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스 다케오(栗栖 赳夫, くるす たけお, 1895년 7월 21일 ~ 1966년 5월 10일)는 일본의 정치인·은행가로…구루스 다케오(栗栖 赳夫, くるす たけお, 1895년 7월 21일 ~ 1966년 5월 10일)는 일본의 정치인·은행가로, 가타야마 내각의 대장대신, 경제안정본부 (経済安定本部) 총무장관을 지냈다. 지금의 야마구치현의 이와쿠니시 출신으로, 192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 후,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에 들어갔다. 1934년 저서 〈담보부사채신탁법의 연구〉(担保付社債信託法の研究) 로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증권부장, 총무부장을 거쳐 전후 1945년 이사, 1947년 총재까지 승진하였다. 한편 1946년에는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다. 1947년 제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사회당·민주당·국민협동당의 3당 연립 내각 가타야마 내각의 재무대신에 임명된 야노 쇼타로(矢野庄太郎)가 병으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임하자, 민주당 총재 아시다 히토시의 요청으로 후임 재무대신이 되었다. 그 후 민주당에 입당해, 1948년 아시다 내각이 성립되자, 구루스 다케오는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으로 계속해서 입각하였다. 같은 해 쇼와전공 사건으로 대장대신 시절, 부흥금융공고 융자위원장으로서 쇼와전공에게 현금을 받은 혐의로 같은 해 현역 각료 신분으로 체포되었다. 현역 각료 소추는 일본국 헌법 제75조에 따라 수상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도쿄지방법원은 소추는 체포·구류와는 관계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체포영장을 교부하였다. 그 해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에서 물러났다. 1953년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며, 1962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1년 형이 확정되었다.
한근조(韓根祖, 1895년 7월 19일 ~ 1972년 2월 8일)는 일제강점기의 법조인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한근조(韓根祖, 1895년 7월 19일 ~ 1972년 2월 8일)는 일제강점기의 법조인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제4,5,6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김준연(金俊淵, 1895년 3월 14일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김준연(金俊淵, 1895년 3월 14일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또한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엠엘파(ML)의 중요 인사였다. 독일 베를린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2년간 기자와 주러시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다 1928년 동아일보로 옮겼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본래 공산주의 운동가였으나 우익으로 전향하여 해방 이후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48년의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에 지지를 보냈다. 민주국민당과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친여 인물로 분류되어 비판을 받던 중 탈당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 조직하기도 했다. 1961년 5월과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경력에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용균(羅容均, 1896년 2월 25일~1984년 7월 6일)이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5·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나용균(羅容均, 1896년 2월 25일~1984년 7월 6일)이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5·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6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이들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거나,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참여했다. 사후, 여러 사회단체에서 정리한 주요 친일파 목록에 등재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배희범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나카야마 스케치카(일본어: 中山輔親, 1894년 11월 13일 ~ 1980년 4월 23일)는 일본의 옛 화족이자…나카야마 스케치카(일본어: 中山輔親, 1894년 11월 13일 ~ 1980년 4월 23일)는 일본의 옛 화족이자, 정치인이다. 귀족원 후작 의원으로 재직했다.
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평양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구택대학 전문부 정치과를 수료하였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경력도 있으며 의성단 부단장을 역임하였다. 연안면장과 연백군수, 연백수리조합장을 역임하였다.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이었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야마자키 이와오(일본어: 山崎 巌, やまざき いわお, 1894년 9월 16일 ~ 1968년 6월 26일)는 일본의 내무…야마자키 이와오(일본어: 山崎 巌, やまざき いわお, 1894년 9월 16일 ~ 1968년 6월 26일)는 일본의 내무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내무대신, 자치대신 (自治大臣) 을 지냈다. 형은 농림대신, 체신대신을 지낸 중의원 의원 야마자키 다쓰노스케(山崎達之輔, 1880 ~1948)이며, 조카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야마자키 헤이하치로(山崎平八郎, 1911 ~ 1989)이다.
