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다 기치조(일본어: 細田 吉蔵 (ほそだ きちぞう), 1912년 5월 2일~2007년 2월 1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호소다 기치조(일본어: 細田 吉蔵 (ほそだ きちぞう), 1912년 5월 2일~2007년 2월 1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장남은 11선 중의원 의원과 의장을 지낸 호소다 히로유키다.
변호사: 90명
호소다 기치조(일본어: 細田 吉蔵 (ほそだ きちぞう), 1912년 5월 2일~2007년 2월 1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호소다 기치조(일본어: 細田 吉蔵 (ほそだ きちぞう), 1912년 5월 2일~2007년 2월 1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장남은 11선 중의원 의원과 의장을 지낸 호소다 히로유키다.
김달호(金達鎬, 일본식 이름: 金橋 健, 1912년 3월 26일 ~ 1979년 3월 4일)는 해방 이후 사회대중당…
김달호(金達鎬, 일본식 이름: 金橋 健, 1912년 3월 26일 ~ 1979년 3월 4일)는 해방 이후 사회대중당 앙집행위원장, 제3대민의원 등을 역임한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본관 울산(蔚山)이다.
안용대(安龍大, 일본식 이름: 安田龍大, 1913년 1월 13일 경북 경주 ~ 1999년 5월 6일)는 대한민국의…
안용대(安龍大, 일본식 이름: 安田龍大, 1913년 1월 13일 경북 경주 ~ 1999년 5월 6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제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일본 주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으며 사천ㆍ함안ㆍ창원ㆍ거창군수를 역임하고 국회전문위원을 지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수록되었다.
이태희(李太熙, 일본식 이름: 三江太熙 또는 三江達夫, 1911년 11월 8일 ~ 1999년 10월 27일)는 일제강점기와…
이태희(李太熙, 일본식 이름: 三江太熙 또는 三江達夫, 1911년 11월 8일 ~ 1999년 10월 27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일제의 검사였고,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이었으며, 제8대 검찰총장을 지냈다.
장경근(張暻根, 일본식 이름: 長山暻根 나가야마 게이콘, 1911년 5월 18일~ 1978년 7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장경근(張暻根, 일본식 이름: 長山暻根 나가야마 게이콘, 1911년 5월 18일~ 1978년 7월 25일)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제14대 내무부장관과 제3,4대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윤형남(尹亨南, 1911년 3월 16일 ~ 2002년 9월 10일, 전라남도 순천)은 변호사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윤형남(尹亨南, 1911년 3월 16일 ~ 2002년 9월 10일, 전라남도 순천)은 변호사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3,4,5대 민의원의원, 민의원 법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1940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강원도청 지방과와 칠곡군수로 근무했으며, 1945년 상주군수로 부임했다. 일본 패전 후에도 상주군수에 유임되어, 그는 해방 직후 첫 경상북도 상주군수였다.
양병일(梁炳日, 1910년 1월 27일 ~ 1962년 9월 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서 제2대, 제5대 국회의원을…
양병일(梁炳日, 1910년 1월 27일 ~ 1962년 9월 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서 제2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전라남도 강진군 태생이다.
김의준(金意俊, 1909년 4월 28일 ~ 1985년 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었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김의준(金意俊, 1909년 4월 28일 ~ 1985년 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었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판사, 검사, 변호사를 지냈다. 법사위원장, 고등고시위원, UN총회한국대표, 자유당 중앙당 선전부장과 제2대, 제3대, 제4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1985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별세하였다.
후지바야시 에키조(일본어: 藤林 益三, 1907년 8월 26일~2007년 4월 24일)는 일본의 변호사다.
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해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 たなかいさじ, 1906년 1월 3일 ~ 1987년 4월 11일)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법학…
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 たなかいさじ, 1906년 1월 3일 ~ 1987년 4월 11일)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법학 박사이다. 중의원 의원 (1942년 ~ 1947년, 1949년 ~ 1983년), 제7-8대 자치청 장관 (1956년 ~ 1957년), 제44대 중의원 부의장 (1963년 ~ 1965년), 제22-23대 법무대신 (1966년 ~ 1967년), 제31대 법무대신 (1972년 ~ 1973년) 등을 지낸 바 있다.
