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사 마코토(湯浅誠, 1969년 ~ )는 일본의 반 빈곤 운동가이자. 자립 생활 지원센터 모야이의 사무총장이며 반빈곤…유아사 마코토(湯浅誠, 1969년 ~ )는 일본의 반 빈곤 운동가이자. 자립 생활 지원센터 모야이의 사무총장이며 반빈곤 네트워크 사무국장, 내각부참여(조언자)이다. 2008년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파견촌의 촌장을 맡아 유명해졌다. 1989년 도쿄 대학 교양학부문과류에 입학하여 1995년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6년 도쿄 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에 입학하여 2003년 자퇴한 후 반빈곤 운동에 투신한다. 민주당이 집권한 후 간 나오토 수상 내각에 들어갔으나 100여일 만에 사임했다. 2010년 5월 동일 직책으로 재임명되었다. 2011년 일본 동북부 대지진이 발생한 후 내각 관방 지진 자원봉사 협력실장에 취임했다. 일본의 반빈곤 활동가로 유명한 마쓰모토 하지메나 아마미야 카린과 달리 시민 운동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직접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유아사 마코토는 정부에 참여한 후로 관료들의 저항에 직면했으나 일본 국내의 빈곤률과 포착률을 발표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한다. 2014년부터 호세이 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아베 아키에(일본어: 安倍 昭恵, 1962년 6월 10일 ~ )는 일본의 제90·96·97·98대 총리인 아베 신조의…아베 아키에(일본어: 安倍 昭恵, 1962년 6월 10일 ~ )는 일본의 제90·96·97·98대 총리인 아베 신조의 배우자였다. 결혼 전 성씨는 마쓰자키(松崎 (まつざき))이다.
아라키 가즈히로(일본어: 荒木 和博 (あらき かずひろ), 1956년 8월 8일~)는 일본의 군사·정치학자, 교수이자 정치…아라키 가즈히로(일본어: 荒木 和博 (あらき かずひろ), 1956년 8월 8일~)는 일본의 군사·정치학자, 교수이자 정치 평론가이다. 주로 남북한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우가진 히사이치(일본어: 宇賀神 寿一 (うがじん ひさいち): 1952년 12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우가진 히사이치(일본어: 宇賀神 寿一 (うがじん ひさいち): 1952년 12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 학생운동가, 빈민운동가다. 메이지가쿠인고등학교 시절 베트남 반전운동을 통해 정치활동에 눈을 떴다. 이후 부락해방운동・재일조선인 운동에 관여했고, 산리즈카 투쟁 등에도 참여했다. 1971년 4월, 메이지가쿠인대학 사회학부에 진학. 대학 재학 중에는 학비인상 반대투쟁, 워킹푸어 구제투쟁 등에 참가했다. 이후 체포된 메이지가쿠인대생 학생운동가들의 옥중투쟁 지원이나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반체제, 반일사상을 양성시켜갔다. 1972년 10월경, 다른 대학의 학생운동가를 통해 산야의 빈민운동 조직인 저변위원회에 참여했고, 거기서 쿠로카와 요시마사를 알게 되었다. 대학을 계속 다니면서 그해 겨울 산야 월동투쟁에 처음 참가해 하층노동자들의 현실을 현장에서 알게 되었고,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는 경찰권력과 야쿠자들과의 첨예한 긴장관계 속에서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73년 여름, 단신으로 오사카 카마가사키로 내려가 요세바에 투숙하며 몸소 일용직 육체노동을 경험했다. 어느 날, 노동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사람이 다쳤는데, 구급차 도착이 늦어지는 사이 주변에 모여든 것을 계기로 노동자들이 그동안 일상적으로 느껴왔던 분노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해 폭동으로 번질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자 노동자들 사이에 숨어 있던 사복경찰들이 숨겨둔 삼단봉을 꺼내 휘두르며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마구 때려눕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우가진은 “비상한 분노를 느꼈고, 압도적인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그것을 어떻게든 무찌르는 투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하층 노동자의 투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973년 가을, 우가진은 쿠로카와의 타진을 받아 타카다노바바나 카와사키 등지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요세바의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노동조건의 개선이나 악덕업자의 추궁 등을 은연히 후방에서 지원했다. 