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錢鎭漢, 1901년 11월 5일 ~ 1972년 4월 20일, 경북 상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전진한(錢鎭漢, 1901년 11월 5일 ~ 1972년 4월 20일, 경북 상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사회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노총위원장, 제헌국회 및 2대, 3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제헌국회에서 이익균점권을 근간으로 하는 노동법 제정을 주도하였다. 본관은 문경(聞慶)이며 호는 우촌(牛村)이다. 전진한의 저술을 모은 자료집으로 장남 동국대 명예교수 전창원이 출간한 <이렇게 싸웠다>(무역연구원, 1996), 서울대노동법연구회가 주관하고 손자 전동건 MBC기자, 손녀 전동현 박사가 참여한 <우촌 전진한자료집>(현암사, 2023)이 있다.
정도영(鄭島榮, 1901년 9월 16일 ~ 1979년 8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영일. 초명(初名)은…정도영(鄭島榮, 1901년 9월 16일 ~ 1979년 8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영일. 초명(初名)은 수용(壽容)이고, 자는 화일(華一), 호는 백파(白坡)이다.
김철주(金哲柱, 1901년 1월 25일 ~ 1962년 2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19년 3월 숭일학교 재학…김철주(金哲柱, 1901년 1월 25일 ~ 1962년 2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19년 3월 숭일학교 재학 중에 광주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교사로 일하다가 1937년부터 주형옥(朱亨玉)과 함께 광주YMCA를 이끌었다. 광복 이후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여천군에서 병원을 운영하다가 기독교계인 이남규 전남지사에 의해 여천군수로 발령받았다. 제1, 2대 총선에 낙선하였다가 1954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호남신문 사장을 역임하다가 의료계에 종사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시가 요시오(일본어: 志賀 義雄, しが よしお, 1901년 1월 12일 ~ 1989년 3월 6일)는 일본의 정치가, 공산주의…시가 요시오(일본어: 志賀 義雄, しが よしお, 1901년 1월 12일 ~ 1989년 3월 6일)는 일본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중의원 의원, 일본공산당 중앙의원 등을 지냈다.
이여성(李如星, 1901년 ~ ?)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화가, 정치가, 언론인이다. 사회주의 계열…이여성(李如星, 1901년 ~ ?)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화가, 정치가, 언론인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명건(李明建)이다. 호는 사천선(沙泉先), 청정(靑汀)이다.
이보시 호쿠토 일본어: 違星北斗, いぼし ほくと, 1901년 ~ 1929년 1월 26일)는 아이누 출신의 와카…이보시 호쿠토 일본어: 違星北斗, いぼし ほくと, 1901년 ~ 1929년 1월 26일)는 아이누 출신의 와카 작가·사회운동가이다. 아이누의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으로 일생을 바치며 그 사상을 신문이나 잡지에 단가(短歌)형태로 발표하고, 같은 시대의 아이누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홋카이도 내 아이누 코탄(Айнукотан)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누족이 깨어있고 단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일본식 이름: 德光允도쿠미쓰 마사시, 德光翼도쿠미쓰 다스쿠, 1900년 12월…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일본식 이름: 德光允도쿠미쓰 마사시, 德光翼도쿠미쓰 다스쿠, 1900년 12월 21일~1952년 1월 30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정치인이다. 다른 이름으로 허윤(許允)이 있으며 법명은 경호(鏡湖), 호는 현주(玄州)이다. 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문시환의 뒤를 이어 제헌 국회 국회의원(부산부 갑)을 지냈다. 대한제국 경상남도 부산 출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피랍지에서 숨졌다.
나카이 마사카즈(일본어: 中井正一, 1900년 2월 14일 ~ 1952년 5월 18일)는 일본의 미학가, 평론가…나카이 마사카즈(일본어: 中井正一, 1900년 2월 14일 ~ 1952년 5월 18일)는 일본의 미학가, 평론가, 사회운동가이다.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출신으로, 오노미치시에서 성장하였다. 1933년에는 다키가와 사건과 관여되어 있어 주요 목적으로는 처분을 반대하게 되는 그룹 멤버의 일원으로 참여시킨 바 있다. 또한 1952년에는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주요한 연구 분야는 미학이다.
