일) ~ 1941년(쇼와 16년) 4월…이시구로 다다노리(일본어: 石黒忠悳, 1845년 3월 18일(고카 2년 2월 11일) ~ 1941년(쇼와 16년) 4월 26일)는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의사이다. 일본 육군의 군의였으며 초창기 일본 군의관 제도를 확립하였다. 군의총감, 일본 적십자사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작위는 자작이고 의학박사이다.
오사코 나오하루(일본어: 大迫尚敏 오오사코 나오하루[*], 1844년 12월 24일 ~ 1927년 9월 20일)는 일본의…오사코 나오하루(일본어: 大迫尚敏 오오사코 나오하루[*], 1844년 12월 24일 ~ 1927년 9월 20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일본 제국 육군 제7사단장을 지냈으며, 자작위를 가지고 있다.
사쿠마 사마타(일본어: 佐久間 左馬太, 1844년 11월 19일(덴포 15년 10월 10일) ~ 1915년(다이쇼 4년)…사쿠마 사마타(일본어: 佐久間 左馬太, 1844년 11월 19일(덴포 15년 10월 10일) ~ 1915년(다이쇼 4년) 8월 5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며 화족이다. 대만 총독, 도쿄 위수 총독, 근위사단장 등을 역임하였고, 계급은 육군대장 정2위 훈1등 백작이다.
야마다 아키요시(일본어: 山田顕義, 1844년 11월 18일 ~ 1892년 11월 11일)는 조슈 번사, 일본 제국의…야마다 아키요시(일본어: 山田顕義, 1844년 11월 18일 ~ 1892년 11월 11일)는 조슈 번사, 일본 제국의 정치인, 육군 군인이다. 육군 중장까지 올랐으며, 내각에서 공부경(工部卿), 내무경, 사법경, 제1차 이토 내각 ~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의 사법대신을 지냈다.
오카사와 구와시(일본어: 岡沢精, 1844년(고카 1년) 음력 7월 7일 ~ 1908년(메이지 41년) 12월 12일)는…오카사와 구와시(일본어: 岡沢精, 1844년(고카 1년) 음력 7월 7일 ~ 1908년(메이지 41년) 12월 12일)는 막말의 조슈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 화족이다. 육군대장을 역임하였고 정2위 훈1등 공3급의 자작이다.
이토 스케유키(일본어: 伊東祐亨, 1843년 6월 9일 ~ 1914년 1월 16일)는 막말의 사쓰마 번사, 일본 제국의 해군…이토 스케유키(일본어: 伊東祐亨, 1843년 6월 9일 ~ 1914년 1월 16일)는 막말의 사쓰마 번사,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 화족이다. 작위는 백작.
오야마 이와오(일본어: 大山 巌, 1842년 11월 12일 ~ 1916년 12월 10일) 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오야마 이와오(일본어: 大山 巌, 1842년 11월 12일 ~ 1916년 12월 10일) 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군인이다. 그는 메이지 유신에 참여하였으며, 러일 전쟁에서 일본 육군에 만주군 총사령관으로서 육군을 총지휘하였다. 영전은 종1위 대훈위국화장경식 금치훈장이며,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제2대 경시총감(교육감), 육군 장관(1, 2, 3, 4, 6, 7대), 육군참모총장(제4, 6대), 문교부 장관, 내대신, 원로,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주도 형제는 사촌에 해당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어: 山縣有朋, 1838년 6월 14일 ~ 1922년 2월 1일)는 일본 제국 육군 원수이자…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어: 山縣有朋, 1838년 6월 14일 ~ 1922년 2월 1일)는 일본 제국 육군 원수이자 내각총리대신을 두 번 지낸 인물이며,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 총리다. 그는 일찍이 근대 일본의 군사와 정치 토대를 마련했다. 작위는 공작.
