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야스마사(松平康昌)는 일본 제국의 화족, 관료이다. 후쿠이 마쓰다이라가 제19대 당주로서 작위는 후작이다. 종2위…마쓰다이라 야스마사(松平康昌)는 일본 제국의 화족, 관료이다. 후쿠이 마쓰다이라가 제19대 당주로서 작위는 후작이다. 종2위 훈1등.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를 지냈으며 사가미 여자대학 학장을 지냈다. 부인은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둘째 딸 아야코(혹은 료코, 綾子)이다. 후쿠이번 마지막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모치아키 후작의 손자이자 마쓰다이라 야스타카 후작의 아들이다. 부친 야스타카 사후 후작위를 습작하였다. 옛 후쿠이번 출신 오카다 게이스케의 내각 성립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고, 근대 귀족교육과 여성교육에 기여하고 각종 학교 운영에 관여하였다.
아와야 센키치(일본어: 粟屋仙吉, 1893년 11월 7일 ~ 1945년 8월 6일)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1933년…아와야 센키치(일본어: 粟屋仙吉, 1893년 11월 7일 ~ 1945년 8월 6일)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1933년 고스톱 사건 당시 오사카부 경찰 부장이었으며 1945년 8월 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시의 시장이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이다. 호(號)는 창랑(滄浪), 자(字)는 치우(致雨, 아명(兒名)은 장삼욱(張三旭). 영문 이니셜은 TS.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했고, 정부 수립 이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부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 좌익 정당과 좌익 정치운동을 단속하였으나,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학자 여현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과 정부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리 출신이다.
기하라 히토시(일본어: 木原 均, きはら ひとし, 1893년 10월 21일 ~ 1986년 7월 27일)는 일본의…기하라 히토시(일본어: 木原 均, きはら ひとし, 1893년 10월 21일 ~ 1986년 7월 27일)는 일본의 유전학자이다. 교토 대학의 명예 교수 학위,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었으며,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수영을 연구하면서 종자 식물의 성염색체를 발견하였으며, 3배체를 이용한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하였다. 이는 염색체 수가 다른 생식세포끼리의 교배를 이용한 것이다. 전일본 스키 연맹 회장, 일본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 모교의 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1986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쿠루마 사메조(일본어: 久留間 (くるま) 鮫造 (さめぞう): 1893년(메이지 26년) 9월 24일-1982년(쇼와 57년)…쿠루마 사메조(일본어: 久留間 (くるま) 鮫造 (さめぞう): 1893년(메이지 26년) 9월 24일-1982년(쇼와 57년) 10월 2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호세이대학 명예교수, 호세이대학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전공은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렉시콘』의 편자로 유명하다. 릿쿄대학 명예교수 쿠루마 켄의 아버지다.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종이 도매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을 계승하기를 원한 부모의 바람에 반하여,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중학교, 제6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1개월 후 정치학과로 전과한다. 병으로 1년 휴학하고 졸업했다. 1918년 스미토모은행에 입사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또한 쌀 소동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힘에 충격을 받아 3개월 남짓만에 퇴사했다. 일단 본가로 귀향한 뒤 이듬해 2월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에 입소했다. 1920년부터 2년간 쿠시다 타미조와 함께 자료수집을 위한 유럽행을 명받고 쿠루마는 영국에서, 쿠시다는 독일에서 도서자료를 모았다. 1923년부터 3년간 도시샤대학에서 경제학사를 강의했다. 동시기 벌어지던 일본자본주의 논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공습으로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의 사무소・장서각이 전소했다. 전후 소장 타카노 이와사부로와 함께 연구소 재건을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 1946년 9월 오오우치 효에의 권유로 호세이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호세이대학에서는 경제학사를 담당했다. 1960년 호세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 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말년에는 호세이와 릿쿄의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자들을 모아 마르크스 사전인 『마르크스 경제학 렉시콘』을 만들었다. 겸임교수로서 아이치대학에서, 비상근강사로서 동경대학, 홋카이도대학, 가쿠슈인대학 등에서 경제학사를 강의했다.