임철호(任哲鎬, 1905년 6월 12일~1990년 8월 19일)는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제4대 국회의원…
임철호(任哲鎬, 1905년 6월 12일~1990년 8월 19일)는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제4대 국회의원, 제10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광복 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비서관이 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한일회담 대표와 자유당 핵심 당료를 지내는 등 제1공화국 후반기에 이기붕을 둘러싼 자유당 실세 그룹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제4대 국회 부의장을 지내고 이기붕의 후계자설이 나돌 정도의 거물이었으나,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이후 지탄의 대상이 되어 수감되었다.
쓰카다 주이치로(일본어: 塚田 十一郎 (つかだ じゅういちろう), 1904년 2월 9일~1997년 5월 23일)는 8선 중의원…
쓰카다 주이치로(일본어: 塚田 十一郎 (つかだ じゅういちろう), 1904년 2월 9일~1997년 5월 23일)는 8선 중의원 의원, 2선 니가타현지사, 3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나카무라 우메키치(中村梅吉, 1901년 3월 19일~1984년 8월 4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조주영(趙柱泳, 1900년 3월 11일 남해군 ~ 1976년 11월 25일)은 변호사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김종열(金鍾烈, 1900년 - 198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김종열(金鍾烈, 1900년 - 198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김성호(1899년 9월 5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오자와 사에키(일본어: 小沢 佐重喜 (おざわ さえき), 1898년 11월 25일~1968년 5월 8일)는 10선 중의원…
오자와 사에키(일본어: 小沢 佐重喜 (おざわ さえき), 1898년 11월 25일~1968년 5월 8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18선 출신의 현역 중의원 의원 오자와 이치로는 그의 장남이다.
한근조(韓根祖, 1895년 7월 19일 ~ 1972년 2월 8일)는 일제강점기의 법조인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한근조(韓根祖, 1895년 7월 19일 ~ 1972년 2월 8일)는 일제강점기의 법조인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제4,5,6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 (1894년 9월 12일 ~ 1953년 10월 14일)는 일본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일본 공산당의…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 (1894년 9월 12일 ~ 1953년 10월 14일)는 일본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일본 공산당의 공동 창립자이다.
아베 겐키(일본어: 安倍源基, 1894년 2월 14일 ~ 1989년 10월 6일)는 일본 제국의 내무관료, 전후 일본의…
아베 겐키(일본어: 安倍源基, 1894년 2월 14일 ~ 1989년 10월 6일)는 일본 제국의 내무관료, 전후 일본의 변호사이다. 경시청 특별고등경찰부장, 경시총감, 내무대신을 지냈다. 아베는 1894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1920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1932년, 경시청에서 초대 특별고등경찰부장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엄격히 다스려 잡아들였기 때문에 "빨갱이 잡는 아베"라는 이름으로 위세를 떨쳤다. 1936년 2·26 사건 당시에는 특별고등경찰 부장으로, 계엄 회의의 구성원이었다. 그 후, 내무성 보안 과장, 내무성 경보국장, 내무성 경시총감을 지냈다. 1941년, 기획원 차장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내무대신 및 기획원 총재가 되었다. 그는 도요다 소에무 등과 함께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A급 전범 용의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소되었지만,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의 처형이 끝나고, 점령 정책의 전환으로 불기소가 되어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기무라 도쿠타로 (木村篤太郎) 등과 함께 신일본 협의회를 결성하고 대표 이사가 되었다. 후에 전국경우회 연합회 회장, 도쿄 도 경우회 회장을 역임하고, 종3위훈1등(従三位勲一等) 을 받았다. 1956년, 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으로 야마구치 지방구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에 사망하였다.
리노이에 히로시(일본어: 李家 隆介 (りのいえ たかすけ), 1893년 3월 23일~?)는 일본의 변호사이다. 리노이에…
리노이에 히로시(일본어: 李家 隆介 (りのいえ たかすけ), 1893년 3월 23일~?)는 일본의 변호사이다. 리노이에 다카스케의 장남이다.
김용무(金用茂, 1891년 9월 13일 ~ ?)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해방 직후 한민당 창당에…
김용무(金用茂, 1891년 9월 13일 ~ ?)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해방 직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미군정기 때 재판장, 1,3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전라남도 무안 출생이다.
