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열(金長烈, 1897년 또는 1899년 5월 24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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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열(金長烈, 1897년 또는 1899년 5월 24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이영섭(1899년 5월 22일~1982년 8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천해(金天海, 1898년 5월 10일 ~ ?)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김천해(金天海, 1898년 5월 10일 ~ ?)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본명은 김학의(金鶴儀)이다.
이정래(李晶來, 1899년 종로 - 1989년 7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 제5대, 제6대 국회의원을…
이정래(李晶來, 1899년 종로 - 1989년 7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 제5대,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타카미네 타에코(일본어: 高峰 妙子 たかみね たえこ[*], 1899년 5월 6일 - 1980년 11월 15일)는 전…
타카미네 타에코(일본어: 高峰 妙子 たかみね たえこ[*], 1899년 5월 6일 - 1980년 11월 15일)는 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 남역 주연 스타 (첫 공연 주연. 남역 스타 제 1호. 하나구미ㆍ유키구미 주연 념역이었다)이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1기생, 애칭은 "앗상"이다. 동기생으로는 오오에 후미코, 쿠모이 나미코, 오구라 미유키, 유라 미치코 등이 있다. 후쿠이현 사카이군 혼죠무라 (현 아와라시) 출신이다. 전 다카라즈카 가극단ㆍ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성악 강사였다. 예명의 유래는 오구라 백인일수의 제 4번 : 야마베노 아카히토의田子之浦に 打出て見れば 白妙の 富士の高嶺に 雪は降りつつ타고노우라에 나가 보면 백묘한 후지의 고령에 눈은 내리면서에서 명명되었다.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년 5월 4일 ~ 1995년 7월 18일)는 일본의 정치인, 사회활동가이다.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년 5월 4일 ~ 1995년 7월 18일)는 일본의 정치인, 사회활동가이다.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지만 불기소 처분됐다.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 총재, 중의원 의원, 일본재단 회장, 후쿠오카공업대학 이사장을 역임했다. 자식은 2남 다카시(尭), 3남 요헤이 등이 있으며 손자는 다카시의 아들 히로요시(博義) 등이 있다.
후지시마 가이지로(일본어: 藤島 亥治郎, 1899년 5월 1일 ~ 2002년 7월 15일)는 일본의 건축사가다.…
후지시마 가이지로(일본어: 藤島 亥治郎, 1899년 5월 1일 ~ 2002년 7월 15일)는 일본의 건축사가다. 1933년부터 종전 때까지 조선의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 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한국의 건축에 관한 조사, 보존 활동을 계속했다. 전후에는 히라이즈미 유적 조사회를 만들어 모쓰지, 쥬손지를 정비하고, 나카센도 여인숙의 연구등을 실시했다. 또, 오사카 시텐노지 가람의 재건 계획을 수립했다.
미즈시마 산이치로(일본어: 水 (みず)島 (しま) 三 (さん)一 (いち)郎 (ろう), 1899년 3월 21일 ~ 1983년…
미즈시마 산이치로(일본어: 水 (みず)島 (しま) 三 (さん)一 (いち)郎 (ろう), 1899년 3월 21일 ~ 1983년 8월 3일)는 일본의 화학자로, 구조화학 분야를 연구하였다.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 1899년 3월 6일~1976년 9월 4일)는 나가노현 나가노시 출신의 헌법학자이다. 도쿄 대학…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 1899년 3월 6일~1976년 9월 4일)는 나가노현 나가노시 출신의 헌법학자이다. 도쿄 대학 명예교수였다. 미노베 다쓰키치의 제자로, 그 후계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퇴직 후에 스예노부 산지(末延三次)와 함께 릿쿄 대학 법학부 창설에 공헌했다. 1923년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에 동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34년에 동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에는 칙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59년에 도쿄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이후 동 대학 명예교수, 릿쿄 대학 헌법 및 프랑스 공법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릿쿄 대학 초대 법학부장을 지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일본국 헌법으로의 이행을 법적으로 해석하면서 제창한 8월 혁명설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와의 오다카·미야자와 논쟁(이른바 국체논쟁)도 유명하며, 공공의 복지의 해석에서 일원적 내재설을 주장하는 등 이후의 헌법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법시험 등의 수험계에서는 미야자와설은 통설로 알려져 있으며, 제자 아시베 노부요시가 그 지위를 이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일본야구기구의 제4대 커미셔너(커미셔너 위원회의 위원장)를 지냈다.