이시모토 미시오(일본어: 石 (いし)本 (もと) 巳 (み)四 (し)雄 (お), 1893년 9월 17일 ~ 1940년 2월…이시모토 미시오(일본어: 石 (いし)本 (もと) 巳 (み)四 (し)雄 (お), 1893년 9월 17일 ~ 1940년 2월 4일)는 일본의 지진학자이자 음향학자로, 제2대 도쿄 대학 지진 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였다.
이치마다 히사토(일본어: 一万田 尚登 (いちまだ ひさと), 1893년 8월 12일~1984년 1월 22일)는 5선 중의원…이치마다 히사토(일본어: 一万田 尚登 (いちまだ ひさと), 1893년 8월 12일~1984년 1월 22일)는 5선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무라오카 하나코 (村岡 花子, 1893년 (메이지 26년) 6월 21일 ~ 1968년 (쇼와 43년) 10월 25일)는…무라오카 하나코 (村岡 花子, 1893년 (메이지 26년) 6월 21일 ~ 1968년 (쇼와 43년) 10월 25일)는 일본의 번역가, 아동문학가, 아동문학에서 유명한 몽고메리의 많은 작품과, 엘레나 포터, 올컷 등의 작품의 번역을 담당했다. 기독교문필가협회 (현 일본크리스천 펜클럽) 초대회장 (재임 1952년 (쇼와 27년) 6월 ~ 1958년 (쇼와 33년) 10월)을 맡았다.
고바야시 소사쿠(일본어: 小林 宗作, こばやし そうさく, 1893년 6월 18일 ~ 1963년 2월 8일, 본명 : 가네코…고바야시 소사쿠(일본어: 小林 宗作, こばやし そうさく, 1893년 6월 18일 ~ 1963년 2월 8일, 본명 : 가네코 소사쿠, 일본어: 金子宗作)는 일본의 리듬 교육 연구자, 아동 교수 연구가이다. 군마현 아가쓰마군의 이와시마 촌(현재의 히가시아가쓰마정)에서 태어났다. 도쿄 음악학교의 사범과(現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를 졸업했다.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소설《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 본문에 나오는 고바야시 소사쿠이다.
이치카와 후사에(일본어: 市川房枝, 1893년 5월 15일 ~ 1981년 2월 11일)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정치인, 여성…이치카와 후사에(일본어: 市川房枝, 1893년 5월 15일 ~ 1981년 2월 11일)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정치인,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였다. 이치카와는 일본의 여성 참정권 운동의 핵심 인물로, 1945년 여성으로 선거권이 확대되는 데 기여하였다.
이주인 마쓰지(伊集院松治)는 일본 제국의 해군군인, 화족이다. 도쿄부 고지마치구(지금의 도쿄도 지요다구) 출신. 최종 계급은…이주인 마쓰지(伊集院松治)는 일본 제국의 해군군인, 화족이다. 도쿄부 고지마치구(지금의 도쿄도 지요다구) 출신. 최종 계급은 해군 중장이며 작위는 남작이다. 원수 이주인 고로 남작의 아들이며 오노 다케지 해군 소장의 동생이다. 구제 도쿄 고등사범학교부속중학교(지금의 쓰쿠바 대학 부속중학교·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병학교 43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입학성적과 졸업성적은 좋지않았다.
마키노 시로(牧野四郎, 1893년 4월 18일~1945년 8월 10일)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마키노 시로(牧野四郎, 1893년 4월 18일~1945년 8월 10일)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다. 1944년 필리핀 레이테섬에 배치된 제16사단장을 맡아, 레이테 섬에 상륙한 미군에 저항해 싸우다가 620명의 부하만 남기고 항복한 후 자결한다.
