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인이며…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인이며 시인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출신(出身)이며, 본관(本貫)은 울산(蔚山), 호는 가인(街人)이다. 일제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이인, 허헌과 함께 조선국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결국 한국민주당의 정책 관련 노선에 반발하여 1946년 10월에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 후에 분단의 현실을 느껴 노선을 선회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初代)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고, 대법원장 퇴임 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야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삼각산로 5)에 안장되어 있다.
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 신익희, 윤보선,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아라하타 간손(일본어: 荒 (あら)畑 (はた) 寒 (かん)村 (そん): 1887년(메이지 20년) 8월 14일-1981년(쇼와 56년) 3월 6일)은 일본의 노동운동가다. 사회주의자에서 시작해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끝에 전후 일본사회당에서 의원을 지냈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이라쿠정의 요코하마 유곽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요코하마시 노바(野庭, 현재의 고난구)에서 보냈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외국인상관의 보-이로 일하다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근무하던 가운데 『만조보』에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가 쓴 반전시, 퇴사의 변을 보고 감동하의 노동운동에 투신, 코토쿠와 사카이가 발행한 주간지 『평민신문』의 비전론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자가 된다. 이후 사카이의 주선으로 와카야마현 무로군의 『무로신보』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1904년 『평민신문』 편집주간으로 참여했다. 『평민신문』에서 6살 연상의 칸노 스가와 내연관계가 되어 1907년 결혼했다. 이 때 사회주의 전도 과정에서 타나카 쇼조를 알게 되어 아시오 광독사건을 소재로 「야나카촌 멸망사」를 저술했다. 1908년 적기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금고 1년에 처해진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 스가가 코토쿠와 불륜관계가 되었다. 코토쿠는 모로오카 치요코와 이혼했고, 스가도 일방적으로 옥중의 아라하타에게 이혼장을 보냈다. 분노한 아라하타는 2년 뒤 출옥하여 권총으로 스가를 죽이려 했다가 단념하고 대신 카츠라 타로 총리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한편 스가 및 코토쿠와 소원해진 때문에 이후 코토쿠 대역사건에서 검거 및 처형을 면했다. 코토쿠와 스가는 불륜 사건으로 동료들에게 백안시되었기 때문에 아라하타 외에도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연좌를 면했다. 출옥 후 사카이가 설립한 매문사에 참여, 야마카와 히토시, 타카바타케 모토유키 등과 함께 꾸준히 체제변혁을 도모했다. 1912년에는 오스기 사카에와 『근대사상』을 창간했다. 하지만 생디칼리슴을 주장한 오스기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아라하타의 대립이 가시화된 끝에 둘은 결별했다. 아라하타는 관서 지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0년 일본사회주의동맹, 1922년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에 각각 참여했다. 그러나 1923년 제1차 일본공산당 사건으로 사카이 토시히코와 함께 검거되었고, 제1차 일공당은 아라하타의 유일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아라하타는 잔무 처리를 위한 뷰로에 참여하여 당재건을 목표로 했지만 뷰로 내에서 후쿠모토 카즈오의 이론이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당재건 활동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후쿠모토이즘에 의문을 제기한 아라하타는 후쿠모토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있던 젊은 활동가들에게 격렬하게 비방을 받았다. 이후 일공당은 후쿠모토이즘에 따라 제2차 일본공산당으로 재건되지만, 아라하타는 제1차 일공당 해산에 찬성했던 사노 마나부, 토쿠다 큐이치가 재건 중심세력이 된 것에 분노하여 애제자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일공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27년 야마카와 히토시, 이노마타 츠나오 등과 함께 『노농』을 창간, 노농파의 중심 멤버로서 비공산당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향도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반파시스트 운동을 주도한 일본무산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1937년 인민전선 사건으로 야마카와, 카토 칸쥬 등 400여명과 함께 투옥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살이를 한다. 전후 전금동맹 위원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중의원 의원을 2기(중선거구 도쿄 제4구) 맡지만, 1948년 일사당을 탈당했다. 1949년 1월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주의정당결성추진협의회(소위 간손 신당)을 모체로 무소속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관동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뒤로는 정치에서 물러나 평론활동에 전념했다. 1950년 12월 소련에 대한 평가를 놓고 코보리 진지와 야마카와 히토시·사키사카 이츠로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아라하타는 코보리의 주장에 찬동하지는 않았지만 코보리가 간손 신당의 실무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코보리의 편을 들어 1951년 결성된 사회주의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소련파 경향을 선명하게 한 사키사카의 사회주의협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신좌파 운동이 흥기할 때 일시적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지만 내부 게발트 등 막장짓에 실망하여 다시 문필활동에만 전념했다.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의 토무라 잇사쿠가 출마했을 때 오다 마코토 등이 ‘산리즈카 투쟁과 토무라 잇사쿠씨에 연대하는 회’를 만들자 거기 참가했다. 1981년 3월 6일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타마가와 병원에서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향년 93세.