미야모토 유리코(일본어: 宮本 百合子, 1899년 2월 13일 ~ 1951년 1월 21일)는 일본의 소설가, 사회 활동가이자…
미야모토 유리코(일본어: 宮本 百合子, 1899년 2월 13일 ~ 1951년 1월 21일)는 일본의 소설가, 사회 활동가이자 문학평론가로 다이쇼 시대와 초기 쇼와 시대에 활동하였다.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여성 해방 운동에 참여한 것과 그의 자서전으로 알려져 있다. 미야모토는 미국과 소련을 다녀와 귀국하였으나 여러 저술들이 검열되었고 정치적 관점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구속되었다. 주요한 저술로 《반슈 평야》(播州平野), 《풍지초》(風知草) 등이 있다. 그와 남편인 미야모토 겐지는 일본의 여성과 노동계급 해방운동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혼전 성은 주조(中條)이다.
오다카 도모오(일본어: 尾高 朝雄 (おだかともお)、1899년 1월 28일~1956년 5월 15일)는 일본의 법철학자이다.…
오다카 도모오(일본어: 尾高 朝雄 (おだかともお)、1899년 1월 28일~1956년 5월 15일)는 일본의 법철학자이다. 일본학사원 회원이자, 제3기 일본학술회의 부회장이었다.
다카야나기 겐지로(高柳健次郎, 1899년 1월 20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 1990년 7월 23일 요코스카시)는 일본의…
다카야나기 겐지로(高柳健次郎, 1899년 1월 20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 1990년 7월 23일 요코스카시)는 일본의 공학자이자 텔레비전 발전의 선구자였다. 서방 세계에서 큰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세계 최초의 전자식 텔레비전 수신기를 만들었고, '일본 텔레비전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
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공동농장의 운영을 맡고 좌익 농민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 우익으로 전향하고 1926년 메이데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국제"(建国祭)를 기획하며 이름을 알렸다. 1942년 익찬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패전 이후 GHQ에 의해 공직추방당했다. 조치가 해제된 뒤 1951년 우익 정당인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国党)을 조직하여 매번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에 성공한 적은 없다. 1960년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한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과 고모리 가즈타카의 시마나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재판을 받기도 했다. 선거운동 중에는 차에 깃발을 내걸고 길거리 연설을 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군소 우익단체들 특유의 "가선차"(街宣車) 문화의 시초라고 여겨진다. 1990년 91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요코타 마사토시(일본어: 横田 正俊, 1899년 1월 11일~1984년 7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강기문(姜己文, 1908년~?)은 한국의 정치인이다.
최윤식(崔允植, 1899년 ~ 1960년 8월 3일)은 대한민국의 수학자이다.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최윤식(崔允植, 1899년 ~ 1960년 8월 3일)은 대한민국의 수학자이다.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제1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도쿄 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해 귀국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경성공업학교 등의 교사로 있었다. 194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에 이어 대한 수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대한수학회가 창립되자 초대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해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1954년 4월 6일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추진할 때 '재적의원 203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것을, 최윤식 교수가 203명의 2/3이 135.33…명이므로, 반올림해서 135명만 찬성하면 된다고 이승만 측에 말해주었다. 당시 개헌에 필요한 한표가 모자랐던 상황에 '사사오입'(四捨五入, 4는 버리고 5는 올린다)이라는 아이디어는 궤변이라고 알려져 있다. 1955년 그후, 55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귀국, 56년 서울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문교부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교부로부터 교육자 근속상을 수여받았다. 사사오입 개헌에 기여하였다.