가바야마 스케노리(일본어: 樺山 資紀, 1837년 12월 9일 ~ 1922년 2월 8일)는 메이지 유신, 청일 전쟁 등에서…가바야마 스케노리(일본어: 樺山 資紀, 1837년 12월 9일 ~ 1922년 2월 8일)는 메이지 유신, 청일 전쟁 등에서 활약한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육군과 해군 모두에서 활약하였으며, 일본 제국의 초대 대만총독을 역임하였다. 가바야마 모토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니 다테키 혹은 다니 간조(谷干城, 1837년 3월 18일 ~ 1911년 5월 13일)는 도사번사 출신의 일본 제국…다니 다테키 혹은 다니 간조(谷干城, 1837년 3월 18일 ~ 1911년 5월 13일)는 도사번사 출신의 일본 제국 육군군인, 정치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 작위는 자작. 정2위 훈1등. 통칭은 신타로(申太郎), 모리베(守部). 1837년 도사번에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막말에 도사번의 존황파로 활동하며 사쓰마번의 고마쓰 기요카도, 사이고 다카모리와 동맹 밀약을 체결하였다. 폐번치현 이후 신정부의 육군 장교로 임명되었고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워 이름을 높였다. 제1차 이토 내각에 등용된 것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곧 서구화 정책을 비판하는 등 국수주의의 면모를 보이며 이토와 충돌하다가 내각에서 사임하였다. 1890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복귀하였고, 고립주의와 농본주의를 엄격히 고수하며 도사 존황파의 중진으로서 활동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의 정치 세력은 쇠퇴해 갔다. 1911년 사망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일본어: 有栖川宮熾仁親王, 1835년 3월 17일 ~ 1895년 1월 15일)은 일본 제국의…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일본어: 有栖川宮熾仁親王, 1835년 3월 17일 ~ 1895년 1월 15일)은 일본 제국의 황족, 정치인, 군인이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의 약혼남으로 유명하다.
오니시 다키지로(일본어: 大西 瀧治郎, 1891년 6월 2일- 1945년 8월 16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일본의…오니시 다키지로(일본어: 大西 瀧治郎, 1891년 6월 2일- 1945년 8월 16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일본의 해군 군인이다. 그는 전황이 악화되자 자살공격을 제안하여 '신풍 특공대의 아버지'(特攻生みの親)라고 불린다. 효고현 단바시 출신으로, 1912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함정 승조원 생활을 하다가 해군 항공대의 조직자로 선발되어, 1918년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되어 좀 더 심화된 교육을 받았다. 일본에 돌아와서 요코스카 항공대에 교관이 되었고, 이후 가스미가우라 해군항공대에 파견되었다. 소좌 시절에 항공모함 호쇼의 비행대장이 되고, 1939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일본해군 제11 비행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성에서 비행기의 기술적 문제를 담당하였다. 오니시 개인적으로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진주만 공격을 반대했다고 한다. 1943년 그는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1944년 제1 항공함대의 사령관이 되어 필리핀에서 미군에 맞서게 되었다. 그는 "카미카제 특공대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자살공격은 이전부터 제안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그도 자살공격을 반대했다. 그러나 매리애너 해전의 손실로 전력이 크게 감소되어 정상적인 공격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생각을 바꾸어 자살공격을 명령하였다. 필리핀이 함락되자 일본으로 돌아와 1945년 5월 군령부 차장(육군의 참모차장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후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15시간 후에 사망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전사자에게 자살공격을 명령한 것을 사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재건과 세계 평화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그가 할복에 사용한 칼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되고 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일본어: 榎本武揚, 1836년 8월 25일 ~ 1908년 8월 26일)는 일본의 해군 제독으로 에도…에노모토 다케아키(일본어: 榎本武揚, 1836년 8월 25일 ~ 1908년 8월 26일)는 일본의 해군 제독으로 에도 바쿠후의 해군 간부로써 바쿠후의 활약하였고, 메이지 신정부에 항복하고 사받은 뒤 러시아와의 사할린, 쿠릴 열도 관련 조약 체결 특사로 파견되는 등 메이지 정부의 관료로써 일하였다.