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본명 한자: 趙鏞殷, 1887년 5월 2일~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본명 한자: 趙鏞殷, 1887년 5월 2일~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의 정치인 겸 교육인이다.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필명으로 사용하던 조소앙(趙素昻)이 훗날을 기하여, 1918년 4월 30일 이후부터 개명한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 귀국하여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48년 사회당을 만들어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시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의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를 창시한 바있다. 정치, 교육, 경제 평등을 말하는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는 중국 기독교 정치가 쑨원의 삼민주의와 일본 유학시절에 번역한 "천부인권론"의 기독교적 '만민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아 1918년부터 정립한 정치노선이다. 조소앙은 1911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지만 여섯개의 종교를 두루 아울러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5년 육성교를 창시하였다. 하지만 1918년 삼균주의를 정립한 이후에는 기독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종교통합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나카니시 이노스케(일본어: 中 (なか)西 (にし) 伊 (い)之 (の)助 (すけ): 1887년 2월 8일-1958년 9월…나카니시 이노스케(일본어: 中 (なか)西 (にし) 伊 (い)之 (の)助 (すけ): 1887년 2월 8일-1958년 9월 1일)는 일본의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중의원의원을 2기 역임했다.
이노우에 닛쇼(일본어: 井 (いの)上 (うえ) 日 (にっ)召(しょう): 1886년 4월 12일-1967년 3월 4일)는…이노우에 닛쇼(일본어: 井 (いの)上 (うえ) 日 (にっ)召(しょう): 1886년 4월 12일-1967년 3월 4일)는 일본의 일련종 승려, 극우 성향의 테러리스트다. 닛쇼는 법명이고 본명은 아키라(昭). 1886년 의사 집안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형이 해군 중령 이노우에 후미오. 구제 마에바중학교 도네분교를 졸업한 후 동학교 본교를 졸업했다. 와세다대학교, 동양협회전문학교(현 타쿠쇼쿠대학)을 각각 중퇴한다. 1909년 남만주철도 입사, 첩보활동을 하고 1920년 귀국한다. 1925년 호국성사에 들어가고, 1928년 타나카 미츠아키의 원조로 이바라키현 오아라이정의 일련종 사원 입정호국당 주지가 된다. 그 뒤 해군 과격파 후지이 히토시 중위와 애향숙 숙장 타치바나 고자부로 등과 만나 폭력 외에 국가개조의 길은 없다고 의기투합하여 테러리즘을 계획했다. 1932년 혈맹단을 결성, "일인일살 일살다생"을 내걸고 요인 암살으로써 국가개조를 실현할 것을 꾀하여 2명을 살해했고(혈맹단 사건), 체포된 뒤 수괴로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40년 특사를 받아 출옥, 1941년 미카미 타쿠, 요츠모토 요시타카, 히시누마 고로등과 히모로기숙을 설립하고 한동안 고노에 후미마로의 저택에 기식했다. 미일협상 진전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테러를 두려워한 고노에가 경호원으로 이노우에를 고용한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뒤 1947년 공직추방 대상이 되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농촌 강연을 돈다. 1953년 우익단체 유신운동 관동협의회 참여로 취임. 이듬해 사고야 토메오 등과 보국단을 결성하고 초대 단장이 된다. 1956년 우익활동에서 은퇴하고 흑막 미우라 기이치의 경제적 원조를 받아 노후를 보내다 1967년 뇌연화증으로 사망.
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平塚 らいてう, 1886년 2월 10일 ~ 1971년 5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平塚 らいてう, 1886년 2월 10일 ~ 1971년 5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 작가, 여성주의자이며 쇼와 시대의 여성 운동 지도자이다. 본명은 히라쓰카 하루(平塚明).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 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출신.