후지와라 카쿠라이(일본어: 藤原鶴來, 1893년 4월 15일 - 1990년 1월 15일)는 오카야마현 출생의 서예가이다.…후지와라 카쿠라이(일본어: 藤原鶴來, 1893년 4월 15일 - 1990년 1월 15일)는 오카야마현 출생의 서예가이다. 「화한서예사」, 「서원(新書圖書典)」의 편찬자. 청룡사의 「구카이기념비」를 휘호. 본명은 시게루(茂), 학래는 호이다.
니와 야스지로(일본어: 丹 (に)羽 (わ) 保 (やす)次 (じ)郎 (ろう), 1893년 4월 1일~1975년 2월 28일)는…니와 야스지로(일본어: 丹 (に)羽 (わ) 保 (やす)次 (じ)郎 (ろう), 1893년 4월 1일~1975년 2월 28일)는 일본의 전기공학자로 팩시밀리의 일종인 "NE식 사진 전송 장치"(일본어: NE式写真電送装置)를 개발하였다.
다치바나 고자부로(일본어: 橘孝三郎, 1893년 3월 18일 ~ 1974년 3월 30일)는 일본의 정치 운동가…다치바나 고자부로(일본어: 橘孝三郎, 1893년 3월 18일 ~ 1974년 3월 30일)는 일본의 정치 운동가, 농본주의(農本主義) 사상가로, 파시스트이자 초국가주의자였다. 이바라키현 히가시이바라키군 출신으로, 고등학교 중퇴 후, 오스기 사카에와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의 책을 통해 영국의 시인·사회주의 사상가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와 표트르 크로폿킨 등의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외에 레프 톨스토이, 시라카바파(白樺派), 캉유웨이 등의 영향도 받았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강연 활동을 하여, 1929년 애향회(愛郷会)를 결성하였다. 이바라키현의 각 군에 지부가 형성되었으며, 농본주의에 의거하는 청소년 교육을 목표로 하여, 1931년 근로 학교 애향숙(愛郷塾) 을 설립하였다. 가자미 아키라에게 자금 원조를 받았으며,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를 알게 되어, 5·15 사건이 일어날 무렵 학원생 7명을 인솔해 도쿄의 변전소를 습격하였다.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과 살인·살인 미수 혐의를 받아 무기 징역 판결을 받았지만, 1940년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고향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였고, 1959년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全日本愛国者団体会議)의 고문이 되었다.
가게사 사다아키(일본어: 影佐 禎昭 (かげさ さだあき), 1893년 3월 7일~1948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가게사 사다아키(일본어: 影佐 禎昭 (かげさ さだあき), 1893년 3월 7일~1948년 9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으로 중일 전쟁 때 왕징웨이 정권에 관여하여 중국 내 친일 정권을 구축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1893년 1월 27일 ~ 1961년 12월 25일) 일본의 경제학자・식민정책 학자로 일본…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1893년 1월 27일 ~ 1961년 12월 25일) 일본의 경제학자・식민정책 학자로 일본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다. 도쿄의 제일고등학교 재학 중 니토베 이나조,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했다.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일본의 무교회파 기독교 지도자로도 알려져 있다. 성경의 여러 책을 주석하였다. 한국의 김교신에게 큰 영향을끼쳤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를 가지고 1937년 중일전쟁을 비판하여 도쿄대학 교수를 사직하였으나, 전후에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도쿄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중앙공론(中央公論)사가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근대 일본의 대지식인 10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이동화(李東華, 일본식 이름: 李家實리노이에 사토루, 1893년 ~ ?)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활동했던…이동화(李東華, 일본식 이름: 李家實리노이에 사토루, 1893년 ~ ?)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활동했던 사회기관단체인이다. 강원도 통천군 출신이며, 다른 이름으로 이경규(李慶圭)가 있다.
