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金仁湜, 1912년 옹진 ~ 2008년 2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제헌…김인식(金仁湜, 1912년 옹진 ~ 2008년 2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옹진군 을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 3월 7일, 민주국민당이 주동이 된 개헌안에 반대하면서 탈당했다. 2006년 당시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제헌 국회의원이었으며 2008년 2월 25일, 숙환으로 인해 향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소노다 스나오(일본어: 園田 直, 1913년 12월 11일 ~ 1984년 4월 2일)는 일본의 정치인 가문이자, 정치인이다.…소노다 스나오(일본어: 園田 直, 1913년 12월 11일 ~ 1984년 4월 2일)는 일본의 정치인 가문이자,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 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 후생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남동생 소노다 미키오(園田幹男)는 육군 소령, 장남 소노다 히로유키(園田博之)는 내각관방 부장관, 중의원을 지냈다.
에가미 시게루(일본어: 江上 茂, 1912년 12월 7일 ~ 1981년 1월 8일)는 선구적인 일본 쇼토칸 가라테 쇼토카이를…에가미 시게루(일본어: 江上 茂, 1912년 12월 7일 ~ 1981년 1월 8일)는 선구적인 일본 쇼토칸 가라테 쇼토카이를 창시한 사람이며, 현대 가라테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기친 후나코시의 제자였다.
노부히토 친왕비 기쿠코(일본어: 宣仁親王妃喜久子, 1911년 12월 26일 ~ 2004년 12월 18일)는 일본의 황족으로…노부히토 친왕비 기쿠코(일본어: 宣仁親王妃喜久子, 1911년 12월 26일 ~ 2004년 12월 18일)는 일본의 황족으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비이다. 혼인 전의 이름은 도쿠가와 기쿠코(徳川喜久子 (とくがわ きくこ)). 조부는 옛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이었던 공작 도쿠가와 요시노부, 아버지는 요시노부의 7남 공작 도쿠가와 요시히사(徳川慶久)이며 어머니는 미에코(實枝子,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딸)이다. 신위는 친왕비. 어인(御印)은 거북이다. 노부히토 친왕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세지마 류조(일본어: 瀬島 龍三, 1911년 12월 9일 ~ 2007년 9월 4일)는 일본의 군인, 기업가이다. 그는 제2차…세지마 류조(일본어: 瀬島 龍三, 1911년 12월 9일 ~ 2007년 9월 4일)는 일본의 군인, 기업가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초급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후에 이토추 상사의 회장이 되었다.
김해송(金海松, 일본식 이름: 金山松夫 가네야마 마쓰오, 본명: 김송규, 본명 한자: 金松奎, 1910년 12월 ~…김해송(金海松, 일본식 이름: 金山松夫 가네야마 마쓰오, 본명: 김송규, 본명 한자: 金松奎, 1910년 12월 ~ 1950년?)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가수 겸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미키 타다나오(일본어: 三木 忠直 (みき ただなお): 1909녀 12월 15일 - 2005년 4월 20일)는 일본의 해군…미키 타다나오(일본어: 三木 忠直 (みき ただなお): 1909녀 12월 15일 - 2005년 4월 20일)는 일본의 해군 군인, 공학자다. 최종 계급은 해군기술소좌. 폭격기 긴가(은하), 자폭기 오카(앵화), 그리고 신칸센 0계 전동차의 개발자다.