박정근(朴定根, 1899년 ~ 1980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박정근(朴定根, 1899년 ~ 1980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 중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에 출마했으며 15.8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자유당에 입당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소속으로 전주시에 공인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완주군 갑에 출마하게 됨에 따라 당에서 제명처분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같은 해 치러진 진안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쿠가 노보루(일본어: 空閑 昇, 1887년 12월 8일 ~ 1932년 3월 28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최종…
쿠가 노보루(일본어: 空閑 昇, 1887년 12월 8일 ~ 1932년 3월 28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좌.
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
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 신익희, 윤보선,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일본어: 東久邇宮稔彦王, 1887년 12월 3일~1990년 1월 20일)은 일본의 구황족이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일본어: 東久邇宮稔彦王, 1887년 12월 3일~1990년 1월 20일)은 일본의 구황족이자 육군 군인이다. 계급은 육군 대장. 1944년 도조 히데키 후임으로써 일본 제국 부총리 겸 총리 권한대행 직을 이행하며 히로히토의 섭정을 잠시 지냈고 1945년 8월 17일부터 1945년 10월 9일까지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한 일본 제국의 제4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전후 일본의 첫 내각총리대신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패전 처리 내각으로서 헌정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족 내각을 조성하였으며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의 조인, 육·해군의 해체, 복원의 처리를 실시하였다. 총리 재임 시절 일본의 일억 총참회(一億總懺悔)를 주장했지만 악명높았던 치안유지법을 고수하려다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민주화 방침에 의해 오래가지 못했고, 역대 일본 내각 성립 이래 재임 최단 기간인 54일 만에 총사퇴했다. 총리 직을 사퇴한 후에는 본인의 궁호를 딴 이름의 신흥 종교인 히가시쿠니교를 창시하여 그 교주가 되었고, 이때, 나루히코 본인은 GHQ 측에 자신의 신적강하를 요구하여 황적에서 삭제되었다. 1990년 1월 20일에 향년 10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혼마 마사하루(本間 雅晴, 1887년[메이지 20년] 11월 27일 - 1946년[쇼와 21년] 4월 3일)는 일본의 육군…
혼마 마사하루(本間 雅晴, 1887년[메이지 20년] 11월 27일 - 1946년[쇼와 21년] 4월 3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최후계급은 육군 중장. 영전은 종삼위·훈일등. 육사 19기 은사(恩賜)·육대 27기 은사. 태평양전쟁에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하였다. 영국통(通)으로 인도주의자로 연합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으나 죽음의 바탄 행진에서의 부하의 행위에 책임을 물려 전후 총살형에 처해졌다.
아시다 히토시(일본어: 芦田 均, 1887년 11월 15일 ~ 1959년 6월 20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아시다 히토시(일본어: 芦田 均, 1887년 11월 15일 ~ 1959년 6월 20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1948년 3월 10일부터 1948년 10월 15일까지 제4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구로다 시게노리(일본어: 黒田重徳, 1887년 10월 25일 ~ 1954년 4월 30일)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태평양…
구로다 시게노리(일본어: 黒田重徳, 1887년 10월 25일 ~ 1954년 4월 30일)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태평양 전쟁 시의 필리핀 방면군 사령관으로 육군 중장이었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홋타 마사쓰네(堀田正恒)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화족이다. 귀족원 백작의원. 옛 이름은 나베시마 나오오토(鍋島 直言)로서…
홋타 마사쓰네(堀田正恒)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화족이다. 귀족원 백작의원. 옛 이름은 나베시마 나오오토(鍋島 直言)로서 친부는 (하스노이케)나베시마 나오토 자작으로 그의 차남이다. 노중 홋타 마사요시의 차남 홋타 마사토모 백작의 데릴사위로서 홋타 대로계의 당주가 되었다. 1915년 도쿄 제국 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사카이 타카시(酒井 隆, Sakai Takashi; 1887년 10월 18일 – 1946년 9월 3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사카이 타카시(酒井 隆, Sakai Takashi; 1887년 10월 18일 – 1946년 9월 3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육군의 중장으로, 일본 점령 하의 홍콩 총독으로서의 역할로 알려져 있다.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일본어: 朝香宮鳩彦王 아카사노미야 야스히코 오[*],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일본어: 朝香宮鳩彦王 아카사노미야 야스히코 오[*],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는 일본 제국의 황족이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군인이다. 신적강하 이전엔 황족을 나타내는 접미사(미야)와 관작명(왕)이 붙었으나 신적강하 이후엔 아사카 야스히코(朝香鳩彦)로 개명되었다. 아사카는 쇼와 천황에게 숙부뻘이자 고모부가 된다.
