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이타 가쓰미(일본어: 黒板 勝美 (くろいた かつみ), 1874년 9월 3일~1946년 12월 21일)는 일본의…
구로이타 가쓰미(일본어: 黒板 勝美 (くろいた かつみ), 1874년 9월 3일~1946년 12월 21일)는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명예교수이며, 전공은 일본고대사, 일본고문서학이다. 호는 교신(虚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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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이타 가쓰미(일본어: 黒板 勝美 (くろいた かつみ), 1874년 9월 3일~1946년 12월 21일)는 일본의…
구로이타 가쓰미(일본어: 黒板 勝美 (くろいた かつみ), 1874년 9월 3일~1946년 12월 21일)는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명예교수이며, 전공은 일본고대사, 일본고문서학이다. 호는 교신(虚心)이다.
오카다 다케마쓰(일본어: 岡 (おか)田 (だ) 武 (たけ)松 (まつ), 1874년 8월 17일 ~ 1956년 9월 2일)는…
오카다 다케마쓰(일본어: 岡 (おか)田 (だ) 武 (たけ)松 (まつ), 1874년 8월 17일 ~ 1956년 9월 2일)는 일본의 기상학자로, 일본 기상청의 전신인 중앙기상대의 제4대 대장으로 재임하였다.
미나미 지로(일본어: 南 次郎, 1874년 8월 10일 ~ 1955년 12월 5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이며 병과는…
미나미 지로(일본어: 南 次郎, 1874년 8월 10일 ~ 1955년 12월 5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이며 병과는 육군 기병이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제7대 조선총독을 역임하였으며, 총독 재직 중 조선인에게 내선일체와 창씨개명령을 시행하였다. 1940년 1월 그는 창씨개명은 강제성이 아니라 자율성에 맡긴다고 발표하였으나 창씨개명은 강제로 단행되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혼선과 조선인의 반발로 1942년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A급 전범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스즈키 우메타로(일본어: 鈴 (すず)木 (き) 梅 (うめ)太 (た)郎 (ろう), 1874년 4월 7일 ~ 1943년 9월…
스즈키 우메타로(일본어: 鈴 (すず)木 (き) 梅 (うめ)太 (た)郎 (ろう), 1874년 4월 7일 ~ 1943년 9월 20일)는 일본의 농예화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인 오리자닌(Oryzanin)의 발견은 세계 최초의 비타민 발견으로 평가받는다.
오이시 와사부로(일본어: 大 (おお)石 (いし) 和 (わ)三 (さぶ)郎 (ろう), 1874년 3월 15일 ~ 1950년…
오이시 와사부로(일본어: 大 (おお)石 (いし) 和 (わ)三 (さぶ)郎 (ろう), 1874년 3월 15일 ~ 1950년 12월 18일)는 일본의 기상학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로, 제트류를 발견하였다.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일본어: 梨本宮守正王 なしもとのみや もりまさおう[*], 1874년(메이지 7년) 3월 9일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일본어: 梨本宮守正王 なしもとのみや もりまさおう[*], 1874년(메이지 7년) 3월 9일 - 1951년(쇼와 26년) 1월 2일)은 일본 제국의 황족, 육군군인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이왕가의 영친왕에게 시집간 마사코 여왕의 아버지 즉 영친왕의 장인이자, 아키히토 일본 상황(上皇)의 대숙부이다. 구한국의 황손 이진, 이구의 외조부이다. 일본의 패망 이후 일본 황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기소, 황적이탈되어 궁가의 칭호를 잃어 나시모토 모리마사(梨本守正)로 불리게 된다.
요시자와 겐키치(일본어: 芳澤 謙吉, 1874년 1월 24일 ~ 1965년 1월 5일)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1932년…
요시자와 겐키치(일본어: 芳澤 謙吉, 1874년 1월 24일 ~ 1965년 1월 5일)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1932년 일본의 외무대신을 지냈다.