다케나카 에이타로(일본어: 竹中 英太郎 (たけなか えいたろう): 1906년 12월 19일 - 1988년 4월 8일)는 일본의…다케나카 에이타로(일본어: 竹中 英太郎 (たけなか えいたろう): 1906년 12월 19일 - 1988년 4월 8일)는 일본의 삽화가, 노동운동가, 실업가다. 신좌파 활동가이자 문예평론가인 다케나카 로가 그의 장남이다. 차녀 카네코 무라사키(金子紫)는 “다케나카 에이타로 기념관” 관장이다. 후쿠오카시 우에나지마(현재의 후쿠오카시 중앙구 다이묘)의 몰락 사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 로에 따르면 심장역위증으로 심장이 오른쪽, 십이지장이 왼쪽에 있는 희귀신체의 소유자였다고 하는데, 차녀 무라사키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1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극빈 속에서 자랐다. 11세 때 구마모토로 이주, 구마모토중학교 야간부에서 배우면서 경찰의 급사(給仕)로 고학을 했다. 이 때 입수한 사회주의 관련 문건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24년 4월, 구마모토무산자동맹 설립에 동참했다. 그 밖에 피차별부락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마모토수평사 창립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는데, 스즈키 요시아키에 따르면 확실하게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며, “구마모토무산자동맹 등을 통해 측면에서 구마모토수평사의 활동에 협력한” 정도로 생각된다. 다케나카와 함께 구마모토무산자동맹을 결성한 이와노 타케시(岩野猛)・이와오 이에야다(岩尾家貞)는 모두 구마모토수평사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1924년 가을, 혁명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상경, 제1외국어학교 영문과 및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를 버는 수단으로 삽화나 제본 일을 시작하면서 삽화가가 되었고, 요코미조 세이시가 편집장으로 있던 『신청년』지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음수」의 삽화를 담당했다. 이후 『신청년』을 중심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코가 사부로・오오시타 우다루・유메노 큐사쿠 등의 소설에 삽화 작품을 실었다. 1936년 2·26 사건을 계기로 붓을 꺾고 단신으로 만주에 건너가 『월간 만주』, 『어린이 만주』의 편집에 종사했으나, 일본으로 송환되어 도쿄 시나가와에서 철공소를 경영했다. 1942년, 전쟁통에 후처 츠네코(つね子)의 고향 고후로 소개(疎開)했다. 1944년 야마나시일일신문에 입사해서 신문기자가 된다. 전후에는 야마나시일일신문 노조위원장, 일본신문노련 부위원장, 지노위 노동자측위원, 야마나시일일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현의원 보궐선거에도 입후보해 보았으나 낙선했다. 또 테레비 야마나시의 『일요방담』에 고정출연했다. 전후에는 이와타 센타로・츠보이 시게지 등이 화단으로 복귀하라고 권유했으나 고사하고 취미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1967년 장남 로의 부탁으로 『기온마츠리』 선전 팜플렛용 작품을 제작했고, 1974년 로의 프로모트로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방일했을 때 소묘와 영화 스틸컷을 콜라주한 포스터를 제작했다. 디트리히는 호텔방에 장식된 그 작품들이 마음에 들어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한다. 만년에는 장녀와 손자를 위해 서비스회사 “중부문교(中部文教)”를 설립했다. 1988년 도쿄 신주쿠 노상에서 허혈성 심부전 발작을 일으켜 급사했다. 향년 82세.
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김성삼(金省三, 1906년 12월 7일 ~ 1960년 7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해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안익태(安益泰, 1906년 12월 5일~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태생의 스페인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트럼페터…안익태(安益泰, 1906년 12월 5일~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태생의 스페인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했으나, 중반부터 당시 일본과 친밀감이 있던 독일로 넘어가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을 만들고 음악회를 지휘했다. 1941년에는 일본의 궁중 음악인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하였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후지모토 사다요시(일본어: 藤本 定義, 1904년 12월 20일 ~ 1981년 2월 18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후지모토 사다요시(일본어: 藤本 定義, 1904년 12월 20일 ~ 1981년 2월 18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감독이다.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출신이며 도쿄 교진군 초대 감독을 맡는 등 여러 프로팀에서 지도자를 역임했는데 본인 이후 한때 감독들이 30번을 달았으나 에가와 스구루의 맹활약 이후 투수들이 30번을 달고 있다.
아카기 무네노리(일본어: 赤城 宗徳 (あかぎ むねのり), 1904년 12월 2일~1993년 11월 11일)는 15선 중의원…아카기 무네노리(일본어: 赤城 宗徳 (あかぎ むねのり), 1904년 12월 2일~1993년 11월 11일)는 15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하야시 후미코(일본어: 林 芙美子, 1903년 12월 31일 ~ 1951년 6월 28일)는 일본의 작가, 소설가이자…하야시 후미코(일본어: 林 芙美子, 1903년 12월 31일 ~ 1951년 6월 28일)는 일본의 작가,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쇼와 시대 여성 문학의 대표적인 저자이며, 대표작으로 《밥》(めし), 《방랑기》(放浪記), 《뜬구름》(浮雲) 등이 있다.
사쿠라이 사부로고에몬(일본어: 桜井 三郎右衛門, さくらい さぶろうえもん, 1903년 12월 9일 ~ 1991년 3월…사쿠라이 사부로고에몬(일본어: 桜井 三郎右衛門, さくらい さぶろうえもん, 1903년 12월 9일 ~ 1991년 3월 24일)은 일본의 기업인, 정치가이다. 원래 성은 오무라(大村)였다.
