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년 11월 6일 - 2002년 11월 11일)는 일본의 고고학자, 도쿄 대학(東京大学) 명예…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년 11월 6일 - 2002년 11월 11일)는 일본의 고고학자, 도쿄 대학(東京大学) 명예 교수이다. 야마구치현(山口県) 출신으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説)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기마민족설은 1948년에 「일본 민족 = 문화의 원류(源流)와 일본 국가의 형성」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일본의 통일국가의 출현과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의 창시는 동북아시아의 부여(夫餘) 계통의 기마민족이 세운 진(辰) 왕조에서 비롯되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에 달성되었다」는 것을 요지로 하였다.
사카구치 안고(일본어: 坂 (さか)口 (ぐち) 安 (あん)吾 (ご), 1906년 10월 20일 ∼ 1955년 2월 17일)은…사카구치 안고(일본어: 坂 (さか)口 (ぐち) 安 (あん)吾 (ご), 1906년 10월 20일 ∼ 1955년 2월 17일)은 일본의 문학가로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坂 (さか)口 (ぐち) 炳 (へい)五 (ご))이다.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 시절 이미 방랑벽이 있었으며,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싸움질을 하고 돌아다녀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한편, 주로 무사들의 군담을 숙독했고, 남몰래 닌자의 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1932년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6년, 전후의 시대적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파악한 <타락론>과 <백치>에 의해 일약 시대의 총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와 동시에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평가된다.
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을…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5대 해무청장이다. 본관은 통천(通川)이다.
우쓰노미야 도쿠마(일본어: 宇都宮 徳馬 (うつのみや とくま), 1906년 9월 24일~2000년 7월 1일)는 10선 중의원…우쓰노미야 도쿠마(일본어: 宇都宮 徳馬 (うつのみや とくま), 1906년 9월 24일~2000년 7월 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과 재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자 미노화겐제약을 창업한 사업가다.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조선군사령관을 역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장남이다.
쇼치 사부로(일본어: 曻地 三郎, 1906년 8월 16일 ~ 2013년 11월 27일)는 일본의 교육자, 교육 학자…쇼치 사부로(일본어: 曻地 三郎, 1906년 8월 16일 ~ 2013년 11월 27일)는 일본의 교육자, 교육 학자, 교육학, 심리학, 정신 의학 전문가이다. 옛 성씨는 야마모토(山本). 사재를 털어 일본 최초의 지적 장애아 통원 시설 시이노미 학원을 설립, 운영했다. 장애아동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교구를 제작했으며, 많은 건강 운동법을 남겼다. 장애아동들에게 한 글자를 가르치기 위해 6개월 간 끊임없이 교육하는 열정을 보였다. 향년 10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후쿠오카 교육 대학 교육 학부 교수, 한국 사회 사업 대학 (현 대구 대학교 ) 교수·대학원장, 사회 복지 법인 시이노미 학원 이사장 겸 원장을 역임했다. 히로시마 문장 이과 대학 문학 박사, 규슈 대학 의학 박사 . 후쿠오카 교육 대학 명예 교수, 한국·건양대 학교 명예 교수, 중국 장춘 대학 명예 교수, 상하이 화동 사범 대학 명예 교수, 모스크바 심리 교육 대학 명예 교수.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페스탈로치 교육상 수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 수상. 아사히 사회 복지 상등을 수상했다.
사이고 기치노스케(西郷吉之助)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사이고 도라타로 후작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조부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사이고 기치노스케(西郷吉之助)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사이고 도라타로 후작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조부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기치노스케라는 이름은 본디 조부 다카모리의 통칭으로 조부의 통칭을 따왔다. 한때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당주 도쿠가와 요시치카 후작(요시치카의 딸 하루코)의 사위였다.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에서는 법무대신을 지냈다. 형 사이고 다카테루 후작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그의 뒤를 이어 후작위를 습작하였다. 조부의 강직하고 대범한 성격을 닮은 인물로 평가되며, 현대 일본 정치·사회의 실질적 활동가로서, 참의원·법무대신 등 요직을 맡아 20세기 일본 정치에 족적을 남겼다.