이시다 센타로 (일본어: 石田 千太郎, 1894년 8월 5일 ~ 몰년 미상)는 일본의 체신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조선총독부…이시다 센타로 (일본어: 石田 千太郎, 1894년 8월 5일 ~ 몰년 미상)는 일본의 체신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장, 아이치현 의회 의원 (5선), 조선석탄 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 독립선언 당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유학 후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하였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이후 제헌(서대문, 한국민주당), 제3대(서대문갑, 민주국민당), 제4대(서대문갑, 민주당), 제5대(서대문갑, 민주당), 제6대(전국, 자유민주당), 제7대(전국, 신민당)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민주당 창설에 참여하여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 국무총리에 두 번 지명되었으나 인준부결되었고, 군사 정권에서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 한민당 출신 유일한 초대 내각 입각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호는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아베 간(일본어: 安 (あ)倍 (べ) 寛 (かん), 1894년 4월 29일 ~ 1946년 1월 30일)은 일본의 정치인이다.…아베 간(일본어: 安 (あ)倍 (べ) 寛 (かん), 1894년 4월 29일 ~ 1946년 1월 30일)은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을 2선 역임했다. 소속 정당은 일본진보당. 외무대신을 역임한 정치가 아베 신타로의 부친이며,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친조부가 된다.
아베 겐키(일본어: 安倍源基, 1894년 2월 14일 ~ 1989년 10월 6일)는 일본 제국의 내무관료, 전후 일본의…아베 겐키(일본어: 安倍源基, 1894년 2월 14일 ~ 1989년 10월 6일)는 일본 제국의 내무관료, 전후 일본의 변호사이다. 경시청 특별고등경찰부장, 경시총감, 내무대신을 지냈다. 아베는 1894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1920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1932년, 경시청에서 초대 특별고등경찰부장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엄격히 다스려 잡아들였기 때문에 "빨갱이 잡는 아베"라는 이름으로 위세를 떨쳤다. 1936년 2·26 사건 당시에는 특별고등경찰 부장으로, 계엄 회의의 구성원이었다. 그 후, 내무성 보안 과장, 내무성 경보국장, 내무성 경시총감을 지냈다. 1941년, 기획원 차장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내무대신 및 기획원 총재가 되었다. 그는 도요다 소에무 등과 함께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A급 전범 용의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소되었지만,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의 처형이 끝나고, 점령 정책의 전환으로 불기소가 되어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기무라 도쿠타로 (木村篤太郎) 등과 함께 신일본 협의회를 결성하고 대표 이사가 되었다. 후에 전국경우회 연합회 회장, 도쿄 도 경우회 회장을 역임하고, 종3위훈1등(従三位勲一等) 을 받았다. 1956년, 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으로 야마구치 지방구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에 사망하였다.
성원경(成元慶, 1894년 2월 14일 ~ 1975년 7월 30일)은 한국의 기업인 겸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성원경(成元慶, 1894년 2월 14일 ~ 1975년 7월 30일)은 한국의 기업인 겸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대한민국에서는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백남운(白南雲, 1894년 2월 11일 ~ 1979년 6월 12일)은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 겸 교육자이자…백남운(白南雲, 1894년 2월 11일 ~ 1979년 6월 12일)은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 겸 교육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학자 겸 정치인이다.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와 조선공산당의 경제이론가였고, 이순탁과 함께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경제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광복 후에는 일부 자산계급과 연대를 전제로 '조선 민족의 진로'라는 글에서 '연합성 신민주주의(민족 통일전선)'를 제창하였다. 해방 후 김두봉, 허정숙, 최창익 등과 연결, 남조선신민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차 김구, 김규식, 장건상 등과 함께 월북한 후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문교상과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다.
지바 사부로(일본어: 千葉 三郎 (ちば さぶろう), 1894년 1월 25일~1979년 11월 29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지바 사부로(일본어: 千葉 三郎 (ちば さぶろう), 1894년 1월 25일~1979년 11월 29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김효석(金孝錫, 1895년 12월 19일 ~ 1966년 4월 15일)은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시, 대한민국…김효석(金孝錫, 1895년 12월 19일 ~ 1966년 4월 15일)은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시,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과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와야 센키치(일본어: 粟屋仙吉, 1893년 11월 7일 ~ 1945년 8월 6일)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1933년…아와야 센키치(일본어: 粟屋仙吉, 1893년 11월 7일 ~ 1945년 8월 6일)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1933년 고스톱 사건 당시 오사카부 경찰 부장이었으며 1945년 8월 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시의 시장이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이다. 호(號)는 창랑(滄浪), 자(字)는 치우(致雨, 아명(兒名)은 장삼욱(張三旭). 영문 이니셜은 TS.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했고, 정부 수립 이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부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 좌익 정당과 좌익 정치운동을 단속하였으나,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학자 여현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과 정부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리 출신이다.