도이 다쓰오(일본어: 土井辰雄, どい たつお), 1892년 12월 22일 ~ 1970년 2월 21일)은 일본의 가톨릭…도이 다쓰오(일본어: 土井辰雄, どい たつお), 1892년 12월 22일 ~ 1970년 2월 21일)은 일본의 가톨릭 성직자이다.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960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미야기현 센다이 출신이며, 1902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신학교를 마친 후 사제 서품을 받았고, 로마에 유학했다. 그 후 일본의 교황 대사 비서를 지냈다.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도쿄 대교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계속 대주교로 재직했으며, 일본 가톨릭 발전을 위한 기대 속에 교황 요한 23세 시대인 1960년, 일본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필린핀 포로학대죄로 유일하게 중장으로서 교수형 판결을 받았으며,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노동총연맹의 후보로 출마했으며 3위로 낙선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같은 선거구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전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 1978년 6월 12일)는…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 1978년 6월 12일)는 중국의 신문학 활동가, 극작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공작자이다. 본명은 카이전(開貞), 호는 딩탕(鼎堂)이며, 모뤄(沫若)는 자이다. 하카계 출신이며, 쓰촨성 쟈딩 푸(嘉定府)의 중류 정도의 지주의 셋째 아들로서 출생하였다. 쓰촨성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1914년 일본 제국의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근대적 연구 방법을 익혔다. 이 사이에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혁명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하였으며 중국에서 반봉건 혁명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초기 활동가 중 하나였다. 그는 그러다 일본 제국의 여자와 결혼하고 극작가로서 여성 해방을 혁명 테마로 한 <3인의 반역적 여성>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중국 공산당의 신문학 운동 시기의 본격적 사극의 하나로 말해지기도 한다. 중국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고조된 후 1926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자 리다자오 등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영에서 거기에 참가하여 우한·상하이 등지에서 여러 직책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난창 봉기에 가담한 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피해서 일본 제국에 망명하였고, 이 기간에 유물사관을 가지고 중국 고대 사회를 연구하는 혁명 작업을 하였으며, 그것은 중국 고대 사회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각을 가져다 연구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때 충칭으로 귀국해서 중국 공산당 측의 문학 평론 공작의 책임을 맡고 공산당 혁명의 항일 전선에 참가하여 선전 활동에 종사하는 중에 극작(劇作)이나 평론 등도 많이 발표하였다. 그때 발표된 희곡 <굴원(屈原)>(1942)의 내용은 굴원을 항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중국 고대 애국 시인의 말을 따서 국민당의 부패 양상을 들춰내기도 하였다. 1949년, 1950년 파리와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 마오쩌둥 측의 문인 대표로 참가하였고, 중국 공산당 정권 성립 이후로 정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장,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과기대 학장, 중국 공산당 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 중국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등을 맡았으며, 마오둔, 저우양, 천보다 등과 함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정권에서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노선의 조타수가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크게 권력을 행사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 사상 방면의 공작자 중의 하나이었다. 문혁 초기에는 사인방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 마오쩌둥은 그의 보호를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에게 요구하였다. 문혁이 끝난 뒤는 화궈펑에 의해서 당내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였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화궈펑 정권에서 마오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마쓰다 마사유키(松田正之)는 일본의 체신·척무관료, 정치인이다. 남양청장관, 귀족원 남작 의원. 이전의 이름은 사다노스케(定之助)이다. 도쿄부 출신으로 백작 아리마 요리쓰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정치인 마쓰다 마사히사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마사히사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마사유키는 후작 하치스카 마사하키(후작 하치스카 모치아키의 장남)의 사위이며 외교관 가야 하루노리(가야 쓰네노리의 차남)의 장인이다.
야마구치 다몬(일본어: 山口 多聞, 1892년 8월 17일 ~ 1942년 6월 6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야마구치 다몬(일본어: 山口 多聞, 1892년 8월 17일 ~ 1942년 6월 6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으로,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시이 시로(일본어: 石井 四郎,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는 일본의 군인 및 정수기 개발자로…이시이 시로(일본어: 石井 四郎, 1892년 6월 25일 ~ 1959년 10월 9일)는 일본의 군인 및 정수기 개발자로, 731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일전쟁 중 일본 제국 군대의 생물학전을 담당했다.