동년 말엽부터 이듬해 74년까지 진행된 산야 월동투쟁에서는 행정 측이 노동자들을 잡아넣는 일시수용시설의 실태조사에 종사했다. “하층노동자의 투쟁을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우가진은 1974년 6월, 쿠로카와와 대화를 나누던 중 무장투쟁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해 키리시마 사토시까지 더하여 셋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을 결성하고, 일련의 연속기업폭파사건에 관여했다. 1975년 5월 19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각 그룹의 멤버들이 일제검거 되었을 때 우가진과 키리시마는 아직 경찰에 존재가 포착되지 않아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쿠로카와가 소지하고 있던 두 사람의 집 열쇠가 경찰에 압색되면서 두 사람의 존재가 포착되어 수배되었다. 우가진은 수배를 계기로 지하잠행생활에 들어갔고, 대학에서는 제적당했다. 지명수배 7년차인 1982년 7월 13일, 이타바시구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3월까지 가명으로 신문판매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1990년 2월 최고재판소에서 징역 18년형이 확정되었다. 기후형무소에서 13년간 복역함으로써 미결 구금기간을 포함해서 총 21년간 옥살이를 하고 2003년 6월 11일 만기출소했다. 출소 이후에는 신좌파 체포자들의 인권단체인 구원연락센터의 사무국원으로 취직했다. 사무국원으로서 운영을 담당하여 “누명 없는 사회”를 목표로 활동을 추진하며 반권력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산리즈카 투쟁 관계자들의 일반사단법인 스즈가모(スズガモ)에서 병수발에 종사하고 있다.
시게노부 후사코(일본어: 重 (しげ)信 (のぶ) 房 (ふさ)子 (こ): 1945년 9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시게노부 후사코(일본어: 重 (しげ)信 (のぶ) 房 (ふさ)子 (こ): 1945년 9월 28일 - )는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다.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중앙위원, 일본적군 최고간부를 역임했다. 헤이그 사건의 공모공동정범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징역 20년 판결을 받았다. 동일본 성인교정의료센터에서 복역 중이었다.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 시게노부 스에오는 혈맹단 단원 요츠모토 요시타카와 동향인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우익단체 금계학원 문하생이었다. 후사코는 이 부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소녀 시절에는 작은친절운동에 열심히 임해 표창을 받은 문학소녀였다. 도쿄도립 제1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키코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초등학교 교사를 목표로 삼아 메이지대학 문학부 사학지리학과 야학에 다녔다. 대학에서 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일규』(一揆)라는 동인지를 냈다. 야학 2학년차에 문학연구회가 속한 동아리연합회 사무장을 맡고 있던 시게노부는 학비인상에 반대하는 메이지대 투쟁에 참여했다. 이 때 나중에 연합적군 산악베이스 사건의 희생자인 토야마 미에코(당시 2부법학부 재학, 기린맥주 근무)와 알게 된다. 메이지대 투쟁에서 본부와 타협해 투쟁을 말아먹은 제2차 분트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재건에 협력해달라고 조직화되어 분트에 가입했다. 이후 분트 계열의 명대현대사상연구회, 2부의 사회주의학생동맹 책임자로 활동, 칸다 카르티에 라탱 투쟁에 참여했다. 이후 분트가 분열되었을 때 적군파에 창립 멤버로 참가. 시오미 타카야 등 간부들이 체포된 뒤 조직 주도권을 잡은 모리 츠네오와 대립했다. 