스즈키 분지(鈴木文治, 1885년 9월 4일 ~ 1946년 3월 12일)는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일본의 정치인이자…스즈키 분지(鈴木文治, 1885년 9월 4일 ~ 1946년 3월 12일)는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일본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다. 우애회(友愛会)를 창시하는 등 일본 노동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쓰카모토 도라지(일본어: 塚本虎二, 1885년 8월 2일 ~ 1973년 9월 9일)는 일본 후쿠오카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쓰카모토 도라지(일본어: 塚本虎二, 1885년 8월 2일 ~ 1973년 9월 9일)는 일본 후쿠오카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대 법대를 졸업했고 젊은 시절 변호사와 정부 농상무성 관료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기독교로 개종해 무교회주의 운동가 우치무라 간조 제자가 되었으며 개인 잡지 <성경지식>을 창간하였고 다년간 도쿄 성경연구회를 이끌면서 기독교 관련 서적 집필과 복음 전도자로 살았다. 한국 무교회주의 운동가인 노평구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허헌(許憲, 1885년 7월 22일 ~ 1951년 8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법률가이자 법조인 출신의…허헌(許憲, 1885년 7월 22일 ~ 1951년 8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법률가이자 법조인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이다. 아호(雅號)는 긍인(兢人)이다.
기타 잇키(일본어: 北 (きた) 一輝 (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는 일본의 사상가…기타 잇키(일본어: 北 (きた) 一輝 (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 정치철학자다.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일본어: 北 (きた) 輝次郎 (てるじろう))이다. 천황제와 메이지 헌법, 천황주권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기타는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국가주의, 우파사회주의적 접근법으로 일본을 개조하려 했다. 기타에게는 천황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천황이 현인신이라는 사고가 팽배했던 일본 제국에서 그런 기타는 매우 특이한 사상가였다.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출생으로,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일제 강점기에 민족 운동에 참여하여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 활동과 민족자본 운동을 벌이며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았고,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 남측의 여운형 등과 함께 북측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소련군정 당국과 대립하다가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0월에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김동원(金東元, 일본식 이름: 金岡東元 가네오카 히가시모토, 1884년 2월 1일 ~ 1951년 3월 20일)은 구한말기…김동원(金東元, 일본식 이름: 金岡東元 가네오카 히가시모토, 1884년 2월 1일 ~ 1951년 3월 20일)은 구한말기 애국계몽운동가, 일제강점기 교육인, 사업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구한말기 교사로 지내면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평양YMCA 지회등 활동하여 민족주의자로 교육 활동 및 사회 활동 등 전개하여 실력 양성 및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전시체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로 친일파로 변절했다. 광복 이후 고당 조만식과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나, 탈퇴 직후 곧바로 월남하여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김시현(金始顯, 1883년 6월 9일 ~ 1966년 1월 3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자는 구화(九和)…김시현(金始顯, 1883년 6월 9일 ~ 1966년 1월 3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자는 구화(九和), 호는 하구(何求)이다. 의열단원으로 김원봉과 사상적 동지였고, 상하이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의 정치인이였다.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3·1 운동 후 만주에서 의열단 활동 등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수차례 투옥되고 풀려나길 반복하였다. 옥중에서 광복을 맞고 풀려났으며, 그 후 제2대 안동군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20년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단체대표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이 국내에 들어와 전국적인 규모의 폭동과 요인 암살 및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국내에 폭탄반입을 시도할 때 이에 가담하다 대구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년간 투옥되었다. 1952년 6월 25일 부산에서 열린 6·25 기념식장에서 유시태로 하여금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하였으나, 권총이 불발에 그쳐 실패하였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19 혁명과 함께 복역 만 7년 10개월만인 1960년 4월 28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에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60년 7월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66년 1월 3일 사망하였다.
야마카와 히토시(일본어: 山川 均 (やまかわ ひとし): 1880년 12월 20일 - 1958년 3월 23일)는 일본의…야마카와 히토시(일본어: 山川 均 (やまかわ ひとし): 1880년 12월 20일 - 1958년 3월 23일)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 재야 경제학자다.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의 지도적 이데올로그였다.
