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완(鄭在浣, 1900년 1월 2일 ~ 1967년 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정재완(鄭在浣, 1900년 1월 2일 ~ 1967년 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요 대학 독철학과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여수군수 및 여수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도덕재무장세계대회한국대표, 제2대 ~ 제5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4선 의원)
조헌영(趙憲泳, 1901년 1월 8일 ~ 1988년 5월 2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수이다. 대한제국 경상북도…조헌영(趙憲泳, 1901년 1월 8일 ~ 1988년 5월 2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수이다.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字)는 응문(應文)이며 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하였으며, 귀국 이후에는 신간회 및 한의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서 경북 영양군 선거구에서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을 당했다. 납북 이후에는 평양의대 및 김일성대에서 의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자식들을 일찍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1937년 사망한 시인 조동진이 조헌영의 장남이고, 1968년 사망한 시인 조지훈이 조헌영의 차남이다.
김종열(金鍾烈, 1900년 - 198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김종열(金鍾烈, 1900년 - 198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이다. 이케다는 자신의 "소득 배증 계획"으로 유명하다. 이 계획은 겨우 겨우 10년의 세월에 국내총생산으로 불린 일본의 경제 총생산을 두배로 늘이는 데 목표로 삼았다. 그는 또한 일본과 미국 사이에 관계를 향상시키는 도움을 주었다. 추가로 그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책임을 맡았다.
구용서(具鎔書, 일본식 이름:具原一郎 1899년 10월 21일 ~ 1984년 4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초대 한국은행…구용서(具鎔書, 일본식 이름:具原一郎 1899년 10월 21일 ~ 1984년 4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초대 한국은행 총재이며, 제10대 상공부 장관이다. 본관은 창원.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온건주의로 사상전향하였다.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로 절반만 성사시키고 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시도는 결국 이승만 정권 말 사법 살인 희생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날조된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강세형(姜世馨, 1899년 6월 21일 ~ 1960년 8월 5일)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전라북도 익산 출생이며…강세형(姜世馨, 1899년 6월 21일 ~ 1960년 8월 5일)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전라북도 익산 출생이며, 원적지는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이다. 균학자 김삼순 박사의 부군이며,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의 이모부이다. 3.1 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일본을 거쳐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히틀러 유겐트의 찬미자로 발두어 폰 시라흐와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이범석에게 나의 투쟁을 전달하였다. 해방후에는 조선민족청년단에서 지정학, 국제유대인 문제에 대해 강의했다.
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공동농장의 운영을 맡고 좌익 농민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 우익으로 전향하고 1926년 메이데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국제"(建国祭)를 기획하며 이름을 알렸다. 1942년 익찬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패전 이후 GHQ에 의해 공직추방당했다. 조치가 해제된 뒤 1951년 우익 정당인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国党)을 조직하여 매번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에 성공한 적은 없다. 1960년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한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과 고모리 가즈타카의 시마나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재판을 받기도 했다. 선거운동 중에는 차에 깃발을 내걸고 길거리 연설을 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군소 우익단체들 특유의 "가선차"(街宣車) 문화의 시초라고 여겨진다. 1990년 91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박정근(朴定根, 1899년 ~ 1980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박정근(朴定根, 1899년 ~ 1980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 중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에 출마했으며 15.8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자유당에 입당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소속으로 전주시에 공인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완주군 갑에 출마하게 됨에 따라 당에서 제명처분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같은 해 치러진 진안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1898년 12월 27일 ~ 1960년 10월 12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일본사회당의 3대…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1898년 12월 27일 ~ 1960년 10월 12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일본사회당의 3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0년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암살당했다. 도쿄도 고토구의 미야케 마을 출생으로 1923년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해 1925년 일본 최초의 무산자를 대상으로 한 단일 정당 농민노동당의 서기장으로 추천되었으나 창당 3시간만에 정부의 명령으로 해산당한다. 1926년 노동농민당이 결성되지만 우파 사회민중당, 중간파 일본노동당, 좌파 노동농민당으로 분열되고 아사누마는 일본노동당에 참여해 1932년 분열된 정당들을 규합해 사회대중당을 창당했다. 이때 서기장 아소 히사의 군부에게 협력해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자는 이념을 지지했다. 1940년 아소의 사망 후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1942년 총선에서 사퇴하고 1945년 일본사회당에 결성되자 조직 부장에 취임했다. 1947년 서기장이던 니시오 스에히로가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 입당해 서기장 대리가 되었고 1948년 정식 서기장이 되어 1949년 중의원 선거에서 가타야마가 낙선해 임시 위원장 자리에 공백이 되자 국회 수반에 지명된다. 한때 잠시 물러났으나 1950년 복귀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을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가 충돌하자 절충안을 내놓았으나 좌우 분열을 막을 순 없었다. 1955년 사회당 통일로 서기장에 취임하고 1959년 중국을 방문해 미국이 중국과 일본 공동의 적이라는 강도 높은 발언을 했다. 1960년 3월 23일 니시오 스에히로의 탈당으로 민주사회당이 결성되고 스즈키 모사부로 위원장이 사임하자 후임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10월 12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민주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던 중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의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오자와 사에키(일본어: 小沢 佐重喜 (おざわ さえき), 1898년 11월 25일~1968년 5월 8일)는 10선 중의원…오자와 사에키(일본어: 小沢 佐重喜 (おざわ さえき), 1898년 11월 25일~1968년 5월 8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18선 출신의 현역 중의원 의원 오자와 이치로는 그의 장남이다.
