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사이조(일본어: 斎藤 才三 (さいとう さいぞう), 1908년 9월 24일 ~ 2004년)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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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사이조(일본어: 斎藤 才三 (さいとう さいぞう), 1908년 9월 24일 ~ 2004년)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아이치 기이치(일본어: 愛知 揆一, あいち きいち, 1907년 10월 10일 ~ 1973년 11월 23일)는 일본의…
아이치 기이치(일본어: 愛知 揆一, あいち きいち, 1907년 10월 10일 ~ 1973년 11월 23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전후의 내각 대신이었다. 그는 외무대신, 대장대신과 문부대신을 포함하여 자신의 경력을 통하여 몇몇의 내각 수준의 지위들을 보유하였다. 그는 두드러지게 1971년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를 대표하여 미국과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협상하고 조약을 맺었다.
나베시마 나오야스(鍋島直泰)는 일본의 정치인, 골프 선수이다. 나베시마씨 제13대 당주이다. 작위는 후작.…
나베시마 나오야스(鍋島直泰)는 일본의 정치인, 골프 선수이다. 나베시마씨 제13대 당주이다. 작위는 후작. 골프·곤충학(나비연구 및 수집)·클래식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족적을 남긴 다방면의 명사이다.
정진근(鄭鎭瑾, 1907년 9월 29일 - 1984년 7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졸업
이케노우치 도모지로(일본어: 池内友次郎, 1906년 10월 21일 ~ 1991년 3월 3일)은 일본의 작곡가이다.
사카구치 안고(일본어: 坂 (さか)口 (ぐち) 安 (あん)吾 (ご), 1906년 10월 20일 ∼ 1955년 2월 17일)은…
사카구치 안고(일본어: 坂 (さか)口 (ぐち) 安 (あん)吾 (ご), 1906년 10월 20일 ∼ 1955년 2월 17일)은 일본의 문학가로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坂 (さか)口 (ぐち) 炳 (へい)五 (ご))이다.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 시절 이미 방랑벽이 있었으며,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싸움질을 하고 돌아다녀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한편, 주로 무사들의 군담을 숙독했고, 남몰래 닌자의 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1932년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6년, 전후의 시대적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파악한 <타락론>과 <백치>에 의해 일약 시대의 총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와 동시에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평가된다.
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을…
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5대 해무청장이다. 본관은 통천(通川)이다.
우쓰노미야 도쿠마(일본어: 宇都宮 徳馬 (うつのみや とくま), 1906년 9월 24일~2000년 7월 1일)는 10선 중의원…
우쓰노미야 도쿠마(일본어: 宇都宮 徳馬 (うつのみや とくま), 1906년 9월 24일~2000년 7월 1일)는 10선 중의원 의원과 재선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자 미노화겐제약을 창업한 사업가다.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조선군사령관을 역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장남이다.
유진산(柳珍山, 1905년 10월 18일~1974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7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유진산(柳珍山, 1905년 10월 18일~1974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7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전라북도 진산군 출신이다.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서는 우익청년단체를 운용 및 운영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에 가담하여 친일파 단속, 척결활동을 했으나 실패했고, 제1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시절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신민당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이후 민주당, 민정당, 신민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니시무라 나오미(일본어: 西村 直己 (にしむら なおみ), 1905년 10월 8일~1980년 7월 28일)는 10선 중의원…
니시무라 나오미(일본어: 西村 直己 (にしむら なおみ), 1905년 10월 8일~1980년 7월 28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히라바야시 다이코(일본어: 平林 (ひらばやし) たい子 (こ), 1905년 10월 3일 - 1972년 2월 17일)는 일본의…