정재완(鄭在浣, 1900년 1월 2일 ~ 1967년 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정재완(鄭在浣, 1900년 1월 2일 ~ 1967년 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요 대학 독철학과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여수군수 및 여수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도덕재무장세계대회한국대표, 제2대 ~ 제5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4선 의원)
조헌영(趙憲泳, 1901년 1월 8일 ~ 1988년 5월 2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수이다. 대한제국 경상북도…조헌영(趙憲泳, 1901년 1월 8일 ~ 1988년 5월 2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수이다.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字)는 응문(應文)이며 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하였으며, 귀국 이후에는 신간회 및 한의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서 경북 영양군 선거구에서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을 당했다. 납북 이후에는 평양의대 및 김일성대에서 의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자식들을 일찍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1937년 사망한 시인 조동진이 조헌영의 장남이고, 1968년 사망한 시인 조지훈이 조헌영의 차남이다.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온건주의로 사상전향하였다.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로 절반만 성사시키고 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시도는 결국 이승만 정권 말 사법 살인 희생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날조된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김천해(金天海, 1898년 5월 10일 ~ ?)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김천해(金天海, 1898년 5월 10일 ~ ?)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본명은 김학의(金鶴儀)이다.
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아카오 빈(赤尾 敏, あかお びん, 1899년 1월 15일 - 1990년 2월 6일)은 일본의 정치인, 우익 운동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공동농장의 운영을 맡고 좌익 농민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 우익으로 전향하고 1926년 메이데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국제"(建国祭)를 기획하며 이름을 알렸다. 1942년 익찬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패전 이후 GHQ에 의해 공직추방당했다. 조치가 해제된 뒤 1951년 우익 정당인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国党)을 조직하여 매번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에 성공한 적은 없다. 1960년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한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과 고모리 가즈타카의 시마나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재판을 받기도 했다. 선거운동 중에는 차에 깃발을 내걸고 길거리 연설을 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군소 우익단체들 특유의 "가선차"(街宣車) 문화의 시초라고 여겨진다. 1990년 91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고레카와 긴조(일본어: 是川 銀蔵, 1897년 7월 28일 ~ 1992년 9월 12일)는 일본의 투자가이다. 부동산 투자도…고레카와 긴조(일본어: 是川 銀蔵, 1897년 7월 28일 ~ 1992년 9월 12일)는 일본의 투자가이다. 부동산 투자도 했으나 대중에게는 주식 투자자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지막 상장사'(最後の相場師)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상장사(相場師)는 일본어로 투기꾼이라는 의미이다. 시장이 있는 이상 투기라는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마지막'이라는 형용은 적절하지 않으나, 어찌되었건 이 별칭이 널리 알려져 있다.
김칠성(金七星, 1897년 6월 24일 ~ 1984년 5월 21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김칠성(金七星, 1897년 6월 24일 ~ 1984년 5월 21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산 출생으로 니혼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제연구소장,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주기용(朱基瑢, 1897년 3월 12일 창원 ~ 1966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호는 동광(東光)이다.…주기용(朱基瑢, 1897년 3월 12일 창원 ~ 1966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호는 동광(東光)이다. 1934년에 오산학교 제15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42년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하였는데 광복 후 1945년에 다시 제17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전쟁 후 서울로 옮겨 재건된 오산학교에서 1953년에서 1961년까지 제18대 교장이었고, 1962년부터는 제6대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또한 정치인으로도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최창익(崔昌益, 1896년 2월 29일(1896-02-29) ~ 1957년 10월 6일(1957-10-06))은 일제강점기의…최창익(崔昌益, 1896년 2월 29일(1896-02-29) ~ 1957년 10월 6일(1957-10-06))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으며 공산주의자였다. 변호사 허헌의 사위인 그의 이명은 최창석(崔昌錫)·최창순(崔昌淳)·최동우(崔東宇)·이건우(李健宇)이다.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1925년 이후 공산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 검거를 견디지 못하고 1934년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퇴, 1936년 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뒤 김원봉 일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 화북으로 건너가 무정(武亭), 김두봉 등과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다. 8·15 해방 이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는 등 연안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재정상, 부수상 겸 재정상, 1955년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했다. 김두봉 시대 인민 정권이자 북한 인민 정부 시대의 제3대 재정상 시절이던 1954년 8월 3일, 김일성 총리의 독재화를 비판하다가 징처되어 같은 해 11월 22일, 북한 재정상 직에서 파면되었고 1년 후 1955년 8월 11일,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과 박헌영의 공격에 동참했지만 1956년 9월 23일,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중공의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그를 변호하여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그해 10월 재투옥 후 이듬해 옥사한다. 독립운동 시 가명은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등을 사용하였다.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의 남편이다. 함경북도 출신.