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인이며…
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인이며 시인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출신(出身)이며, 본관(本貫)은 울산(蔚山), 호는 가인(街人)이다. 일제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이인, 허헌과 함께 조선국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결국 한국민주당의 정책 관련 노선에 반발하여 1946년 10월에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 후에 분단의 현실을 느껴 노선을 선회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初代)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고, 대법원장 퇴임 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야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삼각산로 5)에 안장되어 있다.
오노 로쿠이치로(일본어: 大野緑一郎, 1887년 10월 1일 ~ 1985년 9월 2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변호사이다.…
오노 로쿠이치로(일본어: 大野緑一郎, 1887년 10월 1일 ~ 1985년 9월 2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변호사이다. 제37대 경시총감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하였다. 제82대・제83대 내각총리대신 하시모토 류타로의 외조부이다.
이범승(李範昇, 1887년 음력 8월 29일 ~ 1976년 9월 3일, 충남 연기)은 일제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관료이며…
이범승(李範昇, 1887년 음력 8월 29일 ~ 1976년 9월 3일, 충남 연기)은 일제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관료이며, 제2대 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9월부터 도서관 설립 운동, 홍보 활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도서관 설립 운동, 책읽기 운동을 추진하였다. 해방 직후 초대 경기도 경성부 부부윤과 1945년 10월부터 1946년 6월까지 경기도 경성부윤을 역임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제2대, 5대 2선 국회의원이었다. 1918년~1920년 남만주철도회사에 재직했고, 남만철도회사 재직 중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수학했다. 그는 1919년 9월 종로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유료 도서관을 인수하여 종로 경성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아동, 문화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취운동의 취운정 경성도서관을 인수, 같이 운영했다. 1926년 경영난으로 도서관을 경성부에 기증하여, 후일 서울시립종로도서관의 전신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로 도서관 아동열람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1926년 9월 고등관 시험에 합격하여 사무관이 되고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 임야조사위원회, 황해도청 산업과장, 경상북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재직하다 1936년 사직했다. 해방 직후 경기도 양주의 치안활동에 참여하다가, 경성부 부부윤, 양주경찰서장,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52년 제2대 국회 민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2대 민의원으로 활동했고, 1960년 제5대 국회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물러났다. 그는 도서관학이나 문헌정보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내 각 대학, 학교들의 열악한 도서시설을 보고 도서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대중에게 공개, 개방하는 무료 도서관을 최초로 경영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아호는 지우(至愚)이다.
가타야마 데쓰(일본어: 片山 哲, 1887년 7월 28일 ~ 1978년 5월 30일)는 일본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종전…
가타야마 데쓰(일본어: 片山 哲, 1887년 7월 28일 ~ 1978년 5월 30일)는 일본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종전 이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내각총리대신직을 역임했는데, 일본 최초의 사회당 출신 총리이자 기독교인 총리였다.
엔도 류사쿠(일본어: 遠藤柳作, 1886년 3월 18일 ~ 1963년 9월 18일)는 일본 무사시노 은행의 설립자이자…
엔도 류사쿠(일본어: 遠藤柳作, 1886년 3월 18일 ~ 1963년 9월 18일)는 일본 무사시노 은행의 설립자이자 정치가, 변호사이다. 사이타마현 출신이다.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 1886년 2월 7일 ~ 1982년 8월 8일)는 일본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제19대…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 1886년 2월 7일 ~ 1982년 8월 8일)는 일본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제19대 검사총장, 초대 법무대신, 초대 방위청 장관을 역임하였다. 검도가로도 활동하며 초대 전일본검도연맹 회장을 맡았다. 재야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시데하라 내각에서 검사총장에 등용되었고 요시다 내각 하에서 여러 차례 법무대신과 방위청 장관 직을 지내었다. 일본국 헌법의 서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일본공산당의 무장 혁명의 가능성을 경계하여 파괴활동방지법의 도입을 주도하였다.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 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출신.
허헌(許憲, 1885년 7월 22일 ~ 1951년 8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법률가이자 법조인 출신의…
허헌(許憲, 1885년 7월 22일 ~ 1951년 8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법률가이자 법조인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이다. 아호(雅號)는 긍인(兢人)이다.