히라바야시 다이코(일본어: 平林 (ひらばやし) たい子 (こ), 1905년 10월 3일 - 1972년 2월 17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중국대륙과 조선에서의 방랑 등을 거쳐, 그 체험으로부터 프로문학 작가로 데뷔하였다. 정파적으로는 노농파에 속했다. 전후 반공주의자로 전향하였다. 사후 일본예술원상, 은사상을 수상하고 히라바야시 다이코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강선명(姜善明, 1905년 10월 3일~1981년 1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엔치 후미코(일본어: 円 (えん)地 (ち) 文 (ふみ)子 (こ), 1905년 10월 2일 ~ 1986년 11월 14일)는…
엔치 후미코(일본어: 円 (えん)地 (ち) 文 (ふみ)子 (こ), 1905년 10월 2일 ~ 1986년 11월 14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리승기(李升基, 1905년 10월 1일~1996년 2월 8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학자이다. 비날론(Vinalon)을…
리승기(李升基, 1905년 10월 1일~1996년 2월 8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학자이다. 비날론(Vinalon)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5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중앙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마쓰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교토 제국대학으로 진학해 1931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교토 제국대학 화학 연구소에서 조교수로 근무하던 1939년, 사쿠라다 이치로 등과 함께 비날론을 합성하여, 미국의 나일론과 독일의 아크릴 섬유에 이어 세계 세 번째 합성 섬유를 만든 사람이 되었다. 그 해 교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 정책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에 의해 구금되어 종전을 맞을 때까지 갇혀 있었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공학대학의 학장을 맡다가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31일 리종옥의 권유로 월북했다. 그 후 북조선에서 비날론 등의 섬유공업 발전에 힘썼으며,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맡기도 했다. 1967년 녕변 원자력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초대 연구소장으로 핵개발에 힘썼다고 한다. 비날론의 발명으로 1961년에 공산주의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을 수상하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김종신(1904년 10월 5일~1977년 11월 12일)은 일제시대의 기자, 언론인,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종신(1904년 10월 5일~1977년 11월 12일)은 일제시대의 기자, 언론인,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기업인이다. 조선일보 마산지국의 기자, 신간회 마산지회 집행위원, 마산부회의원, 해방 후에는 제8대 마산시장(민선),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강승구(姜昇求, 1903년 10월 14일 ~ 1986년 1월 8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5·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오형근(吳衡根, 1903년 10월 4일 평북 선천 ∼ ?)은 경찰 간부와 군수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3대…
오형근(吳衡根, 1903년 10월 4일 평북 선천 ∼ ?)은 경찰 간부와 군수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3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했다.
쓰루타 요시유키(일본어: 鶴田 義行, 1903년 10월 1일 ~ 1986년 7월 24일)는 일본의 수영 선수로 올림픽…
쓰루타 요시유키(일본어: 鶴田 義行, 1903년 10월 1일 ~ 1986년 7월 24일)는 일본의 수영 선수로 올림픽 200m 평영 2연승을 거두었다.
스즈키 시게요시(일본어: 鈴木 重義 (すずき しげよし), 1902년 10월 13일 ~ 1971년 12월 20일)는 일본의…
스즈키 시게요시(일본어: 鈴木 重義 (すずき しげよし), 1902년 10월 13일 ~ 1971년 12월 20일)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쓰지 마사노부(일본어: 辻 政信, 1902년 10월 11일 ~ 1968년?)는 일본의 육군군인, 정치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쓰지 마사노부(일본어: 辻 政信, 1902년 10월 11일 ~ 1968년?)는 일본의 육군군인, 정치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약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좌(대령)으로 예편하여 정치계로 입문하였고, 베트남 전쟁 와중에서 라오스를 방문했다가 실종되었다. 말레이 작전에서 기자들에게 여러 가지 작전을 유창하게 설명하면서 자칭, 혹은 타칭으로 "작전의 신"(作戦の神様)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사건, 할힌골 전투, 숙칭 대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코코다 트랙 전투,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과장된 언론플레이로 유명하며, 2차대전 후에도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쓰지를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남자’(第三次世界大戦さえ起こしかねない男)라고 평가하며 위험시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 말레이시아, 버마, 과달카날 전투에 각각 참모장교로 파견되었으나, 자주 지휘권을 간섭하여 특히 과달카날에서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대적인 물량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일본육군 장교의 상징이다. 