다나카 지로(일본어: 田中二郞, 1906년 7월 14일 ~ 1982년 1월 16일)는 일본 효고현 출신의 법학자이다. 전문은…다나카 지로(일본어: 田中二郞, 1906년 7월 14일 ~ 1982년 1월 16일)는 일본 효고현 출신의 법학자이다. 전문은 행정법과 조세법. 1964년~1973년 최고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미노베 다쓰키치의 제자이다. 1976년 일본학사원회원, 1980년 일본 문화공로자.
권태하(權泰夏, 1906년 6월 2일 ~ 1971년 10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육상 선수이었고, 대한민국의 체육인이다.…권태하(權泰夏, 1906년 6월 2일 ~ 1971년 10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육상 선수이었고, 대한민국의 체육인이다. 1932년 하계 올림픽 육상 남자 마라톤에 출전하여 2시간 42분 52초로 9위를 기록하였다.
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소설가 겸 법학자 등으로…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소설가 겸 법학자 등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교육자(대학 교수) 겸 정치인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호(號)는 현민(玄民)이며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일제 시대 때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지냈고 고려대학교의 창립 초기 멤버이며,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카프가 민중문제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불참하였으며 경성제대에 결성되었던 경제연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사회주의 좌파 문학인으로 활동했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친일 칼럼, 논설 등을 기록 및 기고하는 친일 어용 단체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여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제헌 헌법을 입안하였으며, 정치 활동으로는 제1공화국 기간 중 민국당과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며, 1959년 장택상 등과 함께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 뒤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언론, 법률 활동 외에 제3공화국, 제4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신민당 총재 등을 지내다가 1969년 3선개헌이 통과되자 충격을 받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박정희 정부 하에서는 줄곧 야당 지도자로 정부 비판에 앞장섰으나, 제5공화국 출범 이후 국정자문회의 위원과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지내기도 했다.
이야나가 쇼키치(일본어: 彌 (いや)永 (なが) 昌 (しょう)吉 (きち) , 1906년 4월 2일 ~ 2006년 6월…이야나가 쇼키치(일본어: 彌 (いや)永 (なが) 昌 (しょう)吉 (きち) , 1906년 4월 2일 ~ 2006년 6월 1일)는 일본의 수학자로,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서적과 논문을 내고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여, 일본 수학계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도모나가 신이치로(일본어: 朝 (とも)永 (なが) 振 (しん)一 (いち)郎 (ろ), 1906년 3월 31일 ~ 1979년…도모나가 신이치로(일본어: 朝 (とも)永 (なが) 振 (しん)一 (いち)郎 (ろ), 1906년 3월 31일 ~ 1979년 7월 8일)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공로로 1965년 리처드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거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연구는 소립자 물리학의 발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모리 시게오(일본어: 森 茂雄, 1906년 3월 18일 ~ 1977년 6월 24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모리 시게오(일본어: 森 茂雄, 1906년 3월 18일 ~ 1977년 6월 24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및 사업가이다.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구본웅(具本雄, 1906년 3월 7일 ~ 1952년 2월 2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이다.…구본웅(具本雄, 1906년 3월 7일 ~ 1952년 2월 2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이다. 아호는 서산(西山)이다.
다케노코시 시게마루(일본어: 竹腰 重丸 (たけのこし しげまる), 1906년 2월 15일 ~ 1980년 10월 6일)는 일본의…다케노코시 시게마루(일본어: 竹腰 重丸 (たけのこし しげまる), 1906년 2월 15일 ~ 1980년 10월 6일)는 일본의 축구인으로 축구 지도자 겸 심판직도 수행했다.