시게노부는 1971년 국제근거지론에 근거하여 팔레스타인에 적군파의 해외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시게노부는 오쿠다이라 츠요시와 위장결혼하여 "오쿠다이라 후사코" 호적을 얻어 2월 28일 출국했다. 이후 오쿠다이라 등과 팔레스타인에서 일본적군을 결성, 창설 당시에는 "아랍적군", "적군파 아랍위원회", "혁명적군" 등을 칭하면서 그 이름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1974년 이후 "일본적군"을 정식 명칭으로 했다. 시게노부가 "최고지도자"가 된 일본적군은 레바논의 베카고원을 주요 근거지로 "혁명운동"을 자칭,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등 팔레스타인인 극좌무장단체와 연계하여 일련의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외국 공관의 정부요인이나 납치한 비행기 승객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받거나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민간인도 말려드는 테러를 반복해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시게노부는 헤이그 사건엑 관여하여 국제수배를 받고, 불법으로 입수한 위조여권을 사용해 일본에 불법입국한 후 잠시 오사카시 니시나리구의 아파트에 숨어 있었다. 2000년 일본적군 지원자들을 사찰하고 있던 오사카부경 경비부 공안 제3과에서 사찰 대상자가 시게노부를 닮은 여성과 접촉한 것을 확인, 수사를 시작했다. 시게노부는 사마귀가 특징으로 알려져 화장으로 사마귀를 숨기고 있었지만, 특유의 담배 피우는 방법과 커피잔에서 채취한 지문으로 신분이 특정되었다. 이로써 헤이그 사건 26년만인 2000년 11월 8일 오사카부 타카츠키시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오사카에서 경시청으로 이송되던 중에는 도카이도 신칸센을 사용했으며,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독방에 갇혀 이송되었다. 시게노부가 체포되었을 당시 압수된 자료에 따르면 시게노부는 1997년 12월부터 2000년 9월까지 신원을 사칭하여 일본 여권을 취득,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총 16회에 걸쳐 중공 등지에 출입국을 반복했다. 1991년부터는 일본에서의 무력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혁명당" 및 그 공연활동부문을 담당하는 위장조직 "희망의 21세기"를 설립, 그것을 발판으로 일본사회당과의 연계를 꾀하고 있었다. 희망의 21세기는 경시청과 오사카부경의 습격을 받았지만 일본적군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사회민주당 구의원의 자택 등도 동시 수색을 받았고 사회민주당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실관계는 조사할 것”이라고 했다. 시게노부와 함께 압수된 증거에 의해 지원조직의 전모가 밝혀져 각지의 회사 사장・교사・의사・병원 직원들이 시게노부를 은닉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2001년 옥중에서 사실상 붕괴한 일본적군의 해산을 발표했다.
칸바 미치코(일본어: 樺 (かんば) 美 (み)智 (ち)子 (こ), 1937년 11월 8일-1960년 6월 15일)는 일본의…칸바 미치코(일본어: 樺 (かんば) 美 (み)智 (ち)子 (こ), 1937년 11월 8일-1960년 6월 15일)는 일본의 운동권 학생이다. 도쿄대학 재학 중 안보투쟁 때 사망했다. 수학자 카바 세이토의 증손녀이며 사회학자 칸바 토시오의 딸이다. 도쿄도 키타타마군 무사시노정(현 무사시노시) 출생. 위로 오빠가 두 명 있었다. 중학교 때 부친이 고베대학에 부임하면서 효고현 아시야시로 이사했다. 아시야시 리츠야마테중학교, 효고현립 고베고등학교를 졸업 후 재수하여 도쿄의 연수학관에 다녔는데 수업에 만족하지 못해 6월 코로외국어예비교로 옮겼다가 2학기부터 슨다이예비학교로 옮겼다. 1957년 도쿄대학 문과2류(현 문과3류)에 입학, 역사학자 나가사키 노부코 등이 동기였다. 1957년 11월 생일 날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제1차 공산주의자동맹(제1차 분트) 서기국원으로서 60년 안보에 참여했다. 76명이 검거된 1960년 1월 26일 하네다공항 점거사건 때 도쿄대 문학부 자치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했다가 검거, 구치소에 들어갔지만 불기소 처분되었다. 동년 6월 15일 시위 때 주류파전학련이 중의원 남통용문을 통해 국회 돌입을 시도하여 경찰과 충돌했을 때 사망했다. 향년 22세. 사망 당일 크림색 가디건에 흰색 블라우스, 짙은 갈색 바지 차림이었다.