또한 포로 집단처형, 식인 등 일본군의 각종 잔혹행위를 명령하기도 했으나, 처벌은커녕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참의원 재임 중인 1961년 4월에 동남아시아 시찰을 위해 출국, 라오스에 건너갔다가 흔적없이 실종되었다. 그 뒤 1968년 7월 20일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이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각종 의견이 분분했으나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즈카 미쓰노부(일본어: 飯 (いい)塚 (づか) 盈 (みつ)延 (のぶ), 1902년 10월 4일 ~ 1965년 9월 4일)는…
이즈카 미쓰노부(일본어: 飯 (いい)塚 (づか) 盈 (みつ)延 (のぶ), 1902년 10월 4일 ~ 1965년 9월 4일)는 일본공산당 당원이었으며, 또한 특별고등경찰의 밀정이었다. 스파이 M(スパイM)이라고도 불렸다. 사용한 가명으로는 마쓰무라 노보루(松村昇), 미네라 효조(峰原暁助), 아마노 히로(天野煕), 다카세 마사타카(高瀬正敬) 등. 제2차 일본공산당을 일망타진시킨 아타미 사건에 기여한, 공산당 사상 최대의 밀정이었다. 1902년 에히메현 슈소군 고마쓰정(지금의 사이조시) 출신. 1909년 소학교에 입학. 성적이 좋아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쌀 소동을 계기로 일본공산당 최초의 노동자 당원이 되었고, 와타나베 마사노스케가 이끌었던 동경합동조합에 투신함으로써 노동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제2차 일본공산당은 젊은 노동운동가로 촉망받던 그를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 유학보냈다. 하지만 유학 중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 이즈카는 귀국 후 검거되고 전향한 뒤 경찰의 밀정이 되었다. 이즈카는 밀정으로서 당에 잠입, 비상시공산당 시대에 공산당 가옥자금국 책임자가 되어 1932년 8월 윤기협 사살사건, 동년 10월 적색깡패 사건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권력도발적 정책을 지시했고, 동년 11월 아타미 사건 때 공산당 대표자들을 일제검거당하게 만들었다. 이즈카가 밀정임을 KUTV 동문이었던 가자마 조키치 위원장을 비롯한 당간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에, 일반 당원들은 그의 과격한 활동방침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고 따랐다. 그러나 아타미 사건으로 인한 일제검거 이후 조사와 재판에서 이즈카의 이름이 나오지 않자 당원들은 그가 경찰의 밀정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아타미 사건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동생과 건축업을 했다. 이후 1976년 10월 28일 제78회 국회 징계위원회에서 공산당의 콘노 요지로 중의원 의원이 “이즈카는 평생 사회에서 도망치는 생활을 하며 홋카이도와 만주를 왕복하다 종전 후 가명으로 귀국한 이래 본적을 숨기고 가명을 계속 사용하면서 특고 끄나풀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방에 틀어박혀 살다 쇼와 40년 술독에 빠져 도망자의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출생지 본적상의 이즈카 미쓰노부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 그 근황이 알려졌다.
김홍용(金洪鏞, 1902년 10월 3일 ~ 1950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홍용(金洪鏞, 1902년 10월 3일 ~ 1950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관은 김해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고, 면장을 역임하다가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얼마 뒤 사망했다. 종교는 천주교이다. 동생인 김문용이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그의 지역구를 이어받았다.
야하라 히로미치(일본어: 八原 博通, 1902년 10월 2일 ~ 1981년 5월 7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으로, 오키나와…
야하라 히로미치(일본어: 八原 博通, 1902년 10월 2일 ~ 1981년 5월 7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으로,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일본군의 고급 참모로 활약했다. 1902년 돗토리현의 요나고시에서 태어나 최연소로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미국에 주재한 경험이 있어서, 대전국인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에는 일본 육군 제15군 참모로서 버마 (지금의 미얀마) 공략 작전을 담당했으며, 그 뒤에는 일본 육군 대학 교관을 거쳐 1944년 3월, 오키나와의 방위를 담당하는 일본 육군 제32군의 고급 참모가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선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를 보좌하고, 일본의 입장을 유리하게 할 생각으로 지구 전술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그의 전략은 표면적 무용을 중시하는 당시의 일본군에 뭉개졌고, 대본영에서의 공격 재촉과 조 이사무 참모장의 정적 사고 때문에 약 1주간의 무모한 야간 돌격으로 변환되었다. 야하라의 생각대로 일본군은 큰 손해를 입고 마부니 고지까지 퇴각했고, 1945년 6월 23일 항복함으로써 전투가 종결되었다. 야와라는 지휘관 우시지마 미쓰루와 조 이사무의 할복 자살을 지켜본 뒤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1981년 사망하였다.