박순천(朴順天, 1898년 10월 24일~1983년 1월 9일)은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이며 대한민국의 저술가, 여성운동가…박순천(朴順天, 1898년 10월 24일~1983년 1월 9일)은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이며 대한민국의 저술가, 여성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동래군과 경상남도 기장군과 경상북도 고령군을 거쳐 서울특별시에 거주한 그녀는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2, 4, 5,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 이후 친유신, 친5공 인사로 변신하여 송건호 등 재야인사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시나 에쓰사부로(일본어: 椎名 悦三郎 (しいな えつさぶろう), 1898년 1월 16일~1979년 9월 30일)는 8선 중의원…시나 에쓰사부로(일본어: 椎名 悦三郎 (しいな えつさぶろう), 1898년 1월 16일~1979년 9월 30일)는 8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홍성하(洪性夏, 1898년 1월 15일~1978년 4월 30일)는 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이자 기업인, 대한민국의…홍성하(洪性夏, 1898년 1월 15일~1978년 4월 30일)는 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이자 기업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스포츠판에서도 여러 활동들을 펼쳤었는데, 조선농구협회의 회계감사위원으로도 있었으며,보성전문학교 대학 교수 시절에는 보성전문 축구부의 감독직을 맡아서 현재의 고려대학교 축구부가 한국에서의 명문 축구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본 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오카자키 가쓰오(일본어: 岡崎 勝男 오카자키 카츠오[*], 1897년 7월 10일 ~ 1965년 10월 10일)는 일본의…오카자키 가쓰오(일본어: 岡崎 勝男 오카자키 카츠오[*], 1897년 7월 10일 ~ 1965년 10월 10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전 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이며, 제2차 세계 대전 후 요시다 시게루에 의해 추진된 대미 협조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시 출신으로, 1922년에 도쿄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파리에서 근무 중이었던 1924년, 파리 올림픽 (1924년 5월 4일 ~ 1924년 7월 27일) 에 참가해, 남자 육상 5,000m에서 15.22.2e의 기록을 냈다. 그는 일본제국 육군의 난징 함락과 난징대학살 이후, 난징의 총영사를 지냈으며, 이오섬에서 일본 사절단과 미국 군사 당국 사이의 항복 협상 초반부에 참여하였다. 전후,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함께 1945년 9월,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가하였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외무대신을 지냈으며, 1954년에 상호 방위 원조 (Mutual Security Assistance, MSA) 협정에 미국 대사 존 앨리슨 (John Moore Allison) 과 서명하였다. 오카자키는 일본 및 미국의 피겨 스케이트 선수 이나 교코 (伊奈 恭子)의 할아버지이다.
김칠성(金七星, 1897년 6월 24일 ~ 1984년 5월 21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김칠성(金七星, 1897년 6월 24일 ~ 1984년 5월 21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산 출생으로 니혼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제연구소장,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우포하이(중국어: 周佛海, 1897년 5월 29일 ~ 1948년 2월 27일)은 중화민국의 이론가,교육인,정치가였다.…저우포하이(중국어: 周佛海, 1897년 5월 29일 ~ 1948년 2월 27일)은 중화민국의 이론가,교육인,정치가였다. 삼민주의 사상 연구가로 유명했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왕징웨이와 함께 친일괴뢰정권 난징 국민정부 설립에 앞장섰으며 부주석, 행정원 부원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중일전쟁 전후 일본에 부일협력한 앞잡이로 한간(漢奸)으로 몰려 저우포하이는 전범으로 체포되었고, 1948년 2월 27일 옥사했다.
후지야마 아이이치로(일본어: 藤山 愛一郎, ふじやま あいいちろう, 1897년 5월 22일 ~ 1985년 2월 22일)는…후지야마 아이이치로(일본어: 藤山 愛一郎, ふじやま あいいちろう, 1897년 5월 22일 ~ 1985년 2월 22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외무대신, 경제기획청 장관, 후지야마 콘체른 (藤山コンツェルン)의 총수를 지냈다.
주기용(朱基瑢, 1897년 3월 12일 창원 ~ 1966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호는 동광(東光)이다.…주기용(朱基瑢, 1897년 3월 12일 창원 ~ 1966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호는 동광(東光)이다. 1934년에 오산학교 제15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42년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하였는데 광복 후 1945년에 다시 제17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전쟁 후 서울로 옮겨 재건된 오산학교에서 1953년에서 1961년까지 제18대 교장이었고, 1962년부터는 제6대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또한 정치인으로도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재학(金載學, 1897년 5월 2일~1984년 11월 21일)은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경상남도…김재학(金載學, 1897년 5월 2일~1984년 11월 21일)은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통영시 출신이며 호는 백파(白坡)이다.