야부우치 기요시(일본어: 薮内 (やぶうち) 清 (きよし):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2일-2000년(헤이세이…야부우치 기요시(일본어: 薮内 (やぶうち) 清 (きよし): 1906년(메이지 39년) 2월 12일-2000년(헤이세이 12년) 6월 2일)는 일본의 천문학자・과학사학자다. 경도대학 명예교수. 처음에는 순수 천문학자였으나 신죠 신조의 영향을 받아 중국 역법사 연구로 전향했다. 효고현 고베시 출신. 코요중학교, 구제오사카고등학교(현 오사카대학) 이과병류를 거려 쇼와 4년(1929년) 경도제국대학 이학부 우주물리학과 졸업. 1929년 경도제국대학 부수(副手), 1935년(쇼와 10년) 동방문화학원 경도연구소(현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촉탁, 후에 동 기관 연구원을 역임했다. 1948년(쇼와 23년) 경도대학 연구원, 1949년(쇼와 24년) 동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로 임용되어 중국과학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진행시켰다. 1967년(쇼와 42년) 동 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그 사이 1955년(쇼와 30년)부터 일본천문학회 부이사장을 맡았다. 1969년(쇼와 44년) 경도대를 정년퇴직하고 동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쇼와 54년)까지 류코쿠대학 교수를 지냈다. 1970년(쇼와 45년) 자수포장 및 아사히상, 1972년(쇼와 47년) 미국과학사학회 조지 서튼 메달을 수상했다. 1976년(쇼와 51년)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83년 1월 일본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하마무라 준(Jun Hamamura, 1906년 2월 7일 ~ 1995년 6월 21일)은 일본의 배우이다. 후쿠오카시에서…하마무라 준(Jun Hamamura, 1906년 2월 7일 ~ 1995년 6월 21일)은 일본의 배우이다.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으며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경북 대구~1989년 6월 18일)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경북 대구~1989년 6월 18일)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5·6·7·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12월부터 1971년 6월까지는 7년 6개월 간 국회의장(6대~7대)을 역임했다. 이는 역대 국회의장 중 최장 재임기간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고 세례명은 아길로이다. 본관은 성산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코타니 마사오(일본어: 小谷 正雄 (こたに まさお): 1906년 1월 14일 - 1993년 6월 6일)는 일본의 물리학자다.…코타니 마사오(일본어: 小谷 正雄 (こたに まさお): 1906년 1월 14일 - 1993년 6월 6일)는 일본의 물리학자다. 동경대학・동경이과대학 겸임교수, 동경이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덴 테이키치의 차남 덴 테츠와, 가이바라정장 코타니 호타로의 장녀 코타니 후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 졸업 이후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강사, 이학부 조교수, 정교수를 역임했고, 동경대 이학부장, 오사카대학 기초공학부 교수를 지냈다. 또한 경도대에서도 교편을 잡아 겸임교수도 지냈다. 1960년 일본생물물리학회를 창설하고, 같은 해부터 20년 내리 동경이과대학 학장을 맡았고, 양자역학, 자전관리론, 배위자장이론, 생체고분자 연구 등에서 업적을 쌓았다. 아키히토의 교육계를 지내기도 했다.
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 たなかいさじ, 1906년 1월 3일 ~ 1987년 4월 11일)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법학…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 たなかいさじ, 1906년 1월 3일 ~ 1987년 4월 11일)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법학 박사이다. 중의원 의원 (1942년 ~ 1947년, 1949년 ~ 1983년), 제7-8대 자치청 장관 (1956년 ~ 1957년), 제44대 중의원 부의장 (1963년 ~ 1965년), 제22-23대 법무대신 (1966년 ~ 1967년), 제31대 법무대신 (1972년 ~ 1973년) 등을 지낸 바 있다.
정주얼자부(正珠爾扎布, 1906년 ~ 1967년 11월)는 만주국의 몽골족 출신 군인이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에 맞서…정주얼자부(正珠爾扎布, 1906년 ~ 1967년 11월)는 만주국의 몽골족 출신 군인이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에 맞서 만주-몽골 독립 운동을 벌이다 전사한 바보자부의 셋째 아들이며 링성의 사위로, 일본에서 교육받고 군인이 되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이었으며, 그때 보직은 제10군관구 참모장.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나카 다다시(田中正). 1945년 8월 소련군이 참전한 이후 해랍이 교외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계 군관들을 죽이고 소련군에 투항했다. 그 뒤 하바로프스크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푸순 전범관리소로 이감되었다. 사상개조를 받은 뒤 1960년 11월 28일 특사로 풀려나 국영 영림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반성실에 격리되었고, 1967년 11월 중순 어느 밤 영림장 텃밭의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이들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거나,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참여했다. 사후, 여러 사회단체에서 정리한 주요 친일파 목록에 등재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배희범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일본어: 松下幸之助, 1894년 11월 27일 ~ 1989년 4월 27일)는 일본의 사업가로 현재의…마쓰시타 고노스케(일본어: 松下幸之助, 1894년 11월 27일 ~ 1989년 4월 27일)는 일본의 사업가로 현재의 파나소닉을 세운 인물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전기산업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종교는 장로교이다.