오노 로쿠이치로(일본어: 大野緑一郎, 1887년 10월 1일 ~ 1985년 9월 2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변호사이다.…
오노 로쿠이치로(일본어: 大野緑一郎, 1887년 10월 1일 ~ 1985년 9월 2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변호사이다. 제37대 경시총감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하였다. 제82대・제83대 내각총리대신 하시모토 류타로의 외조부이다.
마쓰모토 이오리(일본어: 松本 伊織, 1887년 9월 5일 ~ 몰년 미상)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에히메현 출신으로…
마쓰모토 이오리(일본어: 松本 伊織, 1887년 9월 5일 ~ 몰년 미상)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에히메현 출신으로, 조각가 마쓰모토 신스케(松本新助)의 셋째 아들이다.
하야시 시게조(일본어: 林 繁蔵, 1887년 9월 5일 ~ 1945년 10월 3일)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야마모토…
하야시 시게조(일본어: 林 繁蔵, 1887년 9월 5일 ~ 1945년 10월 3일)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관료이다. 야마모토 사치오는 그의 사위이다.
아소 다로(일본어: 麻生 太郎 (あそう たろう), 1887년 9월 ~ 1919년 3월)는 일본의 사업가이다. 일본의 제92대…
아소 다로(일본어: 麻生 太郎 (あそう たろう), 1887년 9월 ~ 1919년 3월)는 일본의 사업가이다. 일본의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인 동명의 아소 다로는 손자이다. 석탄 채굴업자인 아소 다키치(麻生太吉)의 삼남으로 1887년 9월에 태어났다. 1908년에 차형인 鶴十郎가 유학처인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다로는 구마모토에서 명문학교로 불리는 세세코(済々黌)에 기숙사로부터 다니고 있었는데 사업의 후계자로 기대하였던 鶴十郎를 잃은 부모인 다키치와 야스는 다로를 퇴학시키고 후쿠오카에 다로를 위한 집을 빌려 후쿠오카상업학교 교감나 후쿠오카법원 판사 등 쟁쟁한 전문가들을 가정교사로 고용하여 공부시켰다. 아버지인 다키치가 경영하는 석탄 채굴 사업을 핵심으로 하는 아소 상점 사원이 되어 1910년 결혼하였다. 아내는 자작인 가노 히사요시의 6녀 나쓰코(夏子)이다. 부부 사이에 2남 2녀가 태어났다. 다카키치(太賀吉), 艶子, 典太, 辰子이다. 아소 상점의 후계자였으나 1919년 3월에 33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장티푸스 진단을 받은걸로 확인되었다.
이범승(李範昇, 1887년 음력 8월 29일 ~ 1976년 9월 3일, 충남 연기)은 일제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관료이며…
이범승(李範昇, 1887년 음력 8월 29일 ~ 1976년 9월 3일, 충남 연기)은 일제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관료이며, 제2대 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9월부터 도서관 설립 운동, 홍보 활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도서관 설립 운동, 책읽기 운동을 추진하였다. 해방 직후 초대 경기도 경성부 부부윤과 1945년 10월부터 1946년 6월까지 경기도 경성부윤을 역임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제2대, 5대 2선 국회의원이었다. 1918년~1920년 남만주철도회사에 재직했고, 남만철도회사 재직 중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수학했다. 그는 1919년 9월 종로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유료 도서관을 인수하여 종로 경성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아동, 문화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취운동의 취운정 경성도서관을 인수, 같이 운영했다. 1926년 경영난으로 도서관을 경성부에 기증하여, 후일 서울시립종로도서관의 전신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로 도서관 아동열람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1926년 9월 고등관 시험에 합격하여 사무관이 되고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 임야조사위원회, 황해도청 산업과장, 경상북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재직하다 1936년 사직했다. 해방 직후 경기도 양주의 치안활동에 참여하다가, 경성부 부부윤, 양주경찰서장,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52년 제2대 국회 민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2대 민의원으로 활동했고, 1960년 제5대 국회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물러났다. 그는 도서관학이나 문헌정보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내 각 대학, 학교들의 열악한 도서시설을 보고 도서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대중에게 공개, 개방하는 무료 도서관을 최초로 경영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아호는 지우(至愚)이다.
