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치다 미쓰오(일본어: 淵田 美津雄, 1902년 12월 3일 ~ 1976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군인이며, 기독교…후치다 미쓰오(일본어: 淵田 美津雄, 1902년 12월 3일 ~ 1976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군인이며, 기독교 전도사이다. 나라현 기타가쓰라기촌(현재의 가쓰라기시) 출신. 구제 나라 현립 우네비 중학교를 거쳐서, 1924년 7월, 해군병학교(52기)를 졸업했다. 진주만 공격에 있어서 공습 부대의 총지휘관으로, 제1차 공격대(및 예하의 수평폭격대)를 지휘하여「도・도・도」(ト・ト・ト, 전군 공격하라의 뜻) 및「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 기습에 성공함)이 후치다에게서 타전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해군 중좌였다. 개전 전, 제3항공전대 참모에서 2번째 항모 아카기(赤城)의 비행대장으로 취임했다. 이례적인「파격인사」였다. 동기이자 친구이며, 사실상의 작전 입안자였던 겐다 미노루(源田実)의 희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제1항공함대 기함 아카기에서는 1941년 11월 이래,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하기까지, 후치다 중좌(1941년 10월 승진), 이타야 시게루(板谷茂) 소좌, 무라타 시게하루(村田重治) 소좌라는 3명의 비행대장이 있는 이례의 배치가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때에는 미드웨이에 향하는 도중에 맹장염에 걸려 미드웨이 공습대의 지휘를 잡지 못하여, 항모 아카기에 남았다. 아카기에서 탈출할 때에 양쪽 발이 골절되었다. 일본 송환 후에는 요코스카 항공지휘관, 해군 대학교 겸 육군 대학교 교관을 거쳐서 군령부에 속했고, 제1항공함대 참모, 연합함대・남방군 참모를 맡았다. 종전시에는 해군 대좌였다. 패번 후에는 제2복원성(예전의 해군성)의 사실 조사부, GHQ의 역사과 촉탁으로서 전쟁 중의 자료 정리연구를 했다. 후치다의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에 대한 평가는 신랄하다. 1949년, 기독교에 입교한 이래 1966년에 은퇴하기까지 미국과 일본 각지에서 전도활동에 종사했다. 미국에서는「진주만 공격의 영웅」으로서 초대된 적이 많았다고 한다. 1967년, 고향에 은거했다. 1976년 5월 30일, 당뇨병의 합병증에 걸려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노우에 노리아키(일본어: 井上鑑昭, 1902년 (메이지 35년) 12월 3일 ~ 1994년 (헤이세이 6년) 4월…이노우에 노리아키(일본어: 井上鑑昭, 1902년 (메이지 35년) 12월 3일 ~ 1994년 (헤이세이 6년) 4월 13일)는 일본의 무도가이다. 신에이타이도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아이키도의 개조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그의 외삼촌이다. 다만, 원래의 성명은 이노우에 요이치로(井上要一郎)라고 표현되며, 노리아키는 다른 명칭이다.
하마자키 신지(일본어: 浜崎 真二, 1901년 12월 10일~1981년 5월 6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하마자키 신지(일본어: 浜崎 真二, 1901년 12월 10일~1981년 5월 6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히로시마현 구레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현역 시절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했고 선수 겸임 감독으로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령 공식전 출장 기록을 2014년 9월 5일 야마모토 마사(주니치)에 의해서 깨질 때까지 64년 간에 걸쳐 보유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신장은 150cm에서 160cm까지 등의 여러 설이 있어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키가 작은 선수로 여겨질 수 있다. 친동생 하마자키 다다하루도 히로시마 상업학교 시절 쓰루오카 가즈토 등과 함께 고교 야구 하계 및 춘계 대회에서 연패 달성했을 때의 선수(투수·내야수)로 활약했고 그 후 심판으로서 헤이와다이 사건의 주심을 맡아 역사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도 알려졌다.