서춘(徐椿, 일본식 이름: 大川慈種오카와 지슈, 大川豊注오카와 호추, 1894년 11월 24일 ~ 1944년 4월 5일)은…서춘(徐椿, 일본식 이름: 大川慈種오카와 지슈, 大川豊注오카와 호추, 1894년 11월 24일 ~ 1944년 4월 5일)은 한국의 언론인이다. 2·8 독립선언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였지만 나중에 친일 언론인으로 변절했으며 호는 오봉(五峰)이다.
나카야마 스케치카(일본어: 中山輔親, 1894년 11월 13일 ~ 1980년 4월 23일)는 일본의 옛 화족이자…나카야마 스케치카(일본어: 中山輔親, 1894년 11월 13일 ~ 1980년 4월 23일)는 일본의 옛 화족이자, 정치인이다. 귀족원 후작 의원으로 재직했다.
에도가와 란포(일본어: 江戸川 乱歩, えどがわ らんぽ, 1894년 10월 21일 ~ 1965년 7월 28일)는 일본의…에도가와 란포(일본어: 江戸川 乱歩, えどがわ らんぽ, 1894년 10월 21일 ~ 1965년 7월 28일)는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본명은 히라이 다로(일본어: 平井太郎 ひらい たろう)로, 필명인 에도가와는 미국의 문호인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23년 잡지 신청년에 단편 <2전짜리 동전>으로 데뷔했으며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 괴도 20면상 등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일본탐정작가클럽(이후 일본추리작가협회)을 창설해 초대이사장을 지냈다. 추리 작가의 등용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만드는 등 미스터리의 발전과 대중화에 힘써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 《명탐정 코난》에서도 코난이 단골서점에서 《괴도 20면상》을 사오는 장면이 있고, 테이탄 초등학교(청솔초등학교)의 담임교사도 에도가와 란포를 좋아하는 추리문학 팬이다.
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평양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구택대학 전문부 정치과를 수료하였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경력도 있으며 의성단 부단장을 역임하였다. 연안면장과 연백군수, 연백수리조합장을 역임하였다.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이었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야마자키 이와오(일본어: 山崎 巌, やまざき いわお, 1894년 9월 16일 ~ 1968년 6월 26일)는 일본의 내무…야마자키 이와오(일본어: 山崎 巌, やまざき いわお, 1894년 9월 16일 ~ 1968년 6월 26일)는 일본의 내무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내무대신, 자치대신 (自治大臣) 을 지냈다. 형은 농림대신, 체신대신을 지낸 중의원 의원 야마자키 다쓰노스케(山崎達之輔, 1880 ~1948)이며, 조카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야마자키 헤이하치로(山崎平八郎, 1911 ~ 1989)이다.
이시다 센타로 (일본어: 石田 千太郎, 1894년 8월 5일 ~ 몰년 미상)는 일본의 체신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조선총독부…이시다 센타로 (일본어: 石田 千太郎, 1894년 8월 5일 ~ 몰년 미상)는 일본의 체신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장, 아이치현 의회 의원 (5선), 조선석탄 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기타노 마사지(일본어: 北野 政次, 1894년 7월 14일 ~ 1986년 5월 17일) 은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다.…기타노 마사지(일본어: 北野 政次, 1894년 7월 14일 ~ 1986년 5월 17일) 은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군의관으로서 육군 중장이며, 의학박사이다. 인체에 대한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았던 731부대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만주에서 유행한 유행성출혈열에 대해 연구했는데 유행성균을 원숭이에게 주입해 결과를 알아보는 논문을 남겼다. 다른 관련자와 마찬가지로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일본에 돌아왔다.