고바야시 다키지(일본어: 小林 多喜二 (こばやし たきじ), 1903년 12월 1일 ~ 1933년 2월 20일)는 일본의 좌파…고바야시 다키지(일본어: 小林 多喜二 (こばやし たきじ), 1903년 12월 1일 ~ 1933년 2월 20일)는 일본의 좌파 소설가이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게잡이 공선》이 있다.
인태식(印泰植, 1902년 12월 17일~1975년 5월 22일)은 일제강점기의 관료 출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인태식(印泰植, 1902년 12월 17일~1975년 5월 22일)은 일제강점기의 관료 출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교동(喬桐)이며 충청남도 당진 출생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도호쿠 제국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세무 관리로 근무했다. 광복 후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당진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6년 5월에는 제7대 재무부장관직을 맡았다. 이후 제4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다. 1963년에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당진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 고지에 올랐다. 1964년에는 민주공화당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는 등 요직에 머물렀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자유당 전국구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동아중건설 사장을 지내며 사업가로 말년을 보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다.
히로하시 다다미쓰(일본어: 広橋真光, 1902년(메이지 35년) 12월 11일 ~ 1997년(헤이세이 9년) 5월 21일)는…히로하시 다다미쓰(일본어: 広橋真光, 1902년(메이지 35년) 12월 11일 ~ 1997년(헤이세이 9년) 5월 21일)는 일본의 화족이자 내무관료이다.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와 도조 히데키의 비서관을 역임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바 현지사를 1개월간 지냈다.
후치다 미쓰오(일본어: 淵田 美津雄, 1902년 12월 3일 ~ 1976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군인이며, 기독교…후치다 미쓰오(일본어: 淵田 美津雄, 1902년 12월 3일 ~ 1976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군인이며, 기독교 전도사이다. 나라현 기타가쓰라기촌(현재의 가쓰라기시) 출신. 구제 나라 현립 우네비 중학교를 거쳐서, 1924년 7월, 해군병학교(52기)를 졸업했다. 진주만 공격에 있어서 공습 부대의 총지휘관으로, 제1차 공격대(및 예하의 수평폭격대)를 지휘하여「도・도・도」(ト・ト・ト, 전군 공격하라의 뜻) 및「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 기습에 성공함)이 후치다에게서 타전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해군 중좌였다. 개전 전, 제3항공전대 참모에서 2번째 항모 아카기(赤城)의 비행대장으로 취임했다. 이례적인「파격인사」였다. 동기이자 친구이며, 사실상의 작전 입안자였던 겐다 미노루(源田実)의 희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제1항공함대 기함 아카기에서는 1941년 11월 이래,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하기까지, 후치다 중좌(1941년 10월 승진), 이타야 시게루(板谷茂) 소좌, 무라타 시게하루(村田重治) 소좌라는 3명의 비행대장이 있는 이례의 배치가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때에는 미드웨이에 향하는 도중에 맹장염에 걸려 미드웨이 공습대의 지휘를 잡지 못하여, 항모 아카기에 남았다. 아카기에서 탈출할 때에 양쪽 발이 골절되었다. 일본 송환 후에는 요코스카 항공지휘관, 해군 대학교 겸 육군 대학교 교관을 거쳐서 군령부에 속했고, 제1항공함대 참모, 연합함대・남방군 참모를 맡았다. 종전시에는 해군 대좌였다. 패번 후에는 제2복원성(예전의 해군성)의 사실 조사부, GHQ의 역사과 촉탁으로서 전쟁 중의 자료 정리연구를 했다. 후치다의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에 대한 평가는 신랄하다. 1949년, 기독교에 입교한 이래 1966년에 은퇴하기까지 미국과 일본 각지에서 전도활동에 종사했다. 미국에서는「진주만 공격의 영웅」으로서 초대된 적이 많았다고 한다. 1967년, 고향에 은거했다. 1976년 5월 30일, 당뇨병의 합병증에 걸려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노우에 노리아키(일본어: 井上鑑昭, 1902년 (메이지 35년) 12월 3일 ~ 1994년 (헤이세이 6년) 4월…이노우에 노리아키(일본어: 井上鑑昭, 1902년 (메이지 35년) 12월 3일 ~ 1994년 (헤이세이 6년) 4월 13일)는 일본의 무도가이다. 신에이타이도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아이키도의 개조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그의 외삼촌이다. 다만, 원래의 성명은 이노우에 요이치로(井上要一郎)라고 표현되며, 노리아키는 다른 명칭이다.