송계백(宋繼白, 1896년 ~ 1922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여산(驪山)이며, 호(號)는…송계백(宋繼白, 1896년 ~ 1922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여산(驪山)이며, 호(號)는 평원(平原)이다.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 송호림 장군의 백부(큰아버지)이다.
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 1895년 4월 17일~1970년 3월 20일)는 전전(戦前) 일본의 부라쿠 해방(部落解放)을 위한…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 1895년 4월 17일~1970년 3월 20일)는 전전(戦前) 일본의 부라쿠 해방(部落解放)을 위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운동가이다. 본명은 기요하라 가즈타카(清原 一隆)로 사이코 만키치는 화가로 활동하던 당시의 필명이다. 전국 시대 이래 일본 국내에서 피차별 대상이었던 부라쿠민 출신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처우 개선을 위해 조직한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 설립의 중심인물로써 수평사의 상징 깃발인 가시관기의 의장을 고안하고 수평사선언(水平社宣言)을 기초한 인물이다. 사촌 동생이었던 가메모토 겐주로(亀本源十郎)도 수평사에서 활동하였다.
김준연(金俊淵, 1895년 3월 14일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김준연(金俊淵, 1895년 3월 14일 ∼ 1971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또한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엠엘파(ML)의 중요 인사였다. 독일 베를린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2년간 기자와 주러시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다 1928년 동아일보로 옮겼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본래 공산주의 운동가였으나 우익으로 전향하여 해방 이후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48년의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에 지지를 보냈다. 민주국민당과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친여 인물로 분류되어 비판을 받던 중 탈당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 조직하기도 했다. 1961년 5월과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경력에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용균(羅容均, 1896년 2월 25일~1984년 7월 6일)이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5·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나용균(羅容均, 1896년 2월 25일~1984년 7월 6일)이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5·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6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이토 노에(일본어: 伊藤 野枝 (いとう のえ): 1895년 1월 21일 ~ 1923년 [[9월 16일)는 일본의…이토 노에(일본어: 伊藤 野枝 (いとう のえ): 1895년 1월 21일 ~ 1923년 [[9월 16일)는 일본의 여성해방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번역자, 편집자다. 오스기 사카에의 아내였으며, 아마카스 사건 때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했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이들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거나,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참여했다. 사후, 여러 사회단체에서 정리한 주요 친일파 목록에 등재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배희범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평양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구택대학 전문부 정치과를 수료하였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경력도 있으며 의성단 부단장을 역임하였다. 연안면장과 연백군수, 연백수리조합장을 역임하였다.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이었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 독립선언 당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유학 후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하였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이후 제헌(서대문, 한국민주당), 제3대(서대문갑, 민주국민당), 제4대(서대문갑, 민주당), 제5대(서대문갑, 민주당), 제6대(전국, 자유민주당), 제7대(전국, 신민당)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민주당 창설에 참여하여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 국무총리에 두 번 지명되었으나 인준부결되었고, 군사 정권에서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 한민당 출신 유일한 초대 내각 입각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호는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이다. 호(號)는 창랑(滄浪), 자(字)는 치우(致雨, 아명(兒名)은 장삼욱(張三旭). 영문 이니셜은 TS.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했고, 정부 수립 이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부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 좌익 정당과 좌익 정치운동을 단속하였으나,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학자 여현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과 정부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리 출신이다.
이치카와 후사에(일본어: 市川房枝, 1893년 5월 15일 ~ 1981년 2월 11일)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정치인, 여성…이치카와 후사에(일본어: 市川房枝, 1893년 5월 15일 ~ 1981년 2월 11일)는 일본의 페미니스트, 정치인,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였다. 이치카와는 일본의 여성 참정권 운동의 핵심 인물로, 1945년 여성으로 선거권이 확대되는 데 기여하였다.