마사키 나오히코(일본어: 正木 直彦, 1862년 12월 17일(분큐 2년 1월 26일) ~ 1940년(쇼와 15년) 3월…
마사키 나오히코(일본어: 正木 直彦, 1862년 12월 17일(분큐 2년 1월 26일) ~ 1940년(쇼와 15년) 3월 2일)는 메이지부터 쇼와 초기까지 활동한 미술행정가이다. 문부성 관료 출신으로 1901년부터 1932년까지 도쿄미술학교(현재 도쿄예술대학) 제5대 교장으로 있었다. 호는 십삼송당(号十三松堂).
모리 오가이(일본어: 森 (もり) 鷗 (おう)外 (がい), 신자체: 森 鴎外, 1862년 2월 17일 ~ 1922년 7월…
모리 오가이(일본어: 森 (もり) 鷗 (おう)外 (がい), 신자체: 森 鴎外, 1862년 2월 17일 ~ 1922년 7월 8일)는 일본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소설가·번역가·극작가다. 육군 군의총감 정4위 훈2등 공3급 의학박사 문학박사.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나츠메 소세키와 나란히 문호(文豪)라고 불렸다. 본명은 모리 린타로(일본어: 森林太郎)이다.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육군 군의관이 되어 일본 육군성에서 파견한 유학생으로서 독일에서 4년을 보냈다. 귀국 후, 번역시 "오모카게(於母影)", 소설 "무희(舞姫)", 번역시집 "즉흥시인"을 발표했고, 또 스스로 문예잡지 "시가라미 소시(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해서 문필 활동에 들어갔다. 그 후, 군의총감(중장에 해당)이 되어, 한때 창작 활동에서 멀어졌지만, "스바루(スバル)" 창간 후에 "위타 세쿠스아리스(ヰタセクスアリス)" "기러기" 등을 집필했다.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에 영향을 받아서 "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발표한 뒤에는, "아베 일족(阿部一族)" "다카세부네(高瀬舟)" 등의 역사소설, 사전(史伝) "시부에 주사이(渋江抽斎)"를 썼다. 또,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 총장이나 제국 미술원(帝国美術院, 현재의 일본 예술원日本芸術院) 초대 원장 등도 역임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일본어: 有栖川宮威仁親王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신노[*], 1862년 2월 11일(분큐…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일본어: 有栖川宮威仁親王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신노[*], 1862년 2월 11일(분큐 2년 음력 1월 13일) ~ 1913년(다이쇼 2년) 7월 5일)는 일본의 황족이며 군인이다. 관직은 군사참의관, 훈등은 대훈위 공3급, 칭호 및 계급은 원수·제독을 역임하였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제4왕자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사와노미야(稠宮 (さわのみや))이다. 친왕비는 옛 가가국 가나자와 번주였던 화족 마에다 요시야스(前田慶寧)의 딸 야스코(慰子)이다.
하타노 요시나오(일본어: 波多野 敬直, 1850년 11월 13일 ~ 1922년 8월 29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 다이쇼…
하타노 요시나오(일본어: 波多野 敬直, 1850년 11월 13일 ~ 1922년 8월 29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의 법조인, 관료, 정치가이다. 사법대신과 궁내대신 등을 지냈으며 자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일본어: 長谷川好道, 1850년 10월 1일 ~ 1924년 1월 27일)는 일본의 군인, 정치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일본어: 長谷川好道, 1850년 10월 1일 ~ 1924년 1월 27일)는 일본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다. 일본 제국 육군 원수를 역임했고,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제2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하급 군인 출신으로 보신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오사카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위가 되었다. 이후 세이난 전쟁과 청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러일 전쟁에도 참여하여 압록강 회전과 랴오양 회전에서 승리하고 남작이 되었으며, 1904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뒤에는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907년 자작으로 승작되었고, 1912년 1월 20일 일본군 육군참모총장, 1915년 육군 원수를 거쳐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하세가와는 전임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뒤를 이어, 재임 기간 동안 무단 통치를 행하였다.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 진압하였지만 결국 교체된다.