후세 다쓰지(일본어: 布施辰治,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출생)는 미야기현…후세 다쓰지(일본어: 布施辰治,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출생)는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출신의 일본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 식민지 독립운동가이다. 후세 다츠지라고도 번역한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윌리엄 메렐 보리스(영어: William Merrell Vories, 1880년 10월 28일 ~ 1964년 5월 7일)는…윌리엄 메렐 보리스(영어: William Merrell Vories, 1880년 10월 28일 ~ 1964년 5월 7일)는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 출신의 개신교 평신도 선교사·건축가·기업가이다. 캔자스주 레번워스에서 태어났다. 건축가를 지망하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입학이 결정되었으나, 가정의 경제상황으로 1900년 콜로라도 칼리지 이공계 과정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YMCA 활동을 시작하여,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 현립 상업학교(지금의 사가 현립 하치만 상업학교)의 영어교사로 2년간 일했으나, 영어 성경 공부를 통해 개종자가 늘어나자 승려들의 집단적인 방해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후 1908년 교토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 많은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시공하고, 이후 시가현 하치만(지금의 오미하치만시)을 근거지로 '오미 형제단'을 설립해 활동했다. 1919년 일본의 귀족 히토쓰야나기 스에노리 자작의 딸 히토쓰야나기 마키코와 결혼하였고, 1941년 일본 국적을 얻었다. 일본명은 히토쓰야나기 메레루(일본어: 一柳米来留)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더글라스 맥아더와 고노에 후미마로 사이를 중재하기도 하여, 논픽션 작가 가미사카 후유코는 그를 “천황을 지킨 아메리카인”이라 평했다. 그는 한반도의 근대 건축물의 설계 등에도 관여해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김정동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 영토에서 그가 설계한 건물은 1910~20년대 35건, 1930년대 54건, 1940년대 19건으로 총 108건이고, 그외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에는 38건의 건물을 설계하였고, 그 수는 전체 설계된 건물 중 약 10%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그에 의해 건축된 건물 중 주요 건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의 파이퍼홀 이나 대천 선교사 수양관 등이 있다.
랴오중카이(중국어 정체자: 廖仲愷, 간체자: 廖仲恺, 병음: Liào Zhòngkǎi, 한자음: 요중개, 1877년 4월…랴오중카이(중국어 정체자: 廖仲愷, 간체자: 廖仲恺, 병음: Liào Zhòngkǎi, 한자음: 요중개, 1877년 4월 23일 ~ 1925년 8월 20일)는 중화민국의 정치인, 혁명가이다. 하카계 출신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생이다. 1903년부터 쑨원의 정치공작에 참여, 1909년 일본 주오 대학을 졸업했다.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광둥도독부의 총참의가 되었다. 중화민국 수립 후 위안스카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으킨 제2차 혁명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1920년 귀국, 쑨원의 광둥군 정부(호법정부)에 참가하여 재정부차장, 1923년 일본에서 소련의 아돌프 이오페와 회담을 하고 국공합작을 추진, 광둥성장, 광둥대원수부 비서장,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당공안부장, 황푸군관학교 당부대표 등을 역임하였고, 1925년 쑨원이 죽은 후 국민당 좌파 중심 인물로서 국민정부의 재정부장이 되었으나, 그 해 8월 20일 우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소마 곳코(일본어: 相 (そう)馬 (ま) 黒 (こっ)光 (こう): 1876년 9월 12일-1955년 3월 2일)는 일본의…소마 곳코(일본어: 相 (そう)馬 (ま) 黒 (こっ)光 (こう): 1876년 9월 12일-1955년 3월 2일)는 일본의 사업가다. 남편 소마 아이조와 함께 신주쿠 나카무라야를 창업했다. 일본식 크림빵의 개발자. "콧코(흑광)"은 호이고 본명은 료(良 (りょう))다. 결혼하기 전 구성은 호시(星). 센다이번사 호시 기시로(星喜四郎)의 3녀로 오늘날의 센다이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원래 타다(多田)가 사람이었으나 호시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호시 료는 소녀 시절부터 요코하마 밴드 출신인 오시카와 마사요시의 교회 "센다이 일본기독교회"에 다녔고, 기독교 신앙을 가져서 12세에 세례를 받았다. 외조부는 한학자 호시 유우키이고 모친은 그 3녀다. 호시 유우키의 5녀로 호시 료의 이모인 사사키 토요쥬는 여권운동가로 활동했다. 