하마자키 신지(일본어: 浜崎 真二, 1901년 12월 10일~1981년 5월 6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하마자키 신지(일본어: 浜崎 真二, 1901년 12월 10일~1981년 5월 6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히로시마현 구레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현역 시절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했고 선수 겸임 감독으로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령 공식전 출장 기록을 2014년 9월 5일 야마모토 마사(주니치)에 의해서 깨질 때까지 64년 간에 걸쳐 보유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신장은 150cm에서 160cm까지 등의 여러 설이 있어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키가 작은 선수로 여겨질 수 있다. 친동생 하마자키 다다하루도 히로시마 상업학교 시절 쓰루오카 가즈토 등과 함께 고교 야구 하계 및 춘계 대회에서 연패 달성했을 때의 선수(투수·내야수)로 활약했고 그 후 심판으로서 헤이와다이 사건의 주심을 맡아 역사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도 알려졌다.
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일본식 이름: 德光允도쿠미쓰 마사시, 德光翼도쿠미쓰 다스쿠, 1900년 12월…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일본식 이름: 德光允도쿠미쓰 마사시, 德光翼도쿠미쓰 다스쿠, 1900년 12월 21일~1952년 1월 30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정치인이다. 다른 이름으로 허윤(許允)이 있으며 법명은 경호(鏡湖), 호는 현주(玄州)이다. 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문시환의 뒤를 이어 제헌 국회 국회의원(부산부 갑)을 지냈다. 대한제국 경상남도 부산 출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피랍지에서 숨졌다.
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이다. 이케다는 자신의 "소득 배증 계획"으로 유명하다. 이 계획은 겨우 겨우 10년의 세월에 국내총생산으로 불린 일본의 경제 총생산을 두배로 늘이는 데 목표로 삼았다. 그는 또한 일본과 미국 사이에 관계를 향상시키는 도움을 주었다. 추가로 그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책임을 맡았다.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1898년 12월 27일 ~ 1960년 10월 12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일본사회당의 3대…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1898년 12월 27일 ~ 1960년 10월 12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일본사회당의 3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0년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암살당했다. 도쿄도 고토구의 미야케 마을 출생으로 1923년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해 1925년 일본 최초의 무산자를 대상으로 한 단일 정당 농민노동당의 서기장으로 추천되었으나 창당 3시간만에 정부의 명령으로 해산당한다. 1926년 노동농민당이 결성되지만 우파 사회민중당, 중간파 일본노동당, 좌파 노동농민당으로 분열되고 아사누마는 일본노동당에 참여해 1932년 분열된 정당들을 규합해 사회대중당을 창당했다. 이때 서기장 아소 히사의 군부에게 협력해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자는 이념을 지지했다. 1940년 아소의 사망 후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1942년 총선에서 사퇴하고 1945년 일본사회당에 결성되자 조직 부장에 취임했다. 1947년 서기장이던 니시오 스에히로가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 입당해 서기장 대리가 되었고 1948년 정식 서기장이 되어 1949년 중의원 선거에서 가타야마가 낙선해 임시 위원장 자리에 공백이 되자 국회 수반에 지명된다. 한때 잠시 물러났으나 1950년 복귀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을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가 충돌하자 절충안을 내놓았으나 좌우 분열을 막을 순 없었다. 1955년 사회당 통일로 서기장에 취임하고 1959년 중국을 방문해 미국이 중국과 일본 공동의 적이라는 강도 높은 발언을 했다. 1960년 3월 23일 니시오 스에히로의 탈당으로 민주사회당이 결성되고 스즈키 모사부로 위원장이 사임하자 후임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10월 12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민주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던 중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의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다바타 마사지(일본어: 田畑政治, 1898년 12월 1일 ~ 1984년 8월 25일)는 일본의 기자, 수영 감독이다.…다바타 마사지(일본어: 田畑政治, 1898년 12월 1일 ~ 1984년 8월 25일)는 일본의 기자, 수영 감독이다. 1964년 하계 올림픽 유치 활동의 중심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위다푸(욱달부, 중국어 정체자: 郁達夫, 간체자: 郁达夫, 병음: Yù Dá Fū, 문화어: 유다부, 1896년 12월 7일…위다푸(욱달부, 중국어 정체자: 郁達夫, 간체자: 郁达夫, 병음: Yù Dá Fū, 문화어: 유다부, 1896년 12월 7일 ~ 1945년 9월 17일)은 중국의 소설가이다. 대표작으로 『몰락(沈淪)』, 『잃어버린 양(迷羊)』 등이 있는데, 『몰락』은 몰락해가는 신경질적 개인의 성적 추구를 집중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거듭나며, 퇴폐적이며 자아 폭로적인 경향에 대해 찬양과 비난이 엇갈리면서 열딘 문학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가네코 미쓰하루(일본어: 金子光晴 かねこみつはる[*])는 일본의 시인이자 화가이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쇼와 시대의…가네코 미쓰하루(일본어: 金子光晴 かねこみつはる[*])는 일본의 시인이자 화가이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쇼와 시대의 격동기를 살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에 대하여 반대하는 왕성한 활동을 했다.