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
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 14일-1981년(쇼와 56년) 3월 6일)은 일본의 노동운동가다. 사회주의자에서 시작해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끝에 전후 일본사회당에서 의원을 지냈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이라쿠정의 요코하마 유곽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요코하마시 노바(野庭, 현재의 고난구)에서 보냈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외국인상관의 보-이로 일하다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근무하던 가운데 『만조보』에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가 쓴 반전시, 퇴사의 변을 보고 감동하의 노동운동에 투신, 코토쿠와 사카이가 발행한 주간지 『평민신문』의 비전론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자가 된다. 이후 사카이의 주선으로 와카야마현 무로군의 『무로신보』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1904년 『평민신문』 편집주간으로 참여했다. 『평민신문』에서 6살 연상의 칸노 스가와 내연관계가 되어 1907년 결혼했다. 이 때 사회주의 전도 과정에서 타나카 쇼조를 알게 되어 아시오 광독사건을 소재로 「야나카촌 멸망사」를 저술했다. 1908년 적기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금고 1년에 처해진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 스가가 코토쿠와 불륜관계가 되었다. 코토쿠는 모로오카 치요코와 이혼했고, 스가도 일방적으로 옥중의 아라하타에게 이혼장을 보냈다. 분노한 아라하타는 2년 뒤 출옥하여 권총으로 스가를 죽이려 했다가 단념하고 대신 카츠라 타로 총리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한편 스가 및 코토쿠와 소원해진 때문에 이후 코토쿠 대역사건에서 검거 및 처형을 면했다. 코토쿠와 스가는 불륜 사건으로 동료들에게 백안시되었기 때문에 아라하타 외에도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연좌를 면했다. 출옥 후 사카이가 설립한 매문사에 참여, 야마카와 히토시, 타카바타케 모토유키 등과 함께 꾸준히 체제변혁을 도모했다. 1912년에는 오스기 사카에와 『근대사상』을 창간했다. 하지만 생디칼리슴을 주장한 오스기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아라하타의 대립이 가시화된 끝에 둘은 결별했다. 아라하타는 관서 지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0년 일본사회주의동맹, 1922년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에 각각 참여했다. 그러나 1923년 제1차 일본공산당 사건으로 사카이 토시히코와 함께 검거되었고, 제1차 일공당은 아라하타의 유일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아라하타는 잔무 처리를 위한 뷰로에 참여하여 당재건을 목표로 했지만 뷰로 내에서 후쿠모토 카즈오의 이론이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당재건 활동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후쿠모토이즘에 의문을 제기한 아라하타는 후쿠모토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있던 젊은 활동가들에게 격렬하게 비방을 받았다. 이후 일공당은 후쿠모토이즘에 따라 제2차 일본공산당으로 재건되지만, 아라하타는 제1차 일공당 해산에 찬성했던 사노 마나부, 토쿠다 큐이치가 재건 중심세력이 된 것에 분노하여 애제자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일공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27년 야마카와 히토시, 이노마타 츠나오 등과 함께 『노농』을 창간, 노농파의 중심 멤버로서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향도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반파시스트 운동을 주도한 일본무산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1937년 인민전선 사건으로 야마카와, 카토 칸쥬 등 400여명과 함께 투옥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살이를 한다. 전후 전금동맹 위원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중의원 의원을 2기(중선거구 도쿄 제4구) 맡지만, 1948년 일사당을 탈당했다. 1949년 1월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주의정당결성추진협의회(소위 간손 신당)을 모체로 무소속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관동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뒤로는 정치에서 물러나 평론활동에 전념했다. 1950년 12월 소련에 대한 평가를 놓고 코보리 진지와 야마카와 히토시·사키사카 이츠로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아라하타는 코보리의 주장에 찬동하지는 않았지만 코보리가 간손 신당의 실무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코보리의 편을 들어 1951년 결성된 사회주의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소련파 경향을 선명하게 한 사키사카의 사회주의협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신좌파 운동이 흥기할 때 일시적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지만 내부 게발트 등 막장짓에 실망하여 다시 문필활동에만 전념했다.