기시 노부스케(일본어: 岸 信介, 1896년 11월 13일 ~ 1987년 8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57년 2월…기시 노부스케(일본어: 岸 信介, 1896년 11월 13일 ~ 1987년 8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57년 2월 25일부터 1958년 6월 12일까지 그리고 그때부터 1960년 7월 19일까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정2위 국화장을 받았다.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성씨는 사토(佐藤)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의 난 지도자의 증손자였던 기시는 정치와 음모의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그의 몇몇의 직계 가족 일원들은 이후에 정부에서 중요한 직위들을 영유하였다. 기시는 명문 학교를 다니고 상공성에 사무원으로 들어가 일본에 의하여 만주국의 산업 개발에서 연루된 상급 공무원들 중의 하나가 되는 데 상승하였다. 1941년 그는 상공대신으로서 도조 내각에 가입하는 데 초청되었고 이 자격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의 리더십의 일부였다. 기시는 전범으로서 연합국 점령부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나 3년 후에 석방되었다. 1952년 그가 정계로 돌아가는 데 허용되었을 때 그는 일본민주당에 입당하여 영향력있는 지지 기반을 다졌다. 기시는 보수주의의 일본민주당과 자유당을 자유민주당으로 합병하고 일본사회당에 의한 위협에 직면하여 통합된 그들의 정치력을 지키는 것에 수단적이었다. 1957년 기시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그의 재직 기간은 일본의 국제 관계에서 많은 중요한 개발들을 보았다. 1960년 하지만 그와 미국이 맺은 새로운 미일안보조약으로 대중의 시위들과 정치적 반대는 그를 물러나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이다.
김양수(金良洙, 1896년 - 1971년 1월 19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미국 콜롬비아대학과 영국 런던대학에서…김양수(金良洙, 1896년 - 1971년 1월 19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미국 콜롬비아대학과 영국 런던대학에서 수학하고 삼일신보사 주필, 조선흥업주식회사 중역을 맡았었다.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시부사와 게이조(일본어: 渋沢 敬三, 1896년 8월 25일 ~ 1963년 10월 25일)는 일본의 재계인, 민속학자, 전…시부사와 게이조(일본어: 渋沢 敬三, 1896년 8월 25일 ~ 1963년 10월 25일)는 일본의 재계인, 민속학자, 전 일본은행 총재, 시데하라 내각의 대장대신, 구 자작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이다. 장남은 시부사와 마사히데.
이누카이 다케루(犬養健, 1896년 7월 28일 - 1960년 8월 28일)는 일본의 정치인, 소설가이다. 정3위 훈1등.…이누카이 다케루(犬養健, 1896년 7월 28일 - 1960년 8월 28일)는 일본의 정치인, 소설가이다. 정3위 훈1등. 총리대신을 지낸 이누카이 쓰요시의 3남이다. 제2·3대 일본의 법무대신. 도쿄제국대학 중퇴 후 작가로 활동하며 1923년 첫 작품집을 간행하였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1930년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1941년 조르게 사건에 연루된 의혹으로 기소되었으나 무죄로 판결되었다. 1952년부터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지내었다. 1954년 사토 에이사쿠의 비리 의혹이 파문을 일으키는 와중에 요시다의 종용으로 지휘권을 발동하여 이에 개입하려다가 야당과 여론의 큰 반발에 부딪혀 즉시 사임하고 곧 요시다 내각이 총사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수학(金秀學, 1896년 5월 21일 ~ 1967년, 전북 고창)은 대한민국의 제2대 국회의원이었다. 일본 교토 제국대학…김수학(金秀學, 1896년 5월 21일 ~ 1967년, 전북 고창)은 대한민국의 제2대 국회의원이었다. 일본 교토 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호남은행 목포지부장, 상공부차관, 대한무진금융주식회사사장을 역임하였다.
김범부(金凡父, 1897년 1월 6일~1966년 12월 10일)는 대한민국의 동양 철학자, 한학자이다. 본관은 선산이며…김범부(金凡父, 1897년 1월 6일~1966년 12월 10일)는 대한민국의 동양 철학자, 한학자이다. 본관은 선산이며, 본명은 김정설(金鼎卨)이다. 소설가, 시인 김동리의 형이다. 저서로는 《화랑외사(花郞外史)》가 있다. 경상남도 동래에서 아버지 김임수(金任守)와 어머니 허임순(許任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으며, 1915년 백산상회의 장학생으로 일본 도요대학에 유학하여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불교 철학을 연구하다가 1941년 다솔사에서 소위 '해인사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에는 부산일오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1946년에서 1949년까지 대한민국 육군에 장교 복무하여 육군본부 정훈국 정훈과 과장 재직하던 중 1949년 육군 중령 예편하였다. 이후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을 거쳐 1955년 계림학숙의 초대 교장을 지냈고, 1958년에는 건국대학교에 동방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3년간 동양철학을 강의했다. 1966년 12월 10일 위암으로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