정경묵(鄭京黙, 일본어: 久保 覚 (くぼ さとる) 구보 사토루[*] 1937년 2월~1998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정경묵(鄭京黙, 일본어: 久保 覚 (くぼ さとる) 구보 사토루[*] 1937년 2월~1998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편집자이자, 문화 활동가, 한국 예능 문화사 연구가이다. 재일 한국인이며, 60년대부터 많은 작품들을 편집자로서 간행해, 「전집 현대문학의 발견」(학예서림)과 「하나다 세이키 전집」(고단샤)의 편찬에서도 참여했다.
혼다 노부요시(일본어: 本多 延嘉 (ほんだ のぶよし): 1934년 2월 6일 - 1975년 3월 14일 )는 일본의 신좌파…혼다 노부요시(일본어: 本多 延嘉 (ほんだ のぶよし): 1934년 2월 6일 - 1975년 3월 14일 )는 일본의 신좌파 활동가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의 최고지도자였다. 1934년 2월 5일 도쿄도 간다구 간다이즈미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체 노동자였고, 옛 아사쿠사구 토리고에에서 자랐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일가족이 사이타마현 키타아다치군 아다치정(지금의 시키시)로 피난했고, 노부요시는 피난지에서 무네오카소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4월, 구제 사이타마현립 카와고에중학교(지금의 사이타마현립 카와고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때 일본공산당의 청년조직 청년공산동맹(지금의 일본민주청년동맹)에 가맹했고, 카와고에고등학교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3년 4월, 와세다대학 제2법학부에 입학했고, 1954년 4월,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국사학과로 전입했다(1958년 중퇴). 이후 혼다는 『와세다대학신문』 편집장으로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공산당 와세다대 세포(당시 400여명)의 지도적 지위를 점한다. 1956년 “헝가리 동란”에 충격을 받아, 기성의 일본공산당 조직 및 이론을 “스탈린주의”라고 결별하고, 1957년 말 쿠로다 칸이치의 “변증법연구회”에 참가한다. 이어서 일본트로츠키스트연맹(트로련) 결성에 참여했다. 1958년 트로련이 발전적 해소해서 결성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공동) 내부에서 쿠로다 등과 함께 “혁명적마르크스주의그룹(RMG)”을 결성, “트로츠키주의마저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반스탈린주의파”로서, 제4인터내셔널 가입을 주장하는 니시 쿄지 등의 “트로츠키스트파”와 대립했다. 1959년, 쿠로다가 공산당의 정보를 경시청에 팔아넘기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각되었다(쿠로다-오오카와 스파이 문제). 혼다는 일관되게 쿠로다를 변호했고, 동년 8월 혁공동 제1회 대회에서 쿠로다가 제명되자 다른 RMG 멤버들을 이끌고 혁공동을 탈당했다. 8월 31일, RMG는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를 결성하고 쿠로다가 의장, 혼다가 서기장에 취임한다. 1962년의 혁공동 제3회 전국위원회 총회에서 혼다가 기초한 「당건설방침」 및 「노동운동방침」 의안을 둘러싸고 쿠로다와의 이론적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1963년 2월 쿠로다파가 조직에서 재탈당하여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를 결성한다. 이후 혁공동 전국위원회에 잔류한 혼다파는 “중핵파”라고 지칭되게 된다. 이는 혁공동의 학생조직인 마르크스주의학생동맹(마르학동)에서는 반대로 혼다파가 쫓겨나면서 “마르학동 중핵파”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1969년 4월 27일, 오키나와데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방법 개인적용(예비・음모 혐의)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1971년 3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1975년 3월 14일 새벽,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의 자택에서 취침 중에, 혁마르파의 참수작전 습격을 받아 암살당했다(중핵파 서기장 우치게바살인사건). 향년 41세.