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의 토무라 잇사쿠가 출마했을 때 오다 마코토 등이 ‘산리즈카 투쟁과 토무라 잇사쿠씨에 연대하는 회’를 만들자 거기 참가했다. 1981년 3월 6일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타마가와 병원에서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우시지마 미쓰루(일본어: 牛島 満, 1887년 7월 31일 ~ 1945년 6월 23일) 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우시지마 미쓰루(일본어: 牛島 満, 1887년 7월 31일 ~ 1945년 6월 23일) 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수비대를 지휘하였고, 섬의 함락과 함께 자결하였다.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1908년 육군사관학교를 28기로 졸업했고, 육군대학을 1916년에 졸업했다.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 대위로 진급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주로 야전 지휘와 후방 업무를 두루 경험하고, 1937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여단장이 되었다. 이때 중일전쟁 남경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일본으로 돌아와 여러 교육직을 역임하였다. 1944년 오키나와 방위를 담당하는 제32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1945년 4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미국의 상륙부대에 대항하여 맞섰지만, 패배가 확실해지자 6월 23일 조 이사무(長勇) 참모장과 함께 전통적인 할복의식으로 자결하였다.
시게미쓰 마모루(일본어: 重光 葵, 1887년 7월 29일~1957년 1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제2차…
시게미쓰 마모루(일본어: 重光 葵, 1887년 7월 29일~1957년 1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세 번 외무대신을 지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USS 미주리에 올라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사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훈했다.
가타야마 데쓰(일본어: 片山 哲, 1887년 7월 28일 ~ 1978년 5월 30일)는 일본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종전…
가타야마 데쓰(일본어: 片山 哲, 1887년 7월 28일 ~ 1978년 5월 30일)는 일본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종전 이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내각총리대신직을 역임했는데, 일본 최초의 사회당 출신 총리이자 기독교인 총리였다.
도리야마 기이치(일본어: 鳥山 喜一 (とりやま きいち), 1887년 7월 17일~1959년 2월 19일)는 일본의…
도리야마 기이치(일본어: 鳥山 喜一 (とりやま きいち), 1887년 7월 17일~1959년 2월 19일)는 일본의 역사가이다. 주 연구 분야는 동양사, 발해사이다.
시라토리 도시오(일본어: 白鳥 敏夫, 1887년 6월 8일 ~ 1949년 6월 3일)는 주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일본의…
시라토리 도시오(일본어: 白鳥 敏夫, 1887년 6월 8일 ~ 1949년 6월 3일)는 주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숙부는 동양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이며, 일본 외무 대신을 지낸 이시이 기쿠지로도 숙부에 해당된다.
다카야나기 겐조(일본어: 高柳 賢三(たかやなぎ けんぞう)、1887년(메이지 20년) 5월 11일 - 1967년 6월…
다카야나기 겐조(일본어: 高柳 賢三(たかやなぎ けんぞう)、1887년(메이지 20년) 5월 11일 - 1967년 6월 11일)는 일본의 법학자이다. 전문은 영미법(英米法)이다.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위계(位階)는 정3위(正三位)이다. 일본 도쿄 대학(東京大学) 명예교수(名誉教授)이자 세이케이 대학(成蹊大学) 명예교수였으며,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貴族院勅選議員)이었다. 다이쇼(大正) ・ 쇼와(昭和) 시기 일본을 대표하는 영미법 학자로써 알려져 있다. 그의 제자로 스에노부 신지(末延三次), 다나카 가즈오(田中和夫), 모리야 요시테루(守屋善輝) 등이 있으며, 이들 역시 일본을 대표하는 법학자이다.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일본어: 北白川宮成久王 키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오[*], 1887년(메이지 20년) 4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일본어: 北白川宮成久王 키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오[*], 1887년(메이지 20년) 4월 18일 ~ 1923년(다이쇼 12년) 4월 1일)는 일본의 황족이며 육군 장교이다.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제3왕자로 태어났으며, 비는 메이지 천황의 제7황녀 가네노미야 후사코 내친왕이다.