고이즈미 야쿠모(일본어: 小泉 八雲, 1850년 6월 27일 ~ 1904년 9월 26일)는 그리스에서 태어난 일본인…
고이즈미 야쿠모(일본어: 小泉 八雲, 1850년 6월 27일 ~ 1904년 9월 26일)는 그리스에서 태어난 일본인 소설가로, 본명은 패트릭 래프카디오 헌(영어: Patrick Lafcadio Hearn) 또는 파트리키오스 레프카디오스 헤른(그리스어: Πατρίκιος Λευκάδιος Χερν)이다.
오우라 가네타케(일본어: 大浦兼武 오오우라 카네타케[*], 1850년 6월 15일(가에이 3년 5월 6일) ~…
오우라 가네타케(일본어: 大浦兼武 오오우라 카네타케[*], 1850년 6월 15일(가에이 3년 5월 6일) ~ 1918년(다이쇼 7년) 9월 30일)는 사쓰마번의 무사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 후기와 다이쇼 시대 초기에 활동한 경찰 관료이자 정치가이다. 체신대신, 농상무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하였고, 훈등은 훈일등, 작위는 정3위 자작이다.
마에다 마사나(일본어: 前田 (まえだ) 正名 (まさな): 1850년 4월 23일[가영 3년 3월 12일]-1921년[대정…
마에다 마사나(일본어: 前田 (まえだ) 正名 (まさな): 1850년 4월 23일[가영 3년 3월 12일]-1921년[대정 10년] 8월 11일)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관료다. 메이지 정부의 식산흥업 정책의 입안과 실천의 중심인물이다. 사츠마국 가고시마에서 번의(藩醫) 마에다 젠안(善安)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오가타 코안 문하의 야기 쇼헤이에게 서양학문을 배우고, 야기의 류큐 밀무역을 도왔다. 1856년(경응 원년) 나가사키의 가 노리유키의 어학원에 번비유학생으로 보내졌고, 사츠마번 제1차 영국유학생으로도 선발되었으며, 고다이 토모아츠에게 다대한 영향을 받았다. 경응 2년(1866년) 6월에는 삿초동맹의 밀사에 참여해서 사카모토 료마에게 단도를 받았다. 메이지 원년(1868년), 타카하시 신키치・마에다 켄키치와 공저하여 『화역영사전』을 발행했다. 메이지 2년(1869년)에는 프랑스 총영사 몽블랑 백작을 수행해 파리로 유학하고, 한동안 몽블랑 저택에서 기숙했다. 프랑스 체류 중에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을 체험하고, 이 체험으로 유럽을 일본이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른다. 1875년(메이지 8년) 6월 18일 프랑스 공사관 2등 서기생으로 취임하여 권업료 어용괘(御用掛)를 겸무했다. 또한 농업경제학자 외젠 티세랑에게 사사하여 농정과 농업경제에 대해 배웠다. 이후 1876년(메이지 9년) 12월 내무성 권농료 어용괘에 임명되어 귀국을 명령받고 이듬해(1877년) 3월 귀국해 동년 9월 미타 육종장을 개설했다.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 사무관장을 지냈다. 1879년(메이지 12년) 『직접무역의견일반』을 기초하여 “1. 중앙은행의 설립, 2. 무역회사의 설립, 3. 산업카르텔의 설립”을 제창했다. 1881년(메이지 14년) 대장성・농상무성 대서기관이 되었다가 이사관까지 올라갔다. 재직 중에 국내산업의 실태를 조사하고, 식산흥업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해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흥업은행 설립의 필요성 등을 호소한 『흥업의견 미정고』를 정리했다. 수정의견을 받아 미정고를 고친 『흥업의견』 전30권을 만들어 제출, 1884년 12월 26일 태정관의 윤가를 받았으나, 은행 설립 제안은 유예되었다. 메이지 21년(1888년) 6월, 야마사키 나오타네의 후임으로 제7대 야마나시현지사로 부임했다. 내임 당시 도롱이삿갓 차림으로 현청 현관에 나타나 공무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야마나시현은 제5대 후지무라 시로 이래로 번벌관료 출신 현지사가 짧은 재직기간을 지내고 교대하는 일이 많았다. 