오노 요코(일본어: 小野洋子, 영어: Yoko Ono, 1933년 2월 18일 ~ )는 미국에서 활동한 일본의 멀티미디어…오노 요코(일본어: 小野洋子, 영어: Yoko Ono, 1933년 2월 18일 ~ )는 미국에서 활동한 일본의 멀티미디어 예술가, 가수, 작곡가이자 평화운동가이다. 요코의 작품은 아방가르드 작품 활동을 벌이면서 영국과 일본에서 수행되던 행위예술도 포함한다. 존 레논의 배우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쓰루미 슌스케(일본어: 鶴見 俊輔, 1922년 6월 25일 ~ 2015년 7월 20일)는 일본의 철학자, 역사학자…쓰루미 슌스케(일본어: 鶴見 俊輔, 1922년 6월 25일 ~ 2015년 7월 20일)는 일본의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이다. 192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미국으로 넘어가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미들식스 스쿨(Middlesex School)에서 수학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42년 구금된 상태로 학위를 마쳤으며, 연락선으로 누나인 쓰루미 가즈코와 다케다 기요코, 마루야마 마사오 등과 함께 일본에 귀국했다. 1946년 사상의 과학 연구회를 결성하고 잡지 《사상의 과학》(思想の科学)을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았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교토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1954년부터 도쿄 공업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 5월 19일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의 미일안전보장조약 표결 강행에 반발하여 30일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1961년 도시샤 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70년 사직했다. 2015년 7월 20일 교토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저서로 《철학의 반성》(哲学の反省, 1946), 《프래그머티즘》(プラグマティズム, 1955), 《한계예술론》(限界芸術論, 1967) 등이 있다.
콘도 마가라(일본어: 近藤 真柄 (こんどう まがら): 1903년 1월 30일 - 1983년 3월 18일)는 일본의…콘도 마가라(일본어: 近藤 真柄 (こんどう まがら): 1903년 1월 30일 - 1983년 3월 18일)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여성운동가다. 사카이 토시히코의 딸. 18세 때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적란회 결성에 참가했고, 결성 직후 노동절 데모를 감행하여 회원 전원이 구속되었다. 이 때 최연소 데모 참가자이자 일본 최초의 여성 데모 참가자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적란회가 자연소멸하고 이듬해인 1922년 제1차 일본공산당에 입당, 오쿠 무메오 등과 함께 부인정치운동촉진회를 결성해 부인전선의 통일을 표방했다. 전후에는 일체의 정당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본부인유권자동맹 회장을 지냈으며, 코토쿠 대역사건의 진상규명 요구 운동을 운동을 했다. 타카세 키요시와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콘도 켄지와 재혼했다.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나 연구자 등이 면담을 딸 때나, 평생에 단 한 번도 옛 동지를 팔거나 폄하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온건주의로 사상전향하였다.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로 절반만 성사시키고 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시도는 결국 이승만 정권 말 사법 살인 희생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날조된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주기용(朱基瑢, 1897년 3월 12일 창원 ~ 1966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호는 동광(東光)이다.…주기용(朱基瑢, 1897년 3월 12일 창원 ~ 1966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호는 동광(東光)이다. 1934년에 오산학교 제15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42년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하였는데 광복 후 1945년에 다시 제17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전쟁 후 서울로 옮겨 재건된 오산학교에서 1953년에서 1961년까지 제18대 교장이었고, 1962년부터는 제6대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또한 정치인으로도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족고대(民族高大)를 구상한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자로 저명하다.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송진우(宋鎭禹, 1890년 6월 11일~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송진우(宋鎭禹, 1890년 6월 11일~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외교가, 사상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평이며, 전라도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출신이다. 아호는 고하(古下)이고, 그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초대 당수였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1951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1951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 시대의 정치인이다. 