소학교 초등과를 졸업한 후 재봉학교에 들어갔지만 진학을 강하게 희망하여 1891년 학비가 싼 미션스쿨인 미야기 여학교(현 미야기학원 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미국식 교육의 강요에 반발한 학생들이 학내분규를 일으키자 거기에 연좌하고 자퇴했다. 이후 요코하마의 훼리스 영화여학교(현 훼리스여학원 중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다 메이지 여학교 강사 호시노 텐치와 알게 된 것을 계기로 문학에 심취, 미션스쿨의 학풍에 질려 퇴학하고 1895년 호시노, 키타무라 토코쿠, 시마자키 토손 등이 강사로 있는 도쿄 메이지 여학교로 전학하여 1897년 졸업했다. 메이지 여학교 재학 중 시마자키의 수업을 받았고, 사촌여동생 사사키 노부코를 통해 쿠니키다 돗포와도 교제하여 문학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흑광(콧코)"이라는 호는 은사인 메이지 여학교 교두에게 받은 것으로, 아름다운 성품이 너무 격렬하니 “넘치는 재기를 약간 검게 숨기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1898년 나가노현에서 양잠 사업가로 활약하던 기독교도 소마 아이조와 결혼하고 아이조의 고향 아즈미노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농업과 양잠은 콧코의 기질에 맞지 않아 건강을 해쳤고, 또 농촌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어서 요양을 위해 상경, 도쿄에 정착했다. 남 밑에 취직하고 싶어하지 않은 남편의 뜻을 따라 1901년 도쿄 혼고에 작은 빵가게인 "나카무라옥(中村屋)"을 개업했다. 1904년 크림빵을 개발했다. 1907년 신주쿠로 이전하고 1909년 신주쿠역 근처에 개점했다. 남편과 함께 중화만두, 월병, 인도식 카레 등 신제품을 고안하고 끽다부(오늘날의 까페)를 신설하는 등 사업에 힘쓰는 한편, 회화와 문학 등을 즐기는 살롱을 만들어 오기와라 로쿠잔, 나카무라 츠네, 타카무라 코타로, 토바리 코간, 키노시타 타오에, 마츠이 스마코, 아이즈 야이치 등이 왕래하는 교류의 장을 제공했다. 특히 남편의 친구인 오기와라의 후원자가 되어서, 오기와라의 작품 『여자(女)』상은 소마 콧코를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또한 망명한 인도 독립운동가 라시 비하리 보스를 보호해주었고 장녀 토시코와 그를 결혼시켰다. 또 러시아 망명시인 바실리 예로센코도 받아들여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남편이 사망한 이듬해인 1955년 사망했다. 향년 78세.
고토쿠 슈스이(일본어: 幸徳 (こうとく) 秋水 (しゅうすい): 1871년 11월 5일(메이지 4년 음력 9월…고토쿠 슈스이(일본어: 幸徳 (こうとく) 秋水 (しゅうすい): 1871년 11월 5일(메이지 4년 음력 9월 23일)~1911년(메이지 44년) 1월 24일)는 메이지 시대의 언론인, 사상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다. 본명은 고토쿠 덴지로(일본어: 幸徳 (こうとく) 傳次郎 (でんじろう)). "슈스이"라는 이름은 스승 나카에 조민에게서 받은 것이다. 고토쿠 대역사건으로 처형된 12인 중 한 명이다.
미야자키 토라조(일본어: 宮 (みや)崎 (ざき) 寅 (とら)蔵 (ぞう): 1871년 1월 23일(메이지 3년 음력 12월…미야자키 토라조(일본어: 宮 (みや)崎 (ざき) 寅 (とら)蔵 (ぞう): 1871년 1월 23일(메이지 3년 음력 12월 3일 ~ 1922년(다이쇼 11년) 12월 6일)는 일본에서 쑨원의 신해혁명을 지원한 혁명가, 로쿄쿠시이다. 서양의 침략을 받고 있는 아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문명의 중심인 중국의 독립과 중국 민중의 자유가 선결되어야 하며, 그것이 세계평화로 이어진다는 신념 아래 대륙낭인으로 활동했다. 호는 도텐(일본어: 滔 (とう)天 (てん))으로 본명보다 많이 불린다. 로쿄쿠시로서 이름은 도추켄 우시에몬(일본어: 桃 (とう)中 (ちゅう)軒 (けん) 牛 (う)右 (し)衛 (え)門 (もん))이다. 도추켄 구모에몬의 대본을 작성하였다.
코야마 토요타로(일본어: 小 (こ)山 (やま) 豊 (とよ)太 (た)郎 (ろう): 1869년 4월 21일(메이지 2년 음력…코야마 토요타로(일본어: 小 (こ)山 (やま) 豊 (とよ)太 (た)郎 (ろう): 1869년 4월 21일(메이지 2년 음력 3월 10일) ~ 1947년 (쇼와 22년) 8월 4일)는 일본의 서예가다. 본명은 로쿠노스케(六 (ろく)之 (の)助 (すけ)). 군마현 다테바야시시 출신. 부친은 현회의원을 지닌 재산가였다. 상경 이전부터 품행이 좋지 않았다. 16세 때 상경해 경응학숙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각기병으로 퇴학. 1889년(메이지 22년) 재입학하지만 이듬해 다시 퇴학했다. 이후 자유당계의 장사가 되어 코노 히로나카, 호시 토오루 등의 정치운동을 도왔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에 우세하게 마무리되고 시모노세키에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3월 24일 일본은 청의 전권대사 이홍장에게 휴전이 아닌 강화조약 협상임을 강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코야마는 협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이홍장을 권총 습격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홍장은 안면에 부상을 입었고, 일본은 열강의 비판이나 간섭을 우려해 청과의 3주 휴전에 응했다. 코야마는 재판 결과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수감되었다가 1907년 2월 11일 황실전범증보제정에 의한 특사를 받아 일시 출옥했다.