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일본식 이름: 德光允도쿠미쓰 마사시, 德光翼도쿠미쓰 다스쿠, 1900년 12월…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일본식 이름: 德光允도쿠미쓰 마사시, 德光翼도쿠미쓰 다스쿠, 1900년 12월 21일~1952년 1월 30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정치인이다. 다른 이름으로 허윤(許允)이 있으며 법명은 경호(鏡湖), 호는 현주(玄州)이다. 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문시환의 뒤를 이어 제헌 국회 국회의원(부산부 갑)을 지냈다. 대한제국 경상남도 부산 출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피랍지에서 숨졌다.
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나다오 히로키치(일본어: 灘尾 弘吉 (なだお ひろきち), 1899년 12월 21일~1994년 1월 22일)는 12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이케다 하야토(일본어: 池田 勇人, 1899년 12월 4일 ~ 1965년 8월 13일)는 일본의 대장성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이다. 이케다는 자신의 "소득 배증 계획"으로 유명하다. 이 계획은 겨우 겨우 10년의 세월에 국내총생산으로 불린 일본의 경제 총생산을 두배로 늘이는 데 목표로 삼았다. 그는 또한 일본과 미국 사이에 관계를 향상시키는 도움을 주었다. 추가로 그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책임을 맡았다.
다바타 마사지(일본어: 田畑政治, 1898년 12월 1일 ~ 1984년 8월 25일)는 일본의 기자, 수영 감독이다.…다바타 마사지(일본어: 田畑政治, 1898년 12월 1일 ~ 1984년 8월 25일)는 일본의 기자, 수영 감독이다. 1964년 하계 올림픽 유치 활동의 중심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오자와 사에키(일본어: 小沢 佐重喜 (おざわ さえき), 1898년 11월 25일~1968년 5월 8일)는 10선 중의원…오자와 사에키(일본어: 小沢 佐重喜 (おざわ さえき), 1898년 11월 25일~1968년 5월 8일)는 10선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18선 출신의 현역 중의원 의원 오자와 이치로는 그의 장남이다.
위다푸(욱달부, 중국어 정체자: 郁達夫, 간체자: 郁达夫, 병음: Yù Dá Fū, 문화어: 유다부, 1896년 12월 7일…위다푸(욱달부, 중국어 정체자: 郁達夫, 간체자: 郁达夫, 병음: Yù Dá Fū, 문화어: 유다부, 1896년 12월 7일 ~ 1945년 9월 17일)은 중국의 소설가이다. 대표작으로 『몰락(沈淪)』, 『잃어버린 양(迷羊)』 등이 있는데, 『몰락』은 몰락해가는 신경질적 개인의 성적 추구를 집중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거듭나며, 퇴폐적이며 자아 폭로적인 경향에 대해 찬양과 비난이 엇갈리면서 열딘 문학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요시다 마사히로(일본어: 吉田 正廣 (よしだ まさひろ), 1895년 12월 8일~1972년 1월 10일)는 일본의…요시다 마사히로(일본어: 吉田 正廣 (よしだ まさひろ), 1895년 12월 8일~1972년 1월 10일)는 일본의 역사가이다. 주 연구 분야는 한국사와 향토사이다. 조선총독부의 주임관으로 활동했으며 조선농지령 시행 당시의 총독부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이들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거나,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참여했다. 사후, 여러 사회단체에서 정리한 주요 친일파 목록에 등재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배희범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일본어: 松下幸之助, 1894년 11월 27일 ~ 1989년 4월 27일)는 일본의 사업가로 현재의…마쓰시타 고노스케(일본어: 松下幸之助, 1894년 11월 27일 ~ 1989년 4월 27일)는 일본의 사업가로 현재의 파나소닉을 세운 인물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전기산업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종교는 장로교이다.
서춘(徐椿, 일본식 이름: 大川慈種오카와 지슈, 大川豊注오카와 호추, 1894년 11월 24일 ~ 1944년 4월 5일)은…서춘(徐椿, 일본식 이름: 大川慈種오카와 지슈, 大川豊注오카와 호추, 1894년 11월 24일 ~ 1944년 4월 5일)은 한국의 언론인이다. 2·8 독립선언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였지만 나중에 친일 언론인으로 변절했으며 호는 오봉(五峰)이다.