호는 근촌(芹村)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출생이며 미군정청 비상국민회의 예하 교통위원장·초대 대한민국 초선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일본 유학 중 1919년 신익희 등과 함께 일본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잠시 교육 활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 투신,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헌법기초를 담당하였다.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해방…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독립운동가 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독립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 신익희, 윤보선,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平塚 らいてう, 1886년 2월 10일 ~ 1971년 5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平塚 らいてう, 1886년 2월 10일 ~ 1971년 5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 작가, 여성주의자이며 쇼와 시대의 여성 운동 지도자이다. 본명은 히라쓰카 하루(平塚明).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 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출신.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출생으로,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일제 강점기에 민족 운동에 참여하여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 활동과 민족자본 운동을 벌이며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았고,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 남측의 여운형 등과 함께 북측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소련군정 당국과 대립하다가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0월에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윌리엄 메렐 보리스(영어: William Merrell Vories, 1880년 10월 28일 ~ 1964년 5월 7일)는…윌리엄 메렐 보리스(영어: William Merrell Vories, 1880년 10월 28일 ~ 1964년 5월 7일)는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 출신의 개신교 평신도 선교사·건축가·기업가이다. 캔자스주 레번워스에서 태어났다. 건축가를 지망하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입학이 결정되었으나, 가정의 경제상황으로 1900년 콜로라도 칼리지 이공계 과정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YMCA 활동을 시작하여,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 현립 상업학교(지금의 사가 현립 하치만 상업학교)의 영어교사로 2년간 일했으나, 영어 성경 공부를 통해 개종자가 늘어나자 승려들의 집단적인 방해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후 1908년 교토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 많은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시공하고, 이후 시가현 하치만(지금의 오미하치만시)을 근거지로 '오미 형제단'을 설립해 활동했다. 1919년 일본의 귀족 히토쓰야나기 스에노리 자작의 딸 히토쓰야나기 마키코와 결혼하였고, 1941년 일본 국적을 얻었다. 일본명은 히토쓰야나기 메레루(일본어: 一柳米来留)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더글라스 맥아더와 고노에 후미마로 사이를 중재하기도 하여, 논픽션 작가 가미사카 후유코는 그를 “천황을 지킨 아메리카인”이라 평했다. 그는 한반도의 근대 건축물의 설계 등에도 관여해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김정동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 영토에서 그가 설계한 건물은 1910~20년대 35건, 1930년대 54건, 1940년대 19건으로 총 108건이고, 그외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에는 38건의 건물을 설계하였고, 그 수는 전체 설계된 건물 중 약 10%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그에 의해 건축된 건물 중 주요 건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의 파이퍼홀 이나 대천 선교사 수양관 등이 있다.
장스자오(중국어 간체자: 章士钊, 정체자: 章士釗, 병음: Zhāng Shìzhāo, 한자음: 장사쇠, 1881년 3월…장스자오(중국어 간체자: 章士钊, 정체자: 章士釗, 병음: Zhāng Shìzhāo, 한자음: 장사쇠, 1881년 3월 20일~1973년 7월 1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 사회활동가이다. 청나라 말기 호남성(湖南省) 장사현(長沙縣) 출신으로 자(字)는 행엄(行嚴), 필명(筆名)은 황중황(黃中黃), 청동(靑桐), 추동(秋桐)이다. 중화민국 초기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가 중 한 명으로 『민립보(民立報)』와 『갑인(甲寅)』의 주편(主編)이었고 대령의 정치 평론을 발표하였다. 1903년 소보안(蘇報案)이라는 사건으로 상해(上海) 조계에서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돤치루이(段祺瑞)의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 사법총장겸교육총장(司法總長兼教育總長), 중화민국국민정부(中華民國國民政府) 국민참정회참정원(國民參政會參政員),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전국인민대표상임위원(全國人民代表常任委員), 전국정협상임위원(全國政協常任委員), 중앙문사연구관관장(中央文史硏究館館長)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