이치마다 히사토(일본어: 一万田 尚登 (いちまだ ひさと), 1893년 8월 12일~1984년 1월 22일)는 5선 중의원…이치마다 히사토(일본어: 一万田 尚登 (いちまだ ひさと), 1893년 8월 12일~1984년 1월 22일)는 5선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치카와 후사에(일본어: 市川房枝, 1893년 5월 15일 ~ 1981년 2월 11일)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정치인, 여성…이치카와 후사에(일본어: 市川房枝, 1893년 5월 15일 ~ 1981년 2월 11일)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정치인,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였다. 이치카와는 일본의 여성 참정권 운동의 핵심 인물로, 1945년 여성으로 선거권이 확대되는 데 기여하였다.
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노동총연맹의 후보로 출마했으며 3위로 낙선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같은 선거구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전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 1978년 6월 12일)는…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 1978년 6월 12일)는 중국의 신문학 활동가, 극작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공작자이다. 본명은 카이전(開貞), 호는 딩탕(鼎堂)이며, 모뤄(沫若)는 자이다. 하카계 출신이며, 쓰촨성 쟈딩 푸(嘉定府)의 중류 정도의 지주의 셋째 아들로서 출생하였다. 쓰촨성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1914년 일본 제국의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근대적 연구 방법을 익혔다. 이 사이에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혁명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하였으며 중국에서 반봉건 혁명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초기 활동가 중 하나였다. 그는 그러다 일본 제국의 여자와 결혼하고 극작가로서 여성 해방을 혁명 테마로 한 <3인의 반역적 여성>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중국 공산당의 신문학 운동 시기의 본격적 사극의 하나로 말해지기도 한다. 중국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고조된 후 1926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자 리다자오 등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영에서 거기에 참가하여 우한·상하이 등지에서 여러 직책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난창 봉기에 가담한 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피해서 일본 제국에 망명하였고, 이 기간에 유물사관을 가지고 중국 고대 사회를 연구하는 혁명 작업을 하였으며, 그것은 중국 고대 사회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각을 가져다 연구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때 충칭으로 귀국해서 중국 공산당 측의 문학 평론 공작의 책임을 맡고 공산당 혁명의 항일 전선에 참가하여 선전 활동에 종사하는 중에 극작(劇作)이나 평론 등도 많이 발표하였다. 그때 발표된 희곡 <굴원(屈原)>(1942)의 내용은 굴원을 항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중국 고대 애국 시인의 말을 따서 국민당의 부패 양상을 들춰내기도 하였다. 1949년, 1950년 파리와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 마오쩌둥 측의 문인 대표로 참가하였고, 중국 공산당 정권 성립 이후로 정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장,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과기대 학장, 중국 공산당 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 중국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등을 맡았으며, 마오둔, 저우양, 천보다 등과 함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정권에서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노선의 조타수가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크게 권력을 행사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 사상 방면의 공작자 중의 하나이었다. 문혁 초기에는 사인방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 마오쩌둥은 그의 보호를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에게 요구하였다. 문혁이 끝난 뒤는 화궈펑에 의해서 당내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였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화궈펑 정권에서 마오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 사다노스케(定之助)이다. 도쿄부 출신으로 백작 아리마 요리쓰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정치인 마쓰다 마사히사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마사히사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마사유키는 후작 하치스카 마사하키(후작 하치스카 모치아키의 장남)의 사위이며 외교관 가야 하루노리(가야 쓰네노리의 차남)의 장인이다.