후쿠모토 가즈오(일본어: 福本 和夫 (ふくもと かずお): 1894년 7월 4일 - 1983년 11월 16일)는 일본의…후쿠모토 가즈오(일본어: 福本 和夫 (ふくもと かずお): 1894년 7월 4일 - 1983년 11월 16일)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경제학자・과학기술사학자・사상사학자・문화사학자다. 제2차 일본공산당의 이론적 지도자로, 1920년대 일본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장남이 후쿠모토 쿠니오. 돗토리현 쿠메군 시모호쿠죠촌(지금의 토하쿠군 호쿠에이정)에서 후쿠모토 노부조(福本 信蔵)의 3남으로 태어났다. 구제 쿠라요시중학교, 구제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마츠에고등학교(현재의 시마네대학) 교수로 취임. 1922년 문부성 재외연구원으로서 영국・독일・프랑스를 2년 반 유학했다. 유학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에서 헝가리 철학자 루카치 죄르지와 독일 사상가 카를 코르슈의 지도하에 마르크스주의를 배웠다. 당시 일본공산당원 대부분은 마르크스 등 사상가들의 저술의 번역본을 읽고 논의한 반면,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3개국 유학 경험이 있던 후쿠모토는 각국 언어 원문으로 글을 이해하고 읽었다고 한다. 1924년 귀국해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현재의 야마구치대학) 교수로 전임한다. 귀국 직후 『마르크스주의』지에 게재한 논문 「경제학 비판 가운데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범위를 논함」에서 후쿠다 도쿠조・카와카미 하지메・타카하타 모토유키 등 선행 자본론 연구자들을 비판해서 일약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야마구치고상을 사직하고 상경, 당시 탄압으로 인해 해산되었던 일본공산당의 재건을 도모하였고, 1925년 사노 마나부가 결성한 공산당 재건뷰로에 참여했다. 후쿠모토는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야마카와 히토시의 논문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1922년)을 『마르크스주의』 1926년 2・5월호에 발표한 「야마카와씨의 방향전환론의 전환보다 시작을 해야 한다」에서 비판했다. 이어서 발표한 논문 「방향전환은 어떠한 제과정을 취할까」, 「경제학 비판에 있어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범위를 논함」 등에서는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적 방법으로 자본주의 사회현실의 운동법칙을 밝히고 “분리・결합론”을 전개했다. 『마르크스주의』 1925년 2월호에 발표한 「유물사관의 구성과정」에서는 카와카미 하지메의 유물사관 연구방법론을 공격했다. 후쿠모토는 야마카와주의를 경제운동과 정치운동의 차이를 명확히 하지 않은 “절충주의”이자 “조합주의”라고 비판하고, 운동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론투쟁을 통해 노동자 외부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의식을 주입하는 첨예한 전위당에 의한 이론투쟁과 정치투쟁이 필요함을 설했다. 1926년 2월 12일 『사회의 구성: 나란한 변화의 과정』, 1926년 3월 22일 『유물사관과 중간파사관』, 1926년 5월 27일 『경제학 비판의 방법론』, 1926년 11월 20일 『이론투쟁』이 연달아 간행되고, 이 무렵 후쿠모토주의가 일본 좌파 사상계를 풍미했다. 1926년 12월, 고시키온천에서 극비리에 개최된 일본공산당 제3회 대회에서 당의 재건이 결의되자 입당하여 제2차 일본공산당 상임위원・당정치부장에 취입하고, 이론적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에서 발령한 27년 테제에서 후쿠모토주의가 비판받자 냉큼 실각당하여 당내 영향력을 상실했다. 1928년 6월 3・15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이후 1942년까지 14년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문화사에 대한 관심으로 야나기타 쿠니오와 서신을 왕래했다. 아들 후쿠모토 쿠니오(당시 17세)를 보내 책을 빌려가기도 했다고 야나기타의 일기에도 기재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요양하다가 1950년 당활동에 복귀했다. 같은 해 실시된 제2회 참원선에서 돗토리현 선거구에 일본공산당 공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후쿠모토는 2만 6508표를 득표했고, 당선자 나카타 요시오(일본사회당)는 13만 1376표, 차점 낙선자 토쿠야마 지츠조는 9만 5731표였다. 1951년 9월 미군정 점령정책을 위반했다고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코민포름의 일본공산당 비판에서 비롯된 50년 문제에서는 통일협의회를 조직해 당의 재건을 주장했다. 육전협 이후 당중앙과의 대립이 심화되어 1958년경 당에서 제명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로는 독립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입장을 취했다. 다만 후쿠모토가 정말 제명되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공산당에서 쫓겨난 뒤로는 농업문제, 과학기술사 연구에 전념했다. 후쿠모토는 근세 포경기술 등을 연구하여 일본 르네상스론을 구축하려 한 독특한 과학기술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옥중에서부터 우키요에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관계의 연구자로서의 개척자가 되어 『호쿠사이와 인상파・입체파 사람들』(1955년) 등을 출판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을 일정 유보하면서도 지지했다. 1983년 사망. 향년 89세. 혁마르파의 코부시서방에서 저작집이 간행되었고, 2011년 5월 완결기념모임이 개최되었다.