나루세 세이이치(成瀬正一, 1892년 4월 26일 ~ 1936년 4월 13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프랑스 낭만주의 연구자이다.…나루세 세이이치(成瀬正一, 1892년 4월 26일 ~ 1936년 4월 13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프랑스 낭만주의 연구자이다. 규슈 대학의 프랑스 문학 교수이기도 한 그는 로맹 롤랑과 교류한 첫 일본인으로, 고지로 마쓰카타와 협업하여 회화와 조각상을 수집한 도쿄 우에노 국립서양미술관의 마쓰카타 컬렉션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시노 나오키(일본어: 星野 直樹, ほしの なおき, 1892년 4월 10일~1978년 1월 26일)는 일본의 관료이자…호시노 나오키(일본어: 星野 直樹, ほしの なおき, 1892년 4월 10일~1978년 1월 26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가로, 만주국의 총무 장관이었다. 호시노 나오키는 1892년 4월 10일, 일본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 고등 문관 시험에 급제한 뒤, 191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건설할 당시에 관동군으로부터 대장성에서 인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만주에 건너간 이후에는 만주국 재정부 이사관, 재정부 총무사장, 재정부 차장, 국무원 총무청장을 거쳤고, 1937년에는 국무원 총무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선 일본인이 맡는 국무원 총무 장관이 실질적으로 총리 역할을 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며, 호시노 나오키는 재임 기간 중 만주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2키 3스케 중 한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A급 전범이 된 호시노 나오키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1958년에 석방돼 후에는 도쿄 힐튼 호텔 부사장, 도쿄 급행 전철 이사, 아사히 해운 사장, 다이아몬드 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1892년 4월 9일 ~ 1964년 5월 6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일본의 다이쇼 시대와…사토 하루오(佐藤春夫, 1892년 4월 9일 ~ 1964년 5월 6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일본의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우울감을 탐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미우리상 4등을 수상했다.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1892-03-04) ~ 1950년 10월 25일(1950-10-25))는 일제강점기…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1892-03-04) ~ 1950년 10월 25일(1950-10-25))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공로가 있으나, 최남선 등과 함께 변절한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차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 필명은 춘원생·경서학인(京西學人)·노아자닷뫼당백·Y생·장백·장백산인 등.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아울러 순한글체 소설을 쓰며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망명, 1919년 도쿄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 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된 이후 친일(대일협력) 성향으로 기울어 친일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전선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힘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혔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을 집필하고 연설을 한 것이 눈에 띄며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징병제도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 제하에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 한국인 유학생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일본어: 芥川 龍之介 (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년 3월 1일~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일본어: 芥川 龍之介 (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년 3월 1일~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당주인(澄江堂主人)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我鬼)이다.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우지슈이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고전들에서 제재를 취해 「참마죽」, 「덤불 속」, 「지옥변」 등과 같은 단편 소설들을 주로 저술했고 「거미줄(원제: 蜘蛛の糸)」, 「두자춘(杜子春)」 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들,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방황한다는 내용의 「방황하는 유대인」을 저술했다.
단 이노(團伊能, 1892년 2월 21일 ~ 1973년 2월 9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남작 단…단 이노(團伊能, 1892년 2월 21일 ~ 1973년 2월 9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작위는 남작이다. 남작 단 다쿠마의 장남으로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후 남작위를 습작하였다.
히라사와 사다미치(일본어: 平沢 貞通, ひらさわ さだみち, 1892년 2월 18일 ~ 1987년 5월 10일)는 일본의…히라사와 사다미치(일본어: 平沢 貞通, ひらさわ さだみち, 1892년 2월 18일 ~ 1987년 5월 10일)는 일본의 템페라 화가이다. 도쿄도에서 태어났으며 홋카이도에서 자랐다. 호(號)는 대장 (일본어: 大暲 다이쇼[*])이다.