후쿠다 히데코(일본어: 福 (ふ)田 (くだ) 英 (ひで)子 (こ): 1865년 11월 22일(음력 게이오 원년 10월…후쿠다 히데코(일본어: 福 (ふ)田 (くだ) 英 (ひで)子 (こ): 1865년 11월 22일(음력 게이오 원년 10월 5일)-1927년 5월 2일)는 막말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사회운동가다. 일본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져 "동양의 잔다르크"라는 별명이 있다. 원래 성은 카게야마(景山). 오카야마번 하급무사의 딸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은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15세에 소학교 교사 조교가 되었다. 그 뒤 모친 오빠와 함께 사숙을 열어 자제 교육에 뜻을 두었다. 18세 대 키시다 토시코의 연설에 감명받아 자유당에 입당하게 되었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1884년(메이지 17년) 증홍학사 폐쇄사건으로 메이지 정부의 독재와 탄압을 몸소 느낀 카게야마는 몸을 바쳐 반정부에 투쟁하기로 결심하고, 모친에게도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고향을 떠나 오사카로 향했다. 당시 자유당 지지자로 유명했던 야마토 호농 도쿠라 쇼자부로에게 도쿄 유학 비용 원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쿠라가 오사카에 부재중이라 낙심하고 있는데 마침 오사카로 하방한 코바야시 구스오를 만났다. 코바야시는 카게야마의 사람됨이 굳세고 입이 무거운 것을 높이 사 자유당 총리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소개했다. 이타가키는 카게야마에게 일체의 지원을 약속하고, 그 뒤 오사카에 돌아온 도쿠라에게 주선을 해 주어 학비를 출자해 주었다. 그 뒤 도쿄에서 사카자키 시란을 보호자로 삼아 그에게 생활 일체를 의지했다. 그 뒤 오오이 켄타로와 내연관계가 되어 아이를 한 명 낳았다. 그 뒤 내연남 오오이가 주도한 조선 침투음모에 가담했다. 하지만 음모 일체가 발각되고 카게야마도 폭발물을 운반한 죄로 체포된다(오사카 사건). 출소 이후 오오이와는 결별하고 『만조보』 기자 후쿠다 유사쿠와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빈곤으로 인해 사별했다. 그 뒤 후쿠다의 서생이던 이시카와 산시로와 교제했다. 그러는 동안 오오이와 여자실업학교, 츠노하즈 여자공예학교를 설립한다. 우치무라 간조의 자택에서 이루어진 츠노하즈 성경연구회에 참석해 성경공부를 했다. 하지만 1907년 우치무라가 반공적 색채를 드러내자 연구회 출석을 그만두었다. 그 직후인 3월 15일 『세계부인』 제6호에 「우치무라 선생 전상서」를 기고하여 이 글에서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신의 섭리는 일치할 수 있지 않는가, 또한 영혼의 구제보다 물계의 구조를 도모하는 것이 신의 진의가 맞지 않겠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교시를 요구했다. 자유민권운동이 우경화되어 메이지 정부에 포섭당하면서 망하고,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토시히코 등이 일본 사회주의의 개조가 되어 평민사를 설립하자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후쿠다는 사회주의로 완전히 전향한다. 평민사가 해산된 이후에도 아베 이소오 등과 월간지 『세계부인』을 발간하고 그 주필을 맡는 등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1927년 사망했다. 향년 61세.
우치무라 간조(일본어: 内村鑑三, 1861년 3월 26일 - 1930년 3월 28일)는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로, 무교회주의의…우치무라 간조(일본어: 内村鑑三, 1861년 3월 26일 - 1930년 3월 28일)는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로,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하였다.
치바 타쿠사부로(일본어: 千葉卓三郎, 1852년 8월 2일 ~ 1883년 11월 13일)는 일본의 무사, 메이지 시대의 자유…치바 타쿠사부로(일본어: 千葉卓三郎, 1852년 8월 2일 ~ 1883년 11월 13일)는 일본의 무사, 메이지 시대의 자유 민권 운동가. 민간 헌법 가운데 하나인 일본 제국 헌법, 통칭 이츠카이치헌법을 기초했다.
히라오카 고타로(일본어: 平岡浩太郎, 1851년 7월 21일 ~ 1906년 10월 24일)는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가로, 일본의…히라오카 고타로(일본어: 平岡浩太郎, 1851년 7월 21일 ~ 1906년 10월 24일)는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가로, 일본의 정치단체 겐요샤의 초대 회장이다.