호시노 나오키(일본어: 星野 直樹, ほしの なおき, 1892년 4월 10일~1978년 1월 26일)는 일본의 관료이자…호시노 나오키(일본어: 星野 直樹, ほしの なおき, 1892년 4월 10일~1978년 1월 26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로, 만주국의 총무 장관이었다. 호시노 나오키는 1892년 4월 10일, 일본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 고등 문관 시험에 급제한 뒤, 191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건설할 당시에 관동군으로부터 대장성에서 인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만주에 건너간 이후에는 만주국 재정부 이사관, 재정부 총무사장, 재정부 차장, 국무원 총무청장을 거쳤고, 1937년에는 국무원 총무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선 일본인이 맡는 국무원 총무 장관이 실질적으로 총리 역할을 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며, 호시노 나오키는 재임 기간 중 만주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2키 3스케 중 한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A급 전범이 된 호시노 나오키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1958년에 석방돼 후에는 도쿄 힐튼 호텔 부사장, 도쿄 급행 전철 이사, 아사히 해운 사장, 다이아몬드 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단 이노(團伊能, 1892년 2월 21일 ~ 1973년 2월 9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남작 단…단 이노(團伊能, 1892년 2월 21일 ~ 1973년 2월 9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남작 단 다쿠마의 장남으로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오다치 시게오(일본어: 大達 茂雄 오오다치 시게오[*], 1892년 1월 5일 ~ 1955년 9월 25일)는 일본의…오다치 시게오(일본어: 大達 茂雄 오오다치 시게오[*], 1892년 1월 5일 ~ 1955년 9월 25일)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전 내무대신·문부대신이다. 오다치는 1892년, 시마네현에서 주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에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지방국 재무 국장을 거쳐 1932년 후쿠이현 지사가 되었으며, 만주국 법제국장,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장 등을 지냈으나, 관동군과의 대립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베 내각, 요나이 내각의 내무차관을 맡은 후, 1942년에 쇼난특별시 (昭南特別市, 지금의 싱가포르) 시장을 지냈다. 1943년 7월, 도쿄 시와 도쿄 부를 폐지하였으며, 도쿄도를 설치 (도쿄 도제, 東京都制) 하고, 초대 도쿄 도 장관 (東京都長官) 이 되었다. 1944년 7월, 고이소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고이소 내각의 각료였다는 이유로 1946년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1952년에 추방 해제되었다.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시마네 선거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1953년,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성립되면서, 내각 조성 참모 오가타 다케토라 (緒方竹虎)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문부대신이 되었으며,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일본교직원조합의 영향력을 억제시키고자 하였다. 1955년, 위암으로 6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 해방을 위한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며, 「수평사」(水平社), 「규탄」(糺弾) 등의 명칭을 고안한 사람이다.
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 농림대신, 척무대신(拓務大臣), 법무대신, 재판관탄핵재판소장, 중의원 의원, 참의원 등을 지냈다. 도쿄부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区)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농상무성 관료가 되었다. 농림성 잠사국장(蚕糸局長) 을 거쳐, 1937년 기획청(企画庁) 설립에 수반해 기획청 초대 차장이 되었다. 그 후 농업 용수차관이 되었으며, 1941년 고노에 내각에 농림수산대신으로 첫 입각하였다. 도조 내각에서도 계속해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으며, 도조 내각에서는 척무대신도 겸임하였다. 194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45년 호국동지회(護国同志会) 결성에 참여하였다. 전 후, 1945년 9월 11일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요코하마의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공직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참의원 의원 선거(미에현 선거구) 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첫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파벌의 일원으로서 정계에 복귀했으며, 1959년 제2차 기시 내각 개조내각에서 법무대신이 되었다. 1965년 훈일등서보장(勲一等瑞宝章) 을 받았으며, 1967년 재판관탄핵재판소장이 되었다. 1972년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 을 받았으며, 1980년 사망하였다.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다이고 다다시게(일본어: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해군…다이고 다다시게(일본어: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해군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해군 중장. 귀족원 의원. 작위는 후작. 옛 공가 출신 다이고 가(醍醐家) 제14대 당주. 아버지는 다이고 다다유키이며 보신 전쟁에서 공을 세워 종3위에 서임되었다. 하지만 가문상속분쟁으로 인해 1899년 5월 23일 도쿄부 고지마치에서 사촌 다이고 가쿠타로에게 총살당하고 이듬해 7월 4일에는 조부 다이고 다다오사마서 세상을 뜨고나니 다이고 종가의 가세는 기울게 되었고 다다시게는 다이고 가의 본가인 이치조 가에 의탁하게 된다. 후에 해군병학교를 성적으로 졸업한 후 승진하여 말년에는 해군 중장까지 오르게 된다. 2차 대전이 종전된 후 폰티아낙 현지 주민이 학살당하여 2만여명이 희생된 폰티아낙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네덜란드군에 의해 전범 혐의로 체포된 다다시게는 사형 판결을 받자마자 공개 총살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일본어: 近衛文麿, 1891년 10월 12일~1945년 12월 16일)는 섭가 고노에가 출신의 일본…고노에 후미마로(일본어: 近衛文麿, 1891년 10월 12일~1945년 12월 16일)는 섭가 고노에가 출신의 일본 정치인·공작, 제34·38·3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야스이 세이이치로(일본어: 安井 誠一郎, 1891년 3월 11일 ~ 1962년 1월 19일)는 일본의 관료이다. 참의원…야스이 세이이치로(일본어: 安井 誠一郎, 1891년 3월 11일 ~ 1962년 1월 19일)는 일본의 관료이다. 참의원 의장을 지낸 야스이 겐은 그의 동생이다.