다카기 다케오(일본어: 高木武雄, 1892년 1월 25일 ~ 1944년 7월 1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후쿠이현…다카기 다케오(일본어: 高木武雄, 1892년 1월 25일 ~ 1944년 7월 1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후쿠이현 출신이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다카기는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해 최연소로 소위에 임관되었고,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는 제5전대 사령관으로 산호해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 후에는 사이판에 갇힌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중장에게 대본영의 철수 명령을 알리려 가다 미군에 의해 사이판에서 전사했다. 사후에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 大學, 1892년 1월 8일 ~ 1981년 3월 15일)는 일본의 시인, 가인, 번역가이다.…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 大學, 1892년 1월 8일 ~ 1981년 3월 15일)는 일본의 시인, 가인, 번역가이다. 초현실주의 등 프랑스의 시문학을 번역하여 번역시선집 《월하의 일군》(月下の一群, 1925) 등으로 일본에 소개하였으며 《달빛과 피에로》(月光とピエロ, 1919), 《모래베개》(砂の枕, 1926), 《저녁의 무지개》(夕の虹, 1957) 등의 시집을 냈다. 일본 예술원 회원으로 1970년 11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1979년 11월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오다치 시게오(일본어: 大達 茂雄 오오다치 시게오[*], 1892년 1월 5일 ~ 1955년 9월 25일)는 일본의…오다치 시게오(일본어: 大達 茂雄 오오다치 시게오[*], 1892년 1월 5일 ~ 1955년 9월 25일)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전 내무대신·문부대신이다. 오다치는 1892년, 시마네현에서 주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에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지방국 재무 국장을 거쳐 1932년 후쿠이현 지사가 되었으며, 만주국 법제국장,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장 등을 지냈으나, 관동군과의 대립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베 내각, 요나이 내각의 내무차관을 맡은 후, 1942년에 쇼난특별시 (昭南特別市, 지금의 싱가포르) 시장을 지냈다. 1943년 7월, 도쿄 시와 도쿄 부를 폐지하였으며, 도쿄도를 설치 (도쿄 도제, 東京都制) 하고, 초대 도쿄 도 장관 (東京都長官) 이 되었다. 1944년 7월, 고이소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고이소 내각의 각료였다는 이유로 1946년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1952년에 추방 해제되었다.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시마네 선거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1953년,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성립되면서, 내각 조성 참모 오가타 다케토라 (緒方竹虎)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문부대신이 되었으며,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일본교직원조합의 영향력을 억제시키고자 하였다. 1955년, 위암으로 6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宮崎 繁三郎, 1892년 1월 4일 ~ 1965년 8월 30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최종…미야자키 시게사부로(宮崎 繁三郎, 1892년 1월 4일 ~ 1965년 8월 30일)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지금의 기후현 기후시 출신으로, 기후중학(현 기후 현립고등학교)를 나와 육사 26기로 임관했다. 장남은 같은 육사 출신으로 메이지 대학 총장을 지낸 미야자키 시게키(宮崎繁樹)다. 장교에 임관한 뒤 육군대학에 들어가 참모 교육을 받았다. 참모본부, 정보기관에서 오래 근무하긴 했지만, 할힌골 전투, 임팔 작전 등 일본군이 열세에 몰려 있던 전투에서 항상 전공을 거둔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 일본 육군 굴지의 야전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다.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하에서 싸우는 일이 많았고, 눈부신 ‘승리’를 얻지도 못했지만, 부대를 끝까지 지켜내고 끈질기게 싸웠다. 하지만 언제나 한정적인 부대 내 지휘권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가시오 세이이치로(일본어: 柏尾 誠一郎, 1892년 1월 2일 ~ 1962년 9월 6일)는 일본의 남자 테니스 선수이며…가시오 세이이치로(일본어: 柏尾 誠一郎, 1892년 1월 2일 ~ 1962년 9월 6일)는 일본의 남자 테니스 선수이며, 구마가에 이치야와 함께 일본의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미국의 월터 웨스트브룩을 3-6, 6-3, 6-1, 11-9로 꺾으면서 캐나다 마스터스를 우승하였다.