김상순(金相舜, 1900년 ~ ?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니시다 미쓰기(일본어: 西 (にし)田 (だ) 税 (みつぎ): 1901년(메이지 34년) 10월 3일-1937년(쇼와 12년)…
니시다 미쓰기(일본어: 西 (にし)田 (だ) 税 (みつぎ): 1901년(메이지 34년) 10월 3일-1937년(쇼와 12년) 8월 19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 사상가다. 육군 출신 재야우익사상가로서 재야와 육군 청년장교단을 연결하는 "혁명 브로커" 역할을 했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저술한 기타 잇키의 하수인 내지 수제자로서 그 영향을 받아 국가혁신의 뜻을 더욱 확대하였다. 니시다의 사상을 황도파 청년장교단이 신봉했다. 그 결과 1936년 황도파 청년장교단의 쿠데타 2·26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 니시다와 기타는 쿠데타 준비 과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했다.
구용서(具鎔書, 일본식 이름:具原一郎 1899년 10월 21일 ~ 1984년 4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초대 한국은행…
구용서(具鎔書, 일본식 이름:具原一郎 1899년 10월 21일 ~ 1984년 4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초대 한국은행 총재이며, 제10대 상공부 장관이다. 본관은 창원.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호는 죽산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온건주의로 사상전향하였다.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들의 극심한 반대로 절반만 성사시키고 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시도는 결국 이승만 정권 말 사법 살인 희생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날조된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1897년 10월 9일 ~ 1973년 4월 30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노지리…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1897년 10월 9일 ~ 1973년 4월 30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노지리 기요히코(野尻清彦). 소설 '구라마텐구(鞍馬天狗)' 시리즈 등 대중문학 작가로 유명하고, 역사소설과 논픽션물도 썼다.
윤일선(尹日善, 1896년 10월 5일~1987년 6월 22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의사, 대학교수, 대학총장, 사회…
윤일선(尹日善, 1896년 10월 5일~1987년 6월 22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의사, 대학교수, 대학총장, 사회 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京都帝國大學校)에서 수학한 후 귀국, 세브란스 의과 대학과 서울대학교 의학부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전공으로는 병리학과 해부학, 암 연구 분야였다. 대한민국학술원의 원로 회원이자 초대 원장이었으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1954년 서울대학교 부총장, 1956년 총장, 1961년 서울대 의대 강사와 명예교수를 지냈다. 1956년부터 1973년까지는 암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1963년 1월 박정희 등의 군정에 참여한 뒤로는 공화당 창립에 참여하고, 1964년 9월과 이듬해 1965년 9월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한국대표로 두 차례 다녀왔으며, 과학기술후원회 이사장과 과학기술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윤영렬의 손자이자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교육자인 윤치오의 첫째 아들이다. 윤승선의 형이며,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의 사촌 형이며, 구한말의 개혁정치가 윤치호의 당질이다. 그밖에 함께 의사로 활동한 윤치왕이 그의 당숙이고, 윤유선은 그의 사촌 동생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기도 했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직접 선출한 최초의 비(非)관선 서울대학교 총장이었다. 일본 도쿄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일본 긴키 지방 교토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일본 도쿄를 떠나 대한제국으로 귀국 후 충청남도 아산군을 거쳐 한성부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본관은 해평이며, 아호는 동호(東湖)이다.
에도가와 란포(일본어: 江戸川 乱歩, えどがわ らんぽ, 1894년 10월 21일 ~ 1965년 7월 28일)는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일본어: 江戸川 乱歩, えどがわ らんぽ, 1894년 10월 21일 ~ 1965년 7월 28일)는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본명은 히라이 다로(일본어: 平井太郎 ひらい たろう)로, 필명인 에도가와는 미국의 문호인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23년 잡지 신청년에 단편 <2전짜리 동전>으로 데뷔했으며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 괴도 20면상 등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일본탐정작가클럽(이후 일본추리작가협회)을 창설해 초대이사장을 지냈다. 추리 작가의 등용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만드는 등 미스터리의 발전과 대중화에 힘써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 《명탐정 코난》에서도 코난이 단골서점에서 《괴도 20면상》을 사오는 장면이 있고, 테이탄 초등학교(청솔초등학교)의 담임교사도 에도가와 란포를 좋아하는 추리문학 팬이다.
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김경배(金庚培, 1894년 10월 5일/1895년 연안군 - 1965년 4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평양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구택대학 전문부 정치과를 수료하였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경력도 있으며 의성단 부단장을 역임하였다. 연안면장과 연백군수, 연백수리조합장을 역임하였다.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이었다. 초대 국회의원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1969년 8월 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3대 국무총리이다. 호(號)는 창랑(滄浪), 자(字)는 치우(致雨, 아명(兒名)은 장삼욱(張三旭). 영문 이니셜은 TS.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했고, 정부 수립 이후 3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부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 좌익 정당과 좌익 정치운동을 단속하였으나,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학자 여현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장승원과 정부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의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경상도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리 출신이다.