다나카 고타로(田中 耕太郎, たなか こうたろう, 1890년 10월 25일 ~ 1974년 3월 1일)는 일본의 법학자이자…다나카 고타로(田中 耕太郎, たなか こうたろう, 1890년 10월 25일 ~ 1974년 3월 1일)는 일본의 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 대학 법학부장, 제1차 요시다 내각 문부대신,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 국제사법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오노 반보쿠(일본어: 大野 伴睦 (おおの ばんぼく) 오오노 반보쿠[*], 1890년 9월 20일~1964년 5월 29일)는…오노 반보쿠(일본어: 大野 伴睦 (おおの ばんぼく) 오오노 반보쿠[*], 1890년 9월 20일~1964년 5월 29일)는 13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일본의 고전적인 당인파 정치인으로 유명하며 반짱(伴ちゃ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널리 사랑받은 정치인이었다. "정치는 의리와 인정이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그냥 사람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야스이 에이지(일본어: 安井 英二, 1890년 9월 18일 ~ 1982년 1월 9일)는 일본의 내무 관료이자 정치인이다.…야스이 에이지(일본어: 安井 英二, 1890년 9월 18일 ~ 1982년 1월 9일)는 일본의 내무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오카야마현지사, 오사카부지사, 제1차 고노에 내각의 문부대신,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내무대신 겸 후생대신, 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야스이는 1890년, 도쿄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내무성에 들어갔다. 1918년 경보국(警保局) 사무관이 되어, 난바라 시게루와 함께 노동조합법(労働組合法)의 초안을 만들기 위해 1923년부터 1년간 독일에서 조사하였다. 그 후 내무대신 비서관 (대신관방문서 과장 겸임), 지방국(地方局) 행정과장으로서 지방 자치 개혁을 담당하였다. 1929년 경보국 보안 국장이 되었으며, 이후 오카야마현 지사·사회국 노동 국장을 거쳐 1932년, 지방국장이 되어 선거숙정운동을 추진하였고, 1935년 오사카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에 의해 문부대신이 되었고, 1938년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 1940년 신체제운동(新体制運動)의 완성을 기해 다시 내각을 조성한 고노에에 의해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내무대신이 되었다. 하지만 부처 내에서의 반발로 인해 불과 반년 만에 경질되었고, 1945년 본토결전(本土決戦)에 대비, 오사카부 지사에 재임되어 긴키 지방 총감을 겸임하였다. 전후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1958년 국가공안위원이 되었다.
김용무(金用茂, 1891년 9월 13일 ~ ?)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해방 직후 한민당 창당에…김용무(金用茂, 1891년 9월 13일 ~ ?)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해방 직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미군정기 때 재판장, 1,3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전라남도 무안 출생이다.
이와키 다카노리(岩城隆徳, 1890년~1979년)는 다이쇼, 쇼와 시대의 정치인, 기업인, 화족(귀족원 자작의원)이다. 옛…이와키 다카노리(岩城隆徳, 1890년~1979년)는 다이쇼, 쇼와 시대의 정치인, 기업인, 화족(귀족원 자작의원)이다. 옛 이름은 아오야마 유키노리(青山幸徳), 이와키 유키노리(岩城幸徳)이다. 아오야마 유키요시 자작의 5남으로 태어났고 이와키 다카쿠니 자작의 양자로 입적하게 된다. 1911년 양부 다카쿠니 사후 동년 4월 21일 이와키 자작가의 작위를 습작하였고 이름을 유키노리에서 다카노리로 개명하였다.
송진우(宋鎭禹, 1890년 6월 11일~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송진우(宋鎭禹, 1890년 6월 11일~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 사상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평이며, 전라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출신이다. 아호는 고하(古下)이고, 그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초대 당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