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 해방을 위한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며, 「수평사」(水平社), 「규탄」(糺弾) 등의 명칭을 고안한 사람이다.
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 농림대신, 척무대신(拓務大臣), 법무대신, 재판관탄핵재판소장, 중의원 의원, 참의원 등을 지냈다. 도쿄부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区)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농상무성 관료가 되었다. 농림성 잠사국장(蚕糸局長) 을 거쳐, 1937년 기획청(企画庁) 설립에 수반해 기획청 초대 차장이 되었다. 그 후 농업 용수차관이 되었으며, 1941년 고노에 내각에 농림수산대신으로 첫 입각하였다. 도조 내각에서도 계속해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으며, 도조 내각에서는 척무대신도 겸임하였다. 194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45년 호국동지회(護国同志会) 결성에 참여하였다. 전 후, 1945년 9월 11일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요코하마의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공직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참의원 의원 선거(미에현 선거구) 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첫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파벌의 일원으로서 정계에 복귀했으며, 1959년 제2차 기시 내각 개조내각에서 법무대신이 되었다. 1965년 훈일등서보장(勲一等瑞宝章) 을 받았으며, 1967년 재판관탄핵재판소장이 되었다. 1972년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 을 받았으며, 1980년 사망하였다.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기무라 마사토미(일본어: 木村 昌福, 1891년 12월 6일 ~ 1960년 2월 14일) 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제국…기무라 마사토미(일본어: 木村 昌福, 1891년 12월 6일 ~ 1960년 2월 14일) 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키스카섬 철수작전을 성공시켜 유명해졌다. 시즈오카현 태생으로, 변호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토(近藤)씨였으나, 어머니쪽의 기무라씨를 성으로 삼았다. 해군병학교 41기로 입학해서 졸업성적은 최하위권이었고, 동기생으로는 구사카 류노스케가 있다. 병학교의 졸업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장교로서 출세코스인 해군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눈에 띠지 않는 해상 근무를 전전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뛰어난 실전능력으로 여러 작전을 성공시켜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특히 1943년 7월, 알류샨 열도상의 키스카섬에 고립된 병력을 미군 함대의 포위를 뚫고 구출하여 유명해졌다. 1944년 레이테 해전에서도 참가하여 일본의 참패해도 불구하고 홀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이후 당시 불가능하다고 여기었던 키스카섬 철수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해군통신학교 교장으로서 종전을 맞았다. 염전 사업을 하다 암으로 사망하였다.
다이고 다다시게(일본어: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해군…다이고 다다시게(일본어: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해군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해군 중장. 귀족원 의원. 작위는 후작. 옛 공가 출신 다이고 가(醍醐家) 제14대 당주. 아버지는 다이고 다다유키이며 보신 전쟁에서 공을 세워 종3위에 서임되었다. 하지만 가문상속분쟁으로 인해 1899년 5월 23일 도쿄부 고지마치에서 사촌 다이고 가쿠타로에게 총살당하고 이듬해 7월 4일에는 조부 다이고 다다오사마서 세상을 뜨고나니 다이고 종가의 가세는 기울게 되었고 다다시게는 다이고 가의 본가인 이치조 가에 의탁하게 된다. 후에 해군병학교를 성적으로 졸업한 후 승진하여 말년에는 해군 중장까지 오르게 된다. 2차 대전이 종전된 후 폰티아낙 현지 주민이 학살당하여 2만여명이 희생된 폰티아낙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네덜란드군에 의해 전범 혐의로 체포된 다다시게는 사형 판결을 받자마자 공개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