기하라 히토시(일본어: 木原 均, きはら ひとし, 1893년 10월 21일 ~ 1986년 7월 27일)는 일본의…
기하라 히토시(일본어: 木原 均, きはら ひとし, 1893년 10월 21일 ~ 1986년 7월 27일)는 일본의 유전학자이다. 교토 대학의 명예 교수 학위,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었으며,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수영을 연구하면서 종자 식물의 성염색체를 발견하였으며, 3배체를 이용한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하였다. 이는 염색체 수가 다른 생식세포끼리의 교배를 이용한 것이다. 전일본 스키 연맹 회장, 일본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 모교의 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1986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구로시마 가메토(黒島亀人)는 일본의 해군군인이다. 해군병학교 44기생이고 최종 계급은 해군 소장이다.
쿠루마 사메조(일본어: 久留間 (くるま) 鮫造 (さめぞう): 1893년(메이지 26년) 9월 24일-1982년(쇼와 57년)…
쿠루마 사메조(일본어: 久留間 (くるま) 鮫造 (さめぞう): 1893년(메이지 26년) 9월 24일-1982년(쇼와 57년) 10월 20일)는 일본의 경제학자다. 호세이대학 명예교수, 호세이대학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전공은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렉시콘』의 편자로 유명하다. 릿쿄대학 명예교수 쿠루마 켄의 아버지다.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종이 도매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을 계승하기를 원한 부모의 바람에 반하여,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중학교, 제6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1개월 후 정치학과로 전과한다. 병으로 1년 휴학하고 졸업했다. 1918년 스미토모은행에 입사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또한 쌀 소동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힘에 충격을 받아 3개월 남짓만에 퇴사했다. 일단 본가로 귀향한 뒤 이듬해 2월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에 입소했다. 1920년부터 2년간 쿠시다 타미조와 함께 자료수집을 위한 유럽행을 명받고 쿠루마는 영국에서, 쿠시다는 독일에서 도서자료를 모았다. 1923년부터 3년간 도시샤대학에서 경제학사를 강의했다. 동시기 벌어지던 일본자본주의 논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공습으로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의 사무소・장서각이 전소했다. 전후 소장 타카노 이와사부로와 함께 연구소 재건을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 1946년 9월 오오우치 효에의 권유로 호세이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호세이대학에서는 경제학사를 담당했다. 1960년 호세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 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말년에는 호세이와 릿쿄의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자들을 모아 마르크스 사전인 『마르크스 경제학 렉시콘』을 만들었다. 겸임교수로서 아이치대학에서, 비상근강사로서 동경대학, 홋카이도대학, 가쿠슈인대학 등에서 경제학사를 강의했다.
구사카 류노스케(일본어: 草鹿 龍之介, 1892년 9월 25일 ~ 1971년 11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다이고 다다시게(일본어: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해군…
다이고 다다시게(일본어: 醍醐忠重, 1891년 10월 15일 ~ 1947년 12월 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해군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해군 중장. 귀족원 의원. 작위는 후작. 옛 공가 출신 다이고 가(醍醐家) 제14대 당주. 아버지는 다이고 다다유키이며 보신 전쟁에서 공을 세워 종3위에 서임되었다. 하지만 가문상속분쟁으로 인해 1899년 5월 23일 도쿄부 고지마치에서 사촌 다이고 가쿠타로에게 총살당하고 이듬해 7월 4일에는 조부 다이고 다다오사마서 세상을 뜨고나니 다이고 종가의 가세는 기울게 되었고 다다시게는 다이고 가의 본가인 이치조 가에 의탁하게 된다. 후에 해군병학교를 성적으로 졸업한 후 승진하여 말년에는 해군 중장까지 오르게 된다. 2차 대전이 종전된 후 폰티아낙 현지 주민이 학살당하여 2만여명이 희생된 폰티아낙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네덜란드군에 의해 전범 혐의로 체포된 다다시게는 사형 판결을 받자마자 공개 총살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일본어: 近衛文麿, 1891년 10월 12일~1945년 12월 16일)는 섭가 고노에가 출신의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일본어: 近衛文麿, 1891년 10월 12일~1945년 12월 16일)는 섭가 고노에가 출신의 일본 정치인·공작, 제34·38·3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족고대(民族高大)를 구상한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자로 저명하다.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스즈키 소사쿠(鈴木宗作, 1891년 9월 27일 - 1945년 4월 19일)은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아이치현 출신으로…
스즈키 소사쿠(鈴木宗作, 1891년 9월 27일 - 1945년 4월 19일)은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아이치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24기생, 일본 육군대학교 31기생. 제35군사령관이었던 1945년 4월 19일, 필리핀 전선에서 전사했고, 사후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다. 1974년에는 훈일등욱일대수장(전몰자 서훈)을 수여받았다.