차이어(蔡鍔, 채악, 1882년 12월 18일~1916년 11월 8일)는 본명은 건인(간인)(艮寅), 자는…차이어(蔡鍔, 채악, 1882년 12월 18일~1916년 11월 8일)는 본명은 건인(간인)(艮寅), 자는 쑹포(송파)(松坡)이다. 조적은 호남성(湖南省) 보경부(寶慶府) 소양현(邵陽縣, 오늘날 사오양시邵陽市 다샹구大祥區)이다. 나고 자란 곳은 보경부 무강주(武岡州) 산문(山門, 오늘날 사오양시 동커우현洞口縣)이다. 청말민초 정치인물이자 군사가이다. 신해혁명(辛亥革命)에 호응하였고,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제(帝制) 복벽(復辟) 즉 홍헌제제(洪憲帝制)를 반대하는 호국전쟁(護國戰爭)을 발동하여 헌정을 수호하려 하였고, 호국대장군(護國大將軍)과 호국군신(護國軍神)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무타구치 렌야(일본어: 牟田口 廉也,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은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그는…무타구치 렌야(일본어: 牟田口 廉也,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은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그는 1944년 버마 전선에서 무리하게 임팔 작전을 강행하였다가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일본 출신으로, 1910년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하고, 1917년 고급 참모과정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 혁명에 간섭한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하였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소좌 시절에는 캄차카반도에 잠입하여 홀로 종단하여 정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참모본부에서 근무, 황도파 계열의 군내 사조직인 사쿠라카이에 가담한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엔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육사 동기이자 동향인 쿠가 노보루 소좌에게 자결을 종용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1936년 중국에 파견되어 베이징에 주둔중인 제1연대의 연대장을 맡았다. 그가 맡고 있는 연대가 노구교 사건에서 선제 공격을 하며, 결국 이것이 중일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이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4군의 참모장을 맡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육군유년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제18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하였다. 무타구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후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바탄 반도전에 투입되었고,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다시 투입되었다. 이때 대본영에서는 인도진공을 계획하였으나, 밀림과 산악지역에서는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무타구치의 반대로 작전은 연기되었다. 무타구치는 1943년 3월에는 버마 방위를 담당하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영국군이 인도로부터 월경하여 버마의 일본군을 공격하자, 무타구치는 생각을 바꿔서 이전에 반대했던 인도진공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보급이나 병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전을 세워 휘하 부대장들이 모두 작전에 반대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일화로, 한 휘하 장교가 무타구치에게 보급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물어보자, "일본인은 본래 초식동물이고, 밀림에 널린게 풀이다. 보급은 소와 말로 하고, 부족해지면 그것들을 잡아먹으면 된다. 그래도 부족하면 적에게서 탈취하면 된다." 라고 대답했다. 결국 1944년 3월, 그 휘하에 있던 제15군(15, 31, 33사단으로 구성됨)은 빈약한 준비와 병참으로 인도공략을 위해 진격했으나, 8만 5천여 명의 병력중 5만 명이 대부분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대참패로 끝났다. (임팔 전투) 이후 책임을 지고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왔고, 1944년 12월 예편하였다. 1945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사관학교 예과의 교장이 되었으나, 일본이 항복하여 단명에 그쳤다. 그는 잔혹행위에 대한 전범용의자로 체포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으나 불기소 처분 후 재판을 위해 싱가포르로 압송되었고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48년 3월에 만기 석방되었다. 그는 전후에도 "부하의 무능때문에 임팔 작전이 실패했다"는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무타구치를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와 더불어 "삼대오물"(三大汚物)이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
김종오(金鍾五, 1921년 5월 22일 ~ 1966년 3월 30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이며…김종오(金鍾五, 1921년 5월 22일 ~ 1966년 3월 30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한신(韓信, 1922년 12월 27일 ~ 1996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내무부 장관, 감사원…한신(韓信, 1922년 12월 27일 ~ 1996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내무부 장관, 감사원 원장, 합동참모총장, 아시아자동차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