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본명 한자: 趙鏞殷, 1887년 5월 2일~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본명 한자: 趙鏞殷, 1887년 5월 2일~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의 정치인 겸 교육인이다.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필명으로 사용하던 조소앙(趙素昻)이 훗날을 기하여, 1918년 4월 30일 이후부터 개명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 귀국하여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48년 사회당을 만들어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시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의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를 창시한 바있다. 정치, 교육, 경제 평등을 말하는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중국 기독교 정치가 쑨원의 삼민주의와 일본 유학시절에 번역한 "천부인권론"의 기독교적 '만민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1918년부터 정립한 정치노선이다. 조소앙은 1911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지만 여섯개의 종교를 두루 아울러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5년 육성교를 창시하였다. 하지만 1918년 삼균주의를 정립한 이후에는 기독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종교통합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쓰카하라 니시조(일본어: 塚原二四三, 1887년 4월 3일 ~ 1966년 3월 6일)는 후쿠이현 출신의 일본제국 해군…
쓰카하라 니시조(일본어: 塚原二四三, 1887년 4월 3일 ~ 1966년 3월 6일)는 후쿠이현 출신의 일본제국 해군 군인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쓰카하라 후시미라고도 한다. 1908년에 해군병학교를 20등으로 졸업하였다. 원양항해, 포술학교학생, 수뢰학교학생을 거쳐 1911년에 본격적으로 근무하게 되어 전함, 해병단을 거치며 경험을 쌓았다. 1914년 12월 1일부터 1년간 해군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모가미>, <간토>, <치토세>, <이부키>의 항해장을 역임했다. 1921년 2월 25일에 요코스카 항공대에 부임하게 되어 이후 항공대에만 전념하게 된다. 1932년 11월 28일에 항공총무부장, 1933년 <아카기> 함장, 1934년 항공부대부장을 거쳐 항공부대와 항공교육에 열중한다. 만주사변 발발 후인 1937년 12월 1일에 항모부대인 제2항공대 사령장관이 되어 반달 후, 함재기를 타고 현지로 급파되어 최전선에서 지휘를 맡았다. 1938년 12월 15일에는 육상공격기가 주축이 된 제1연합항공사령장관이 되나 당초 목표였던 난징, 한커우의 공략이 완료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1939년 10월 3일, 재편된 제1연합항공대의 출격시 한커우에서 중국군의 기습폭격을 받아 쓰카하라는 왼쪽 어깨절단의 중상을 입고 1년간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요양중이던 1939년 11월에 중장으로 진급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츠카하라는 이 중상으로 인해 함상근무가 어렵게 되어 이후 기지 항공대 지휘관이 된다. 쓰카하라는 항공대에 열심이어서 동기인 나구모 중장이 진주만 공습시 자신의 부대도 참가시켜 달라고 청원하나 거절당한다. 진해항 사령관이 된 츠카하라는 1941년 필리핀/말레이 공략시 제11항공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된다. 타이완에서 필리핀으로 직접공격을 담당하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필리핀 폭격, 말레이 해전시 사이공 기지사령관을 거쳐 제22항공전대의 마쓰나가 소장과 전과를 나란히 해 공적을 쌓은 후제11항공대의 최전선인 라바울로 진출해 솔로몬 해역을 중심으로 활동범위를 넓혀나갔다. 1942년 10월에 라바울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쓰카하라는 일본으로 송환된 뒤 군직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러나 동년 12월 1일부로 다시 항공본부장이 되어 항공전의 최고책임자로 현장을 지원했다. 1945년 5월 1일,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와 같이 대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군 최후의 해군대장>이 된다. 그러나 자신은 곧 은퇴해 군사참모장으로 종전(終戰)공작을 시행 후 전쟁 후 조용히 살다가 1966년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나구모 주이치(일본어: 南雲 忠一, 1887년 3월 25일 ~ 1944년 7월 8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나구모 주이치(일본어: 南雲 忠一, 1887년 3월 25일 ~ 1944년 7월 8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다.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된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제국 해군을 지휘하였다.