요시다 마사히로(일본어: 吉田 正廣 (よしだ まさひろ), 1895년 12월 8일~1972년 1월 10일)는 일본의…요시다 마사히로(일본어: 吉田 正廣 (よしだ まさひろ), 1895년 12월 8일~1972년 1월 10일)는 일본의 역사가이다. 주 연구 분야는 한국사와 향토사이다. 조선총독부의 주임관으로 활동했으며 조선농지령 시행 당시의 총독부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이들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거나,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참여했다. 사후, 여러 사회단체에서 정리한 주요 친일파 목록에 등재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배희범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도이 다쓰오(일본어: 土井辰雄, どい たつお), 1892년 12월 22일 ~ 1970년 2월 21일)은 일본의 가톨릭…도이 다쓰오(일본어: 土井辰雄, どい たつお), 1892년 12월 22일 ~ 1970년 2월 21일)은 일본의 가톨릭 성직자이다.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960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미야기현 센다이 출신이며, 1902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신학교를 마친 후 사제 서품을 받았고, 로마에 유학했다. 그 후 일본의 교황 대사 비서를 지냈다.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도쿄 대교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계속 대주교로 재직했으며, 일본 가톨릭 발전을 위한 기대 속에 교황 요한 23세 시대인 1960년, 일본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필린핀 포로학대죄로 유일하게 중장으로서 교수형 판결을 받았으며,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노동총연맹의 후보로 출마했으며 3위로 낙선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같은 선거구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전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 농림대신, 척무대신(拓務大臣), 법무대신, 재판관탄핵재판소장, 중의원 의원, 참의원 등을 지냈다. 도쿄부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区)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농상무성 관료가 되었다. 농림성 잠사국장(蚕糸局長) 을 거쳐, 1937년 기획청(企画庁) 설립에 수반해 기획청 초대 차장이 되었다. 그 후 농업 용수차관이 되었으며, 1941년 고노에 내각에 농림수산대신으로 첫 입각하였다. 도조 내각에서도 계속해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으며, 도조 내각에서는 척무대신도 겸임하였다. 194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45년 호국동지회(護国同志会) 결성에 참여하였다. 전 후, 1945년 9월 11일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요코하마의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공직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참의원 의원 선거(미에현 선거구) 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첫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파벌의 일원으로서 정계에 복귀했으며, 1959년 제2차 기시 내각 개조내각에서 법무대신이 되었다. 1965년 훈일등서보장(勲一等瑞宝章) 을 받았으며, 1967년 재판관탄핵재판소장이 되었다. 1972년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 을 받았으며, 1980년 사망하였다.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기무라 마사토미(일본어: 木村 昌福, 1891년 12월 6일 ~ 1960년 2월 14일) 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제국…기무라 마사토미(일본어: 木村 昌福, 1891년 12월 6일 ~ 1960년 2월 14일) 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키스카섬 철수작전을 성공시켜 유명해졌다. 시즈오카현 태생으로, 변호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토(近藤)씨였으나, 어머니쪽의 기무라씨를 성으로 삼았다. 해군병학교 41기로 입학해서 졸업성적은 최하위권이었고, 동기생으로는 구사카 류노스케가 있다. 병학교의 졸업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장교로서 출세코스인 해군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눈에 띠지 않는 해상 근무를 전전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뛰어난 실전능력으로 여러 작전을 성공시켜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특히 1943년 7월, 알류샨 열도상의 키스카섬에 고립된 병력을 미군 함대의 포위를 뚫고 구출하여 유명해졌다. 1944년 레이테 해전에서도 참가하여 일본의 참패해도 불구하고 홀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이후 당시 불가능하다고 여기었던 키스카섬 철수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해군통신학교 교장으로서 종전을 맞았다. 염전 사업을 하다 암으로 사망하였다.