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무토 아키라(일본어: 武藤 章, 1892년 12월 15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필린핀 포로학대죄로 유일하게 중장으로서 교수형 판결을 받았으며,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서성달(徐成達, 1892년 12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이천이다.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 중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대한국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노동총연맹의 후보로 출마했으며 3위로 낙선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같은 선거구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전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이노 히로야(井野 碩哉, いの ひろや, 1891년 12월 12일~1980년 5월 19일)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관료로, 농림대신, 척무대신(拓務大臣), 법무대신, 재판관탄핵재판소장, 중의원 의원, 참의원 등을 지냈다. 도쿄부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区)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농상무성 관료가 되었다. 농림성 잠사국장(蚕糸局長) 을 거쳐, 1937년 기획청(企画庁) 설립에 수반해 기획청 초대 차장이 되었다. 그 후 농업 용수차관이 되었으며, 1941년 고노에 내각에 농림수산대신으로 첫 입각하였다. 도조 내각에서도 계속해서 농림수산대신을 지냈으며, 도조 내각에서는 척무대신도 겸임하였다. 194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45년 호국동지회(護国同志会) 결성에 참여하였다. 전 후, 1945년 9월 11일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요코하마의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공직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참의원 의원 선거(미에현 선거구) 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첫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파벌의 일원으로서 정계에 복귀했으며, 1959년 제2차 기시 내각 개조내각에서 법무대신이 되었다. 1965년 훈일등서보장(勲一等瑞宝章) 을 받았으며, 1967년 재판관탄핵재판소장이 되었다. 1972년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 을 받았으며, 1980년 사망하였다.
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김상덕(金尙德, 1891년 12월 10일(1891-12-10) ~ 1956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임정 국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었다. 호는 영주(令洲). 경상북도 고령 출신.
기무라 마사토미(일본어: 木村 昌福, 1891년 12월 6일 ~ 1960년 2월 14일) 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제국…기무라 마사토미(일본어: 木村 昌福, 1891년 12월 6일 ~ 1960년 2월 14일) 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키스카섬 철수작전을 성공시켜 유명해졌다. 시즈오카현 태생으로, 변호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토(近藤)씨였으나, 어머니쪽의 기무라씨를 성으로 삼았다. 해군병학교 41기로 입학해서 졸업성적은 최하위권이었고, 동기생으로는 구사카 류노스케가 있다. 병학교의 졸업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장교로서 출세코스인 해군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눈에 띠지 않는 해상 근무를 전전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뛰어난 실전능력으로 여러 작전을 성공시켜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특히 1943년 7월, 알류샨 열도상의 키스카섬에 고립된 병력을 미군 함대의 포위를 뚫고 구출하여 유명해졌다. 1944년 레이테 해전에서도 참가하여 일본의 참패해도 불구하고 홀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이후 당시 불가능하다고 여기었던 키스카섬 철수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해군통신학교 교장으로서 종전을 맞았다. 염전 사업을 하다 암으로 사망하였다.
세노오 기로(일본어: 妹尾 (せのお) 義郎 (ぎろう): 1889년 12월 16일-1961년 8월 4일)는 일본의…세노오 기로(일본어: 妹尾 (せのお) 義郎 (ぎろう): 1889년 12월 16일-1961년 8월 4일)는 일본의 불교운동가다. 히로시마현 히바군 토죠정 출신. “사유 없는 공동사회”를 제창, 불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 집안은 술도가를 운영했고, 원래 밥화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폐병 등을 앓으면서 1고를 휴학하던 중 인연이 생긴 두부 상인이 열성 법화신도여서, 그의 권유로 법화경을 읽게 되었다. 1918년 혼다 닛쇼가 주재하는 법화단체 통일단(統一団)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19년 통일단의 청년신자들을 중심으로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大日本日蓮主義青年団)을 조직, 기관지를 발행하고 순회강연을 다니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청년단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에 관계하게 되어,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련주의청년단은 1931년 세노오의 주도 하에 발전적 해산하고 초종파적인 신흥불교청년동맹(신흥불청)으로 거듭났다. 4월 5일 열린 결성대회에서 세노오는 동맹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흥불청은 그 강령에서 “석가의 찬앙과 불국토 건설,” “기성종단의 배격,” “자본주의 경제조직의 혁정(革正)과 당래사회의 실현” 등을 내걸고 노동운동, 소비조합운동, 반전운동, 반파쇼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36년 2월 세노오는 특별고등경찰에게 검거되었고, 1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동년 12월 재검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1940년 12월 투옥되었다. 전후에는 불교사회동맹(仏教社会同盟) 위원장, 평화추진국민회의(平和推進国民会議) 의장, 일중우호협회 동경도련회장 등을 지냈다. 1959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61년 8월 나가노현의 자택에서 죽었다.