다치바나 고자부로(일본어: 橘孝三郎, 1893년 3월 18일 ~ 1974년 3월 30일)는 일본의 정치 운동가…다치바나 고자부로(일본어: 橘孝三郎, 1893년 3월 18일 ~ 1974년 3월 30일)는 일본의 정치 운동가, 농본주의(農本主義) 사상가로, 파시스트이자 초국가주의자였다. 이바라키현 히가시이바라키군 출신으로, 고등학교 중퇴 후, 오스기 사카에와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의 책을 통해 영국의 시인·사회주의 사상가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와 표트르 크로폿킨 등의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외에 레프 톨스토이, 시라카바파(白樺派), 캉유웨이 등의 영향도 받았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강연 활동을 하여, 1929년 애향회(愛郷会)를 결성하였다. 이바라키현의 각 군에 지부가 형성되었으며, 농본주의에 의거하는 청소년 교육을 목표로 하여, 1931년 근로 학교 애향숙(愛郷塾) 을 설립하였다. 가자미 아키라에게 자금 원조를 받았으며,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를 알게 되어, 5·15 사건이 일어날 무렵 학원생 7명을 인솔해 도쿄의 변전소를 습격하였다.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과 살인·살인 미수 혐의를 받아 무기 징역 판결을 받았지만, 1940년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왔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고향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였고, 1959년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全日本愛国者団体会議)의 고문이 되었다.
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노동총연맹의 후보로 출마했으며 3위로 낙선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같은 선거구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전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사카모토 세이이치로(阪本清一郎, 1892년 1월 1일-1987년 2월 19일)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피차별부락 해방을 위한 전국수평사(全国水平社)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며, 「수평사」(水平社), 「규탄」(糺弾) 등의 명칭을 고안한 사람이다.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족고대(民族高大)를 구상한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자로 저명하다.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야마카와 기쿠에(일본어: 山 (やま)川 (かわ) 菊 (きく)栄 (え), 1890년 11월 3일 ~ 1980년 11월 2일)는…야마카와 기쿠에(일본어: 山 (やま)川 (かわ) 菊 (きく)栄 (え), 1890년 11월 3일 ~ 1980년 11월 2일)는 일본의 수필가, 사회주의 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다. 도쿄에서 개명된 무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1912년 여성영학숙(츠다주쿠대학의 전신)을 졸업했다. 1916년 야마카와 히토시와 결혼했다. 전전시대에 키쿠에는 적란회를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단체의 설립회원으로서 일본 여성주의의 전개에 지대하게 기여했다. 그녀는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진영을 “부르주아 부인들의 자선도락”이라고 맹공하는 한편, 사회주의 조직의 남성중심성 역시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7년 노동성 초대 부인소년국장으로 취임하여 1951년까지 재직했다.
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1964년 1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며…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1964년 1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단체조직과 항일활동을 하다가 8.15 광복 뒤에는 한민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한민당 정치노선에 싫증을 느껴 1946년 10월 탈당. 김규식계열 정치노선에 활동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나 뒤에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월북하였다. 경상도 기장군 출신이며, 본명은 김두전(金枓全)이다.
나경석(羅景錫, 1890년 9월 27일(음력 8월 14일) ∼ 1959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나경석(羅景錫, 1890년 9월 27일(음력 8월 14일) ∼ 1959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사회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 겸 화가, 작가, 시인인 나혜석의 오빠이다.
송진우(宋鎭禹, 1890년 6월 11일~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송진우(宋鎭禹, 1890년 6월 11일~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 사상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평이며, 전라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출신이다. 아호는 고하(古下)이고, 그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초대 당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1951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1951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 시대의 정치인이다. 호는 근촌(芹村)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생이며 미군정청 비상국민회의 예하 교통위원장·초대 대한민국 초선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일본 유학 중 1919년 신익희 등과 함께 일본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잠시 교육 활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 투신,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헌법기초를 담당하였다.
윤병호(1889년 8월 5일~1974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윤병호(1889년 8월 5일~1974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해방…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독립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