세노오 기로(일본어: 妹尾 (せのお) 義郎 (ぎろう): 1889년 12월 16일-1961년 8월 4일)는 일본의…세노오 기로(일본어: 妹尾 (せのお) 義郎 (ぎろう): 1889년 12월 16일-1961년 8월 4일)는 일본의 불교운동가다. 히로시마현 히바군 토죠정 출신. “사유 없는 공동사회”를 제창, 불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 집안은 술도가를 운영했고, 원래 밥화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폐병 등을 앓으면서 1고를 휴학하던 중 인연이 생긴 두부 상인이 열성 법화신도여서, 그의 권유로 법화경을 읽게 되었다. 1918년 혼다 닛쇼가 주재하는 법화단체 통일단(統一団)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19년 통일단의 청년신자들을 중심으로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大日本日蓮主義青年団)을 조직, 기관지를 발행하고 순회강연을 다니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청년단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에 관계하게 되어,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련주의청년단은 1931년 세노오의 주도 하에 발전적 해산하고 초종파적인 신흥불교청년동맹(신흥불청)으로 거듭났다. 4월 5일 열린 결성대회에서 세노오는 동맹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흥불청은 그 강령에서 “석가의 찬앙과 불국토 건설,” “기성종단의 배격,” “자본주의 경제조직의 혁정(革正)과 당래사회의 실현” 등을 내걸고 노동운동, 소비조합운동, 반전운동, 반파쇼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36년 2월 세노오는 특별고등경찰에게 검거되었고, 1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동년 12월 재검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1940년 12월 투옥되었다. 전후에는 불교사회동맹(仏教社会同盟) 위원장, 평화추진국민회의(平和推進国民会議) 의장, 일중우호협회 동경도련회장 등을 지냈다. 1959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61년 8월 나가노현의 자택에서 죽었다.
기쿠치 간(일본어: 菊 (きく)池 (ち) 寛 (かん), 1888년 12월 26일 ~ 1948년 3월 6일)은 일본 다이쇼…기쿠치 간(일본어: 菊 (きく)池 (ち) 寛 (かん), 1888년 12월 26일 ~ 1948년 3월 6일)은 일본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본명은 기쿠치 히로시(일본어: 菊 (きく)池 (ち) 寛 (ひろし))로 한자 표기는 같다. 1888년 다카마쓰시에서 태어나 법률가를 목표로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지만, 징병을 피하기 위해 중퇴. 다시 교토 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1916년 동대학 졸업 후 지지신보(時事新報) 기자로 근무했다. 제3-4차 '신시조' 동인으로서 1916년 희곡 <屋上の狂人(오쿠조노교진, 옥상의 광인)> 등을 발표했으나 이후에는 주로 단편소설을 집필, 1918년 <無名作家の日記(무메이사카노닛키, 무명작가의 일기)>를 써 <주오코론>에 발표하여 신진 작가의 위치를 확립했다. 1923년 <분게이슌주(文藝春秋)>를 창간, 1928년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업가로서 활약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 나오키 상 등을 제정하여 작가의 복지와 신인의 발굴. 육성 등에 공헌한 바 있다. 창작 면에서는 1920년의 '신주후진(眞珠夫人)'으로 시작되는 통속소설을 주로 집필하였다. 인생의 '극적 순간'을 포착하여, 명쾌한 합리적인 질서 속에 살리는 점에 그의 희곡과 소설의 특색이 있다.
야나기사와 야스쓰구(柳沢保承, 1888년 12월 20일~1960년 10월 25일)는 일본의 화족이다. 야마토 고리야마번…야나기사와 야스쓰구(柳沢保承, 1888년 12월 20일~1960년 10월 25일)는 일본의 화족이다. 야마토 고리야마번 제6대 번주 야나기사와 야스노부(柳沢保申)의 장남이다. 부친의 양자 야나기사와 야스토시(柳沢保恵)의 뒤를 이어 백작 작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