기요세 이치로(清瀬 一郎, 1884년 7월 5일~1967년 6월 27일)는 14선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
호소노 나가요시(細野長良, 1883년 1월 7일~1950년 1월 1일)는 일본의 재판관이다. 도야마현립도야마중학교(지금의 도야마현립도야마고등학교)와 제6고등학교를 나온 뒤 1908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8년 도쿄공소원 판사가 되었다. 히로시마공소원장으로 재직중이던 1944년 2월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법조 관계자들이 전시 체제에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헌법을 위반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2월 이와타 주조 사법대신의 천거로 제23대 대심원장에 취임했다. 두 사람은 사법권 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했으며 알프레드 C. 오플러 연합군 최고사령부 민정국 사법법제과장과도 사법 개혁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이와타가 공직추방되자 후임에 보수파인 기무라 도쿠타로가 취임했는데 기무라는 호소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도파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다니무라 다다이치로도 사법차관이 된 뒤 호소노에 비협조적으로 나와 사법 개혁은 난관에 봉착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심원을 대신해 최고재판소가 신설되었다. 곧이어 재판관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전전부터 사법권 독립을 주장한 호소노파와 이에 반발하는 반호소노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설치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의 위원이었던 호소노는 자신이 도조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던 것처럼 중책을 담당하는 감독직에 있으면서 한 마디 항의도 못하는 사람은 최고재판소재판관의 자격이 없다고 연셜하며 재판관 선출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바라 시게루 외의 동조자가 없어 호소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재판관 후보자를 30명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호소노는 낙선했다. 그런데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최고재판소재판관 선출은 신헌법 이후 출범한 내각이 선임해야 한다고 지명하여 요시다 내각에 의해 구성된 재판관임명자문위원회는 해산하고 신헌법하에서 최초로 구성된 가타야마 내각에 의해 새롭게 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헌법이 시행될 때 최고재판소가 구성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대심원장이던 호소노가 최고재판소장관 대행직을 수행해야 했다. 새롭게 꾸려지는 위원회에서도 여전히 호소노파와 반호소노파의 대립이 이어졌고 수적 열세로 인해 호소노파는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위원회가 선임한 재판관 후보 30명에 호소노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1947년 8월 4일 호소노는 장관 대행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다음날부터 시행되는 「재판소법」이 8월 4일까지 최고재판소재판관 대행직에서 물러난 사람은 대심원 판사로의 자격을 가지지만 8월 5일부터 물러난 사람은 도쿄고등재판소 판사 자격만 가진다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퇴임 후 호소노는 도쿄도 마루노우치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1950년 1월 1일 향년 66세로 서거했다. 같은 날 훈1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하토야마 이치로(일본어: 鳩山 一郎, 1883년 1월 1일 ~ 1959년 3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다.…
하토야마 이치로(일본어: 鳩山 一郎, 1883년 1월 1일 ~ 1959년 3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다. 제52·53·5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박해극(朴海克, 1882년 2월 14일~1952년 5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후세 다쓰지(일본어: 布施辰治,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출생)는 미야기현…
후세 다쓰지(일본어: 布施辰治,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출생)는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출신의 일본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 식민지 독립운동가이다. 후세 다츠지라고도 번역한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야마자키 케사야(일본어: 山 (やま)崎 (ざき) 今 (け)朝 (さ)彌 (や): 1877년 9월 15일-1954년 7월…
야마자키 케사야(일본어: 山 (やま)崎 (ざき) 今 (け)朝 (さ)彌 (や): 1877년 9월 15일-1954년 7월 29일)는 일본의 법조인이다. 사회주의자 사건을 많이 다루었다. 1877년 스와군 카와기시촌(현 나가노현 오카야시) 출신. 상경한 이후 메이지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하여 1901년 졸업했다. 동년 제1회 판사검사등용시험에 합격, 고후구재판소에서 사법관시보로 근무하다 이듬해 면관, 1903년 도미해서 아카바 하지메, 이와사 사쿠타로, 코토쿠 슈스이 등과 알게 되었다. 1907년 귀국하여 도쿄변호사회에 가입, 변호사가 되었다. 1913년 합동법률사무소의 전신인 도쿄법률사무소를 설립, 1916년에는 평민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1917년 평민대학(대학령에 근거한 정식 대학은 아니었다)을 설립, 1921년에는 자유법조단 결성에 참여했다. 또한 1913년 일본사회당(야마자키의 1인 정당), 1920년 일본사회주의동맹, 1924년 일본 페이비언 협회 등을 설립하며 사회주의자로도 활동했다. 전후에는 미타카 사건, 마츠카와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미국백작(米国伯爵)"을 자칭하고 "변호사 떨이(弁護士大安売)" 광고를 내는 등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오하라 나오시(일본어: 小原 直, 1877년 1월 24일 ~ 1966년 9월 8일)는 일본의 검찰관, 정치인이다.