마에다 역시 경제관료로서 이러한 정세 속에 부임한 단임 현지사였기에 눈에 띄는 정책은 살펴볼 수 없으나, 쿠리하라 노부치카 등과 식산흥업을 추진해 도로정비와 하천개수, 고슈포도 보급 등을 실시했다. 메이지 정부는 식산흥업 정책의 일환으로 메이지 10년(1877년)부터 메이지 36년까지 내국권업박람회를 개최했고, 여러 부현이 모인 연합공진회도 개최되어 각 부현의 물산의 우열을 겨루었다. 야마나시현에서도 공진회가 개최되어 1888년(메이지 21년) 10월 고후시에서 야마나시현 시모쿠군 연합공진회가 열렸으며, 마에다도 현지사로서 이 행사에 참석했다. 메이지 22년(1889년) 10월에는 농상무성 농무국장과 동경농림학교장을 겸임했고, 메이지 23년(1890년)에는 농상무차관이 되었다. 그러나 흥업은행 조례 창안을 기초하는 과정에서 대출권을 둘러싸고 농상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대립하여 잘리고 동년 5월 원로원 의관으로 전환했다. 동년 9월 29일에는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28년(1985년) 양잠이 성행하는 교토 하카군(현 교토부 아야베시)를 방문해 “오늘날의 급무는 국시(國是)・현시(縣是)・군시(郡是)를 정하는 데 있다”고 연설했다. 양잠업 발전과 지역진흥을 촉구해 이듬해 1896년 군시제사(郡是製絲)를 발족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군제 주식회사의 전신이다. 여기서 “시(是)”라 함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후 회사 이름에 “시”가 들어가는 제사회사가 전국적으로 24개나 생겼다. 메이지 21년(1898년) 미야자키현의 카이덴 사업과 합자해서 북해도 쿠시로시에서 일본 최초의 펄프회사인 마에다제지 합명회사를 설립했다. 메이지 37년(1904년) 8월 22일 두 번재로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 메이지 40년(1907년) 아칸호 호반에 거처를 마련하고 같은 해 타케토미 젠키치와 함께 쿠시로 은행을 설립해 북해도 동부 개발에 공헌했다. 다이쇼 10년(1921년) 8월 11일 죽은 당일 남작에 서작되었다. 마에다는 식산흥업운동 초기부터 자연보호에 주목했고, 메이지 천황에게 식림과 조림을 위한 제실어료지를 불하받았다. 하여 아소, 후지고텐바, 아칸 등지에 5,000 헥타르 이상의 광대한 부지를 가진 일본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오늘날의 아소 국립공원, 아칸 국립공원이 모두 마에다의 사유지 위에 지정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잉렇게 광대한 부지에서 얻은 목재를 사용해 오지제지에 원목을 제공하고, 일체의 국비를 사용하지 않고도 재단을 운영했다. 1983년(쇼와 58년) 4월 18일 마에다 미츠코(마에다 마사나의 둘째며느리)가 사망하면서 발생한 상속세는 당시 최고액이었으며, 이후 마츠시타 코노스케가 사망할 때까지 역대 최고액이었다.
하야시 다다스(일본어: 林 董, 1850년 4월 11일(가에이 3년 음력 2월 29일) ~ 1913년(다이쇼 2년) 7월…
하야시 다다스(일본어: 林 董, 1850년 4월 11일(가에이 3년 음력 2월 29일) ~ 1913년(다이쇼 2년) 7월 20일)는 에도 막부의 막신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다. 초대 육군군의총감을 역임하였고, 작위는 백작. 하야시 집안의 양자로 입적되기 전의 이름은 사토 도사부로(佐藤 東三郎)이다.
가와무라 가게아키(일본어: 川村景明, 가에이 3년 음력 2월 26일(1850년 4월 8일) ~ 1926년(다이쇼 15년)…
가와무라 가게아키(일본어: 川村景明, 가에이 3년 음력 2월 26일(1850년 4월 8일) ~ 1926년(다이쇼 15년) 4월 28일)는 일본 제국의 화족, 군인이다. 도쿄 위수총독, 압록강군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관위는 원수, 육군 대장 종1위 대훈위 공1급 자작이다. 통칭은 겐주로(源十郎).