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1964년 1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며…
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1964년 1월 10일)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단체조직과 항일활동을 하다가 8.15 광복 뒤에는 한민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한민당 정치노선에 싫증을 느껴 1946년 10월 탈당. 김규식계열 정치노선에 활동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나 뒤에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월북하였다. 경상도 기장군 출신이며, 본명은 김두전(金枓全)이다.
히가시야마 치에코(Chieko Higashiyama, 1890년 9월 30일 ~ 1980년 5월 8일)는 일본의 배우, 연극…
히가시야마 치에코(Chieko Higashiyama, 1890년 9월 30일 ~ 1980년 5월 8일)는 일본의 배우, 연극 배우이다. 지바시에서 태어났으며 요코하마시에서 사망하였다.
나경석(羅景錫, 1890년 9월 27일(음력 8월 14일) ∼ 1959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나경석(羅景錫, 1890년 9월 27일(음력 8월 14일) ∼ 1959년 12월 31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사회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 겸 화가, 작가, 시인인 나혜석의 오빠이다.
김명식(金明植, 1890년 9월 26일 ~ 1943년 4월 11일)은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김명식(金明植, 1890년 9월 26일 ~ 1943년 4월 11일)은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송산(松山)이다.
기무라 헤이타로(일본어: 木村 兵太郎, 1888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일본 제국…
기무라 헤이타로(일본어: 木村 兵太郎, 1888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일본 제국 육군의 대장으로, 별칭은 버마의 도살자였다.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도야마 간켄(일본어: 遠山寛賢, 1888년 9월 24일 ~ 1966년 11월 24일)은 슈토칸 가라테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한…
도야마 간켄(일본어: 遠山寛賢, 1888년 9월 24일 ~ 1966년 11월 24일)은 슈토칸 가라테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한 일본의 교사이자 가라테 사범이다.
홋타 마사쓰네(堀田正恒)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화족이다. 귀족원 백작의원. 옛 이름은 나베시마 나오오토(鍋島 直言)로서…
홋타 마사쓰네(堀田正恒)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화족이다. 귀족원 백작의원. 옛 이름은 나베시마 나오오토(鍋島 直言)로서 친부는 (하스노이케)나베시마 나오토 자작으로 그의 차남이다. 노중 홋타 마사요시의 차남 홋타 마사토모 백작의 데릴사위로서 홋타 대로계의 당주가 되었다. 1915년 도쿄 제국 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사카이 타카시(酒井 隆, Sakai Takashi; 1887년 10월 18일 – 1946년 9월 3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사카이 타카시(酒井 隆, Sakai Takashi; 1887년 10월 18일 – 1946년 9월 3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육군의 중장으로, 일본 점령 하의 홍콩 총독으로서의 역할로 알려져 있다.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일본어: 朝香宮鳩彦王 아카사노미야 야스히코 오[*],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일본어: 朝香宮鳩彦王 아카사노미야 야스히코 오[*],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는 일본 제국의 황족이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군인이다. 신적강하 이전엔 황족을 나타내는 접미사(미야)와 관작명(왕)이 붙었으나 신적강하 이후엔 아사카 야스히코(朝香鳩彦)로 개명되었다. 아사카는 쇼와 천황에게 숙부뻘이자 고모부가 된다.
오노 로쿠이치로(일본어: 大野緑一郎, 1887년 10월 1일 ~ 1985년 9월 2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변호사이다.…
오노 로쿠이치로(일본어: 大野緑一郎, 1887년 10월 1일 ~ 1985년 9월 2일)는 일본의 관료이자 변호사이다. 제37대 경시총감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하였다. 제82대・제83대 내각총리대신 하시모토 류타로의 외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