니시무라 쇼지(일본어: 西村 祥治, 1889년 11월 30일 ~ 1944년 10월 25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니시무라 쇼지(일본어: 西村 祥治, 1889년 11월 30일 ~ 1944년 10월 25일)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아키타현 오가시 출신이다. 지역 유지의 집안의 13남매 중 다섯째로 4남인 니시무라는 아키타 중학교(오늘날의 아키타 고등학교)에 입학하나 재학중, 강압적인 기숙사 사감이 이를 참다 못한 기숙사생들에게 습격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요코테 중학교(오늘날의 요코테 고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어 해군병학교 39기로 입학한 니시무라는 1911년에 이를 졸업하고 순양함 아소, 전함 미카사, 히에이 등에 승무했다. 이후 1917년부터 1922년까지 해군대학교를 다니고 나서 여러 배를 거쳐 1929년에 구축함 시라쿠모의 함장이 되었다. 이어 26구축대를 시작으로 여러 소규모 함대의 사령관을 전전하다가 1940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니시무라는 어뢰를 활용한 전투에 능한 사람으로, 감시의 명인(見張りの神様)으로도 불렸다. 1944년 10월, 레이테 만 전투 당시에 제1유격부대 제3부대, 통칭 니시무라 함대의 사령관으로 참전, 25일 벌어진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불과 7척의 함대를 이끌고 79척의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연합 함대를 상대로 분전했으나 전사했다. 주력 함대인 구리타 다케오의 함대가 전투로 늦어져 미국 함대를 양쪽에서 공격하는 원래 계획이 실현 불가능함을 인지하고도 그대로 진격한 니시무라의 지휘에 대해서 니시무라를 긍정적으로 평 했던 새뮤얼 모리슨(en)이 '최저의 제독'이라고 혹평하는 등 무모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오자와 지사부로는 레이테에서 진지하게 제대로 싸운 자는 니시무라 뿐이었다고 평하는 등 평이 엇갈리는 면이 있다. 니시무라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2남과 3남은 요절했으며, 장남 세이지(禎治)는 해군 대위까지 진급했으나 1941년 필리핀 근해에서 이동 중 사고로 숨졌다. 한편 우익운동가 니시무라 슈헤이는 자신이 니시무라 쇼지와 인척관계임을 주장했다.
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 1889년 11월 28일 ~ 1982년 6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9년 8월…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 1889년 11월 28일 ~ 1982년 6월 2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9년 8월 30일부터 1940년 1월 16일까지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대장대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대신을 지냈다. 사위 가토 이치로 (법학자)는 전 도쿄대학 총장이며, 손녀 고미야마 요코는 일본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오키는 1889년, 나가노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6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여러 직책을 거쳐 1934년, 이재국장이 되었으며, 가야 오키노리, 이시와타 소타로와 함께 대장성의 특출한 세 인물이라 불렸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요청에 따라 기획원에 창설에 참여해 차장에 취임하였고, 1939년, 총재 취임과 동시에, 귀족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 대장 대신 겸 기획원 총재로 첫 입각하였고, 왕징웨이 정권에의 특파 대사 고문으로서 난징에 부임해 경제 정책을 지도하였다. 1942년, 도조 내각에서 초대 대동아 대신에 임명되어, 대동아 회의 등의 시책을 전개하였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수용되었으나, 1948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변호사로 일했으며, 추방 해제 후인 1953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에서 당선되어, 이후 네 차례 당선되었다. 1960년, 지바 사부로, 기무라 도쿠타로 등과 우파 집단 "소심회" (素心会)를 결성하여, 친 타이완파의 입장에서 일본과 중국 간의 국교 회복에 크게 반대하였다. 1968년, 나가노현 제2의 민간 방송 회사 나가노 방송이 설립되면서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구로다 나가미치(일본어: 黒田 長礼 (くろだ ながみち), 1889년 11월 24일 - 1978년 4월 16일)는 일본의…구로다 나가미치(일본어: 黒田 長礼 (くろだ ながみち), 1889년 11월 24일 - 1978년 4월 16일)는 일본의 화족(후작), 조류학자, 정치인이다. 지쿠젠 후쿠오카번주 가문인 구로다씨의 당주로, 초대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의 14대손이다. 일본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야나기사와 야스쓰구(柳沢保承, 1888년 12월 20일~1960년 10월 25일)는 일본의 화족이다. 야마토 고리야마번…야나기사와 야스쓰구(柳沢保承, 1888년 12월 20일~1960년 10월 25일)는 일본의 화족이다. 야마토 고리야마번 제6대 번주 야나기사와 야스노부(柳沢保申)의 장남이다. 부친의 양자 야나기사와 야스토시(柳沢保恵)의 뒤를 이어 백작 작위를 계승하였다.