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 독립선언 당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유학 후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하였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이후 제헌(서대문, 한국민주당), 제3대(서대문갑, 민주국민당), 제4대(서대문갑, 민주당), 제5대(서대문갑, 민주당), 제6대(전국, 자유민주당), 제7대(전국, 신민당)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민주당 창설에 참여하여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 국무총리에 두 번 지명되었으나 인준부결되었고, 군사 정권에서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 한민당 출신 유일한 초대 내각 입각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호는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아베 간(일본어: 安 (あ)倍 (べ) 寛 (かん), 1894년 4월 29일 ~ 1946년 1월 30일)은 일본의 정치인이다.…아베 간(일본어: 安 (あ)倍 (べ) 寛 (かん), 1894년 4월 29일 ~ 1946년 1월 30일)은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을 2선 역임했다. 소속 정당은 일본진보당. 외무대신을 역임한 정치가 아베 신타로의 부친이며,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친조부가 된다.
고타키 모토이(일본어: 上滝 基, 1894년 ~ ?)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후쿠오카현 출신이다. 1917년 고등시험…고타키 모토이(일본어: 上滝 基, 1894년 ~ ?)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후쿠오카현 출신이다. 1917년 고등시험 행정과에 합격하고, 이듬해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프랑스법과를 졸업하여 바로 조선총독부 시보(試補)가 되었다. 1919년 도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사무관 겸 총독부 사무관, 식산국 사무관, 전매국 서무과장, 전매국 제조과장, 전매국 사업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 총독부 사무관 겸 중추원 서기관, 총독관방 인사과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사 편수회 간사를 겸직하였고, 1936년 9월부터 1941년 1월까지 경상북도 지사로 재직하였다. 말년에는 조선총독부 인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남겼다.
하야마 요시키(葉山嘉樹, 1894년 3월 12일 ∼ 1945년 10월 18일)는 일본 후쿠오카 현 출신 프롤레타리아…하야마 요시키(葉山嘉樹, 1894년 3월 12일 ∼ 1945년 10월 18일)는 일본 후쿠오카 현 출신 프롤레타리아 작가이다.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지만 학비 미납으로 제적당했다. 외항 선원으로서 홋카이도와 인도 콜카타를 왕래하는 화물선에서 근무한 경험을 훗날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하고, 1920년에는 나고야 시멘트 공장에 근무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다가 해고당하기도 한다. 그 후 나고야 노동자 협회에 가입해 각종 노동 쟁의를 지도하고, 1923년에 나고야 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된 후 미결수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창작 활동에 열중하는 한편 관동 대지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1925년 출옥 후 그의 대표작이자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매춘부>, <바다에 사는 사람들>, <시멘트 통 속의 편지>를 발표해 신진 작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다. 다소 도식적이고 관념적이던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비해 하야마는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꾸밈없이 그려 내어 문학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한 단계 높였다. 그러나 1934년 무렵, 특별 고등 경찰에 의한 사상 통제가 강화되고 일본의 국론이 중국 대륙 진출로 통일되자 하야마는 전향해 당시의 체제에 대한 지지 입장을 강화하게 된다. 1945년 만주로 이주하기 위해 건너갔던 그는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귀국하던 도중, 그해 10월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