오오이 켄타로(일본어: 大 (おお)井 (い) 憲 (けん)太 (た)郎 (ろう): 1843년 9월 2일(음력 천포 14년 8월…오오이 켄타로(일본어: 大 (おお)井 (い) 憲 (けん)太 (た)郎 (ろう): 1843년 9월 2일(음력 천포 14년 8월 10일)-1922년 10월 15일)는 일본의 정치가, 법률가다. 자유민권운동가로서 중의원의원을 역임했다. 1843년 9월 3일(음력 천보 14년 8월 10일) 부젠국 우사군 高並촌(현 오이타현 우사시)에서 농민 집안의 3남으로 출생. 본래는 高並씨였다. 어려서 초보적 수준의 한학을 배우고 1863년(분큐 3년) 나가사키에서 난학과 영어를 배우고 오오이 보쿠신의 의형제가 되어 오오이의 성을 자칭한다. 에도에 상경해 불어와 화학을 배우고 에도 막부의 개성소 사밀국에 출사한다. 보신 전쟁 당시 막군 포병대에 속해 관군과 싸웠다. 그 즈음 정교회의 세례를 받아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9년(메이지 2년) 미츠쿠리 린쇼에게 배우고 대학남교에 입학했다. 1874년(메이지 7년), 민찬참의원 설립을 두고 카토 히로유키와 논쟁한다. 1875년(메이지 8년) 원로원 서기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면관된다. 관료생활을 그만두게 된 뒤 애국사 창립에 참여하고 그 뒤 변호사로 변신, 자유민권운동 급진파 지도자로 활동한다. 1877년(메이지 10년) 의형 오오이 보쿠신의 양자로 입적된다. 1881년(메이지 14년) 6월, 불교단체의 무고로 사체가 발굴된 정교회 신자를 위한 변론활동을 하여 대심원에서 승소했다. 1882년(메이지 15년) 자유당에 입당했다. 1884년(메이지 14년) 치치부 곤민당을 지도한다. 1885년(메이지 18년) 조선의 내정개혁을 도모한 오사카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고 징역 9년을 선고받는다. 1889년(메이지 22년) 특사를 받아 출옥한다. 나카에 조민 등과 함께 구 자유당 세력 재규합을 시도하여 1890년(메이지 23년) 입헌자유당을 결성한다. 하지만 1892년(메이지 25년) 11월 탈당하고 동양자유당을 창당한다. 오오이는 보통선거를 주장하는 동시에 일본노동협회・소작조례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1893년(메이지 26년) 동양자유당을 해산하고 이듬해 열린 제3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 오사카 3구 지역구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오오이는 병략상략을 병행하여 부국을 도모한 일본이야말로 아시아 혁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감동한 사업가 우메야 쇼키치가 1894년(메이지 27년) 오오이에게 남양무역과 이민계획을 제안했고, 이에 동참한 오오이는 싱가포르를 시찰하고 1898년(메이지 31년)에는 도쿄에서 남양무역상회를 경영했다. 같은 해 자유당과 진보당이 합병하여 헌정당을 결성하자 참여하여 헌정당 총무를 맡았다. 1899년(메이지 32년) 가타야마 센 등과 보통선거기성동맹회를 결성, 보선운동에 시종일관 임하였다. 만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결탁해 대외강경론자로 표변했다. 1922년(다이쇼 11년) 10월 15일 향년 79세로 사망. 도쿄의 정교회 성당인 니콜라이당에서 장례를 치렀다. 저서로 『시사요론』(時事要論), 『자유략론』(自由略論)이 있다.