스즈키 데이이치(일본어: 鈴木 貞一, 1888년 12월 16일 ~ 1989년 7월 15일)는 지바현 출신의 일본제국 육군…스즈키 데이이치(일본어: 鈴木 貞一, 1888년 12월 16일 ~ 1989년 7월 15일)는 지바현 출신의 일본제국 육군 군인으로, 통칭은 "신사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삼간사우" (三奸四愚) 라고 불렸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측근의 3간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송필만(宋必滿, 1890년~1978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학자, 정치인이다. 한민당의 창당멤버였으며 신익희, 윤보선,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일본어: 東久邇宮稔彦王, 1887년 12월 3일~1990년 1월 20일)은 일본의 구황족이자…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일본어: 東久邇宮稔彦王, 1887년 12월 3일~1990년 1월 20일)은 일본의 구황족이자 육군 군인이다. 계급은 육군 대장. 1944년 도조 히데키 후임으로써 일본 제국 부총리 겸 총리 권한대행 직을 이행하며 히로히토의 섭정을 잠시 지냈고 1945년 8월 17일부터 1945년 10월 9일까지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한 일본 제국의 제4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전후 일본의 첫 내각총리대신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패전 처리 내각으로서 헌정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족 내각을 조성하였으며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의 조인, 육·해군의 해체, 복원의 처리를 실시하였다. 총리 재임 시절 일본의 일억 총참회(一億總懺悔)를 주장했지만 악명높았던 치안유지법을 고수하려다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민주화 방침에 의해 오래가지 못했고, 역대 일본 내각 성립 이래 재임 최단 기간인 54일 만에 총사퇴했다. 총리 직을 사퇴한 후에는 본인의 궁호를 딴 이름의 신흥 종교인 히가시쿠니교를 창시하여 그 교주가 되었고, 이때, 나루히코 본인은 GHQ 측에 자신의 신적강하를 요구하여 황적에서 삭제되었다. 1990년 1월 20일에 향년 10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혼마 마사하루(本間 雅晴, 1887년[메이지 20년] 11월 27일 - 1946년[쇼와 21년] 4월 3일)는 일본의 육군…혼마 마사하루(本間 雅晴, 1887년[메이지 20년] 11월 27일 - 1946년[쇼와 21년] 4월 3일)는 일본의 육군 군인이다. 최후계급은 육군 중장. 영전은 종삼위·훈일등. 육사 19기 은사(恩賜)·육대 27기 은사. 태평양전쟁에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하였다. 영국통(通)으로 인도주의자로 연합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으나 죽음의 바탄 행진에서의 부하의 행위에 책임을 물려 전후 총살형에 처해졌다.
도쿠가와 구니유키(徳川圀順)는 일본 제국의 화족, 정치인, 육군군인이다. 계급은 육군 보병 소위. 작위는 후작에서 공작으로…도쿠가와 구니유키(徳川圀順)는 일본 제국의 화족, 정치인, 육군군인이다. 계급은 육군 보병 소위. 작위는 후작에서 공작으로 승작(1929년)되었다. 승작의 이유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에 의해 편찬이 개시된 대일본사가 미쓰쿠니 이래로 미토 후작가의 가업으로 지속되어 구니유키 대(메이지 시대)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도쿠가와 아쓰요시(徳川篤敬) 후작이며 어머니는 사토코(聰子, 다카마쓰 백작가 당주 마쓰다이라 요리토시 백작의 장녀)이다.