기요우라 게이고(일본어: 清浦 奎吾, 1850년 2월 14일 ~ 1942년 11월 5일)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제23대…
기요우라 게이고(일본어: 清浦 奎吾, 1850년 2월 14일 ~ 1942년 11월 5일)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제23대 내각총리대신이다. 지금의 구마모토현에 해당되는 히고노쿠니 출신이다. 사법 관료를 경험한 후, 귀족원 의원이 되어 사법 대신, 농상무대신,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 1924년 1월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나, 총선거에서 호헌 3파가 압승함에 따라 그 해 6월 사직하였다. 기요우라 내각 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가장 고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어: 山縣有朋, 1838년 6월 14일 ~ 1922년 2월 1일)는 일본 제국 육군 원수이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어: 山縣有朋, 1838년 6월 14일 ~ 1922년 2월 1일)는 일본 제국 육군 원수이자 내각총리대신을 두 번 지낸 인물이며,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 총리다. 그는 일찍이 근대 일본의 군사와 정치 토대를 마련했다. 작위는 공작.
와타나베 노보루/노보리(일본어: 渡邊昇, 1838년 5월 1일 ~ 1913년 11월 10일)는 일본의 무사, 검술가…
와타나베 노보루/노보리(일본어: 渡邊昇, 1838년 5월 1일 ~ 1913년 11월 10일)는 일본의 무사, 검술가, 정치인이다. 휘는 다케쓰네(武常). 히젠 오무라(현재 오무라시)번사. 작위는 자작.
고토 쇼지로(일본어: 後藤 象二郎 ごとう しょうじろう[*], 덴포 9년 음력 3월 19일(1838년 4월 13일) ~ 메이지…
고토 쇼지로(일본어: 後藤 象二郎 ごとう しょうじろう[*], 덴포 9년 음력 3월 19일(1838년 4월 13일) ~ 메이지 30년(1897년) 8월 4일)는 막말의 도사 번사이다. 메이지 시대에는 정치인 겸 기업인이다. 고치성 출신으로 고모부이자 양부인 요시다 도요와 함께 야마우치 요도의 번정 개혁을 뒷받침했다. 도요의 암살 후 존왕양이파들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도사 번 참정자리에 복귀한 그는 도사상회를 설립해 번의 근대화를 꾀했으며, 사카모토 료마가 제출한 선중팔책을 요도 공에게 올려 대정봉환을 이룩하는 등 메이지 유신에의 공을 인정받아 일본 귀족 관위 정2위 백작에 올랐다. 메이지 신정부 때는 미쓰비시 그룹 총수 이와사키 야타로와 함께 구채권을 매점해 큰 돈을 벌기도 했다. 이후 자유당과 진보당을 결성하는 등 메이지 시대의 자유민권운동을 이끌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사사키 다카유키와 함께 도사 3걸의 하나로 꼽히나, 미쓰비시 그룹과 부당 내부 거래, 뇌물수수 사건 등 정경유착의 부도덕성으로 오명을 썼다. 아명은 호야타(保弥太) 혹은 료스케(良輔). 휘는 마사모토(正本)에서 모토하루(元曄)로 변경했고, 자는 모토하루(日曄), 조야(暢谷), 후토오(不倒翁) 등이며, 아호는 조야(暘谷), 운주(雲濤), 고카이(光海), 오코(鷗公) 등이다.
오쿠마 시게노부(일본어: 大隈 重信, 1838년 3월 11일 ~ 1922년 1월 10일)는 일본 사가번 무사 출신의…
오쿠마 시게노부(일본어: 大隈 重信, 1838년 3월 11일 ~ 1922년 1월 10일)는 일본 사가번 무사 출신의 정치인이자 교육자로 작위는 후작이다. 제8대, 제1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으며,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 전문 학교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가 7현인(佐賀の七賢人) 중 한사람이다.
오시마 타카토(大島高任, おおしま たかとう, 1826년 6월 16일~1901년 3월 29일)는 메이지 시대의 광산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