천두슈(중국어 정체자: 陳獨秀, 간체자: 陈独秀, 병음: Chén Dúxiù, 한자음: 진독수, 1879년 10월…천두슈(중국어 정체자: 陳獨秀, 간체자: 陈独秀, 병음: Chén Dúxiù, 한자음: 진독수, 1879년 10월 8일~1942년 5월 27일)는 중화민국의 정치인, 언론인이다. 공산주의 혁명가, 코민테른의 활동가이자, 트로츠키주의 정치인으로 중국공산당의 초대 총서기를 지냈다. 호는 스안(중국어 정체자: 實庵, 한자음: 실암), 자는 중푸(중국어 정체자: 仲甫, 한자음: 중보), 필명은 즈옌(중국어 정체자: 隻眼, 한자음: 척안)이다. 1915년 신청년을 창간하고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21년에는 리다자오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였다. 1923년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어 북벌에 참가하였으나, 장제스가 일으킨 4·12 사건으로 국공합작이 결렬되었으며, 이로 인해 코민테른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도성장(陶成章, 1878.1.24.-1912.1.14.)은 자(字)는 희도(希道), 호(號)는 환경(煥卿)이며…도성장(陶成章, 1878.1.24.-1912.1.14.)은 자(字)는 희도(希道), 호(號)는 환경(煥卿)이며, 한사(漢思), 기병(起兵), 지혁(志革), 손언(巽言), 도이산인(匋耳山人), 회계선생(會稽先生)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절강(浙江) 회계(會稽, 오늘날 소흥시紹興市) 도언(陶堰) 출신이다. 조적(祖籍)은 강서(江西) 구강(九江)이다. 청(淸) 말기 혁명 단체 광복회(光復會)의 창립인이자 지도자 중 하나이다. 진기미(陳其美)의 명령을 받은 장개석(蔣介石)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저서에 『절안기략(浙案紀略)』, 『중화민족역무소장사(中華民族力務消長史)』 등이 있으며, 탕지균(湯志鈞)은 『도성장집(陶成章集)』을 저술하였다.
아사노 나가코토(浅野長勲)는 막말의 다이묘이며 메이지 시대 초기의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사회사업가이다. 아키 히로시마…아사노 나가코토(浅野長勲)는 막말의 다이묘이며 메이지 시대 초기의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사회사업가이다. 아키 히로시마 신덴번 제6대 번주, 동국 히로시마번 최후의 번주이다. 훈등작위는 훈1등 후작이다. 신덴번주 시절의 이름은 나가오키(長興)이며 186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임관할 시절에는 그의 편휘를 받아 모치코토(茂勲)로 불렸다.
장스자오(중국어 간체자: 章士钊, 정체자: 章士釗, 병음: Zhāng Shìzhāo, 한자음: 장사쇠, 1881년 3월…장스자오(중국어 간체자: 章士钊, 정체자: 章士釗, 병음: Zhāng Shìzhāo, 한자음: 장사쇠, 1881년 3월 20일~1973년 7월 1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 사회활동가이다. 청나라 말기 호남성(湖南省) 장사현(長沙縣) 출신으로 자(字)는 행엄(行嚴), 필명(筆名)은 황중황(黃中黃), 청동(靑桐), 추동(秋桐)이다. 중화민국 초기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가 중 한 명으로 『민립보(民立報)』와 『갑인(甲寅)』의 주편(主編)이었고 대령의 정치 평론을 발표하였다. 1903년 소보안(蘇報案)이라는 사건으로 상해(上海) 조계에서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돤치루이(段祺瑞)의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 사법총장겸교육총장(司法總長兼教育總長), 중화민국국민정부(中華民國國民政府) 국민참정회참정원(國民參政會參政員),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전국인민대표상임위원(全國人民代表常任委員), 전국정협상임위원(全國政協常任委員), 중앙문사연구관관장(中央文史硏究館館長)을 역임하였다.
사쿠라이 마코토(일본어: 桜井 誠, 1972년 2월 15일~) 또는 본명 다카타 마코토(일본어: 高田 誠)는 일본 후쿠오카현…사쿠라이 마코토(일본어: 桜井 誠, 1972년 2월 15일~) 또는 본명 다카타 마코토(일본어: 高田 誠)는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야하타니시구 출신의 일본의 극우 성향의 활동가, 현 일본제일당 대표이다.
허샹닝(하향응, 중국어: 何香凝, 웨이드 자일스: Ho Hsiang-ning, 1878년 6월 27일 ~ 1972년 9월…허샹닝(하향응, 중국어: 何香凝, 웨이드 자일스: Ho Hsiang-ning, 1878년 6월 27일 ~ 1972년 9월 1일)은 중국의 혁명가, 페미니스트, 정치가, 화가, 시인이다. 남편 랴오중카이와 함께 그녀는 쑨원의 혁명 운동 중국동맹회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었다. 1925년 남편이 암살되고 1927년 장개석이 공산당을 박해한 후 그녀는 20년 동안 정당 정치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48년 그녀는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CPPCC 부회장(1954-64), 전국인민대표대회 부회장(1959-72),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장(1960-72), 전중국 여성연맹 명예회장 등 많은 고위직을 역임했다. 허샹닝은 중국예술링난화파(嶺南畫派)의 저명한 화가였으며 1960년대에 중국 예술가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국립 허샹닝 미술관은 1997년 선전에 개관했으며 그녀의 그림은 중국 우표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