아나미 고레치카(일본어: 阿南 惟幾, 1887년 2월 21일- 1945년 8월 15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제2차…
아나미 고레치카(일본어: 阿南 惟幾, 1887년 2월 21일- 1945년 8월 15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육군대신을 지냈다.
나카니시 이노스케(일본어: 中 (なか)西 (にし) 伊 (い)之 (の)助 (すけ): 1887년 2월 8일-1958년 9월…
나카니시 이노스케(일본어: 中 (なか)西 (にし) 伊 (い)之 (の)助 (すけ): 1887년 2월 8일-1958년 9월 1일)는 일본의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중의원의원을 2기 역임했다.
이노우에 사부로(井上三郎)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벌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 귀족원 후작 의원.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이노우에 사부로(井上三郎)는 일본 제국의 육군군벌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 귀족원 후작 의원.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공작의 삼남이며 이노우에 가쓰노스케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가사이 젠조(葛西善藏, 1887년 1월 16일 ~ 1928년 7월 23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아베 노부유키(일본어: 阿部 信行, 1875년 11월 24일 ~ 1953년 9월 7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정치인이다.…
아베 노부유키(일본어: 阿部 信行, 1875년 11월 24일 ~ 1953년 9월 7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정치인이다. 제36대 내각총리대신과 마지막 조선총독을 지냈다. 일본 패전후 할복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서울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항복문서를 조인했다. 이후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오노에 마츠노스케(일본어: 尾上松之助, 1875년 9월 12일 ~ 1926년 9월 11일)는 일본의 배우이다. 눈알의…
오노에 마츠노스케(일본어: 尾上松之助, 1875년 9월 12일 ~ 1926년 9월 11일)는 일본의 배우이다. 눈알의 마츠(일본어: 目玉の松ちゃん 메다마노마츠찬[*])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였으며, 본명은 나카무라 츠루조(일본어: 中村鶴三)이다. 때때로 크레딧에 기미키 유키오(일본어: 公木之雄), 오노에 타미자쿠(일본어: 尾上多見雀) 등의 이름으로 올라가기도 하였으며, 가부키 배우로서의 이름은 오노에 츠루사부로(일본어: 尾上鶴三郎)를 사용하였다. 1,0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일본 영화 최초의 슈퍼스타로도 불려왔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1875년 8월 15일~1932년 5월 20일)는 기후현(岐阜縣) 출신으로, 일본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1875년 8월 15일~1932년 5월 20일)는 기후현(岐阜縣) 출신으로, 일본의 사학자이다. 이병도의 직장(조선사편수회) 상사이기도 하다.
야나기타 쿠니오(일본어: 柳 (やなぎ)田 (た) 國 (くに)男 (お): 1875년 7월 31일-1962년 8월 8일)는…
야나기타 쿠니오(일본어: 柳 (やなぎ)田 (た) 國 (くに)男 (お): 1875년 7월 31일-1962년 8월 8일)는 일본의 민속학자・관료다. 메이지 헌법하에서 농무관료, 귀족원 서기장관을 역임했고, 2차대전 종전 이후부터 폐지될 때까지 최후의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했다. 1949년 일본학사원 회원이 되었고 1951년 문화훈장 수훈. 1962년 사망하면서 훈1등 욱일대수장을 추서받았다.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일본열도 각지 또는 당시 일본령 외지를 조사여행했다. 산촌 생활을 밀착취재한 초기작 『토오노 모노가타리』에서 “원컨대 이 이야기로써 평지인들을 전율케 하라”고 하였다. 일본 민속학의 개척자이며, 다수의 저작이 오늘날까지 재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