하라 요시미치(일본어: 原 嘉道 はら よしみち)[*], 1867년 3월 23일 ~ 1944년 8월 7일)는 일본의 관료…
하라 요시미치(일본어: 原 嘉道 はら よしみち)[*], 1867년 3월 23일 ~ 1944년 8월 7일)는 일본의 관료, 변호사, 법학자, 정치가이다. 또 다른 발음으론 하라 요시카도(はら よしかどう)로도 불린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사법대신을 지냈으며 추밀원 의장에 올랐다. 작위는 남작이며 법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오오이 켄타로(일본어: 大 (おお)井 (い) 憲 (けん)太 (た)郎 (ろう): 1843년 9월 2일(음력 천포 14년 8월…
오오이 켄타로(일본어: 大 (おお)井 (い) 憲 (けん)太 (た)郎 (ろう): 1843년 9월 2일(음력 천포 14년 8월 10일)-1922년 10월 15일)는 일본의 정치가, 법률가다. 자유민권운동가로서 중의원의원을 역임했다. 1843년 9월 3일(음력 천보 14년 8월 10일) 부젠국 우사군 高並촌(현 오이타현 우사시)에서 농민 집안의 3남으로 출생. 본래는 高並씨였다. 어려서 초보적 수준의 한학을 배우고 1863년(분큐 3년) 나가사키에서 난학과 영어를 배우고 오오이 보쿠신의 의형제가 되어 오오이의 성을 자칭한다. 에도에 상경해 불어와 화학을 배우고 에도 막부의 개성소 사밀국에 출사한다. 보신 전쟁 당시 막군 포병대에 속해 관군과 싸웠다. 그 즈음 정교회의 세례를 받아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9년(메이지 2년) 미츠쿠리 린쇼에게 배우고 대학남교에 입학했다. 1874년(메이지 7년), 민찬참의원 설립을 두고 카토 히로유키와 논쟁한다. 1875년(메이지 8년) 원로원 서기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면관된다. 관료생활을 그만두게 된 뒤 애국사 창립에 참여하고 그 뒤 변호사로 변신, 자유민권운동 급진파 지도자로 활동한다. 1877년(메이지 10년) 의형 오오이 보쿠신의 양자로 입적된다. 1881년(메이지 14년) 6월, 불교단체의 무고로 사체가 발굴된 정교회 신자를 위한 변론활동을 하여 대심원에서 승소했다. 1882년(메이지 15년) 자유당에 입당했다. 1884년(메이지 14년) 치치부 곤민당을 지도한다. 1885년(메이지 18년) 조선의 내정개혁을 도모한 오사카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고 징역 9년을 선고받는다. 1889년(메이지 22년) 특사를 받아 출옥한다. 나카에 조민 등과 함께 구 자유당 세력 재규합을 시도하여 1890년(메이지 23년) 입헌자유당을 결성한다. 하지만 1892년(메이지 25년) 11월 탈당하고 동양자유당을 창당한다. 오오이는 보통선거를 주장하는 동시에 일본노동협회・소작조례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1893년(메이지 26년) 동양자유당을 해산하고 이듬해 열린 제3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 오사카 3구 지역구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오오이는 병략상략을 병행하여 부국을 도모한 일본이야말로 아시아 혁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감동한 사업가 우메야 쇼키치가 1894년(메이지 27년) 오오이에게 남양무역과 이민계획을 제안했고, 이에 동참한 오오이는 싱가포르를 시찰하고 1898년(메이지 31년)에는 도쿄에서 남양무역상회를 경영했다. 같은 해 자유당과 진보당이 합병하여 헌정당을 결성하자 참여하여 헌정당 총무를 맡았다. 1899년(메이지 32년) 가타야마 센 등과 보통선거기성동맹회를 결성, 보선운동에 시종일관 임하였다. 만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결탁해 대외강경론자로 표변했다. 1922년(다이쇼 11년) 10월 15일 향년 79세로 사망. 도쿄의 정교회 성당인 니콜라이당에서 장례를 치렀다. 저서로 『시사요론』(時事要論), 『자유략론』(自由略論)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