오카와 슈메이(일본어: 大川 周明, 1886년 12월 6일 - 1957년 12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국가주의자이다.…오카와 슈메이(일본어: 大川 周明, 1886년 12월 6일 - 1957년 12월 24일)는 일본의 사상가, 국가주의자이다. 1918년 동아경제조사국·만철조사부에 들어갔으며 이태 후 1920년 다쿠쇼쿠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1926년 〈특허식민회사제도연구〉로써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8년 호세이대학 대륙부(전문부) 부장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서양화에 대립하여 정신 면에서는 일본주의, 내정 면에서는 사회주의 혹은 통제경제, 외교 면에서는 아시아주의를 창도했다. 도쿄재판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으로서 A급전범 용의로 기소되었으나 매독에 따른 정신장애를 진단받아 소추면제되었다. 말년 쿠란 전문(全文)을 번역하는 등 이슬람 연구에 우수한 실적을 남겼다.
이토 분키치(일본어: 伊藤 文吉, 1885년(메이지 18년) 12월 15일 ~ 1951년(쇼와 26년) 11월 25일)는…이토 분키치(일본어: 伊藤 文吉, 1885년(메이지 18년) 12월 15일 ~ 1951년(쇼와 26년) 11월 25일)는 일본의 사업가, 화족이다. 귀족원 남작 의원. 아호(雅号)는 슌코(春光)。
아리마 요리야스(일본어: 有馬頼寧)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림대신, 일본 프로 야구 구단주, 일본중앙경마회 제2대 이사장을…아리마 요리야스(일본어: 有馬頼寧)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림대신, 일본 프로 야구 구단주, 일본중앙경마회 제2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옛 지쿠고 구루메번주 가문이었던 아리마가 제15대 당주. 작위는 백작. 선대 백작 아리마 요리쓰무의 장남이자 공작 이와쿠라 도모미의 외손.
우에시바 모리헤이(일본어: 植芝 盛平, 1883년 12월 14일 ~ 1969년 4월 26일)는 일본의 무술가로, 아이키도의…우에시바 모리헤이(일본어: 植芝 盛平, 1883년 12월 14일 ~ 1969년 4월 26일)는 일본의 무술가로, 아이키도의 시조이다. 아이키도측에서는 개조(開祖 카이소[*]), 큰스승(大先生/翁先生 오오센세이[*])이라고 부른다. 다나베시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여러 무술을 배우다가 러일전쟁 때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종군했다. 1907년 제대하여 홋카이도 개척민으로 건너갔다가 대동류 합기유술의 시조인 타케다 소카쿠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919년 홋카이도를 떠나 본토로 돌아가 신토계의 신흥종교인 오모토에 가입하여 그 무술사범이 되었고 여기서 첫 도장을 열었다. 1924년 오모토 교단의 성사(聖師)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함께 몽골로 선교 여행을 갔으나 중국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이듬해 자기 말로는 엄청난 영적 개명을 경험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 무술 실력이 갑자기 더욱 고강해졌다고 한다. 1926년 도쿄로 이사가서 아이키카이 홈부 도장을 세웠다. 1931년 코부칸(皇武館)이라는 도장을 세워 황족, 군인, 사업가 등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명성을 쌓아갔다. 1942년 일본의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전쟁을 비판하며 전시정책의 일환인 대일본 무덕회(大日本武徳会)의 통제를 거부하고 은거하기도 했다. 대전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일본 안팎 전세계에 아이키도 전파에 힘썼다. 196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도고 시게노리(일본어: 東郷 茂徳, とうごう しげのり, 1882년 12월 10일 ~ 1950년 7월 23일)는 일본 제국의…도고 시게노리(일본어: 東郷 茂徳, とうごう しげのり, 1882년 12월 10일 ~ 1950년 7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 대신이었다. A급 전범 중 유일한 조선계 일본인이다. 조선인 혈통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독일 대사, 소련 대사를 거쳐 외무대신을 두 번 지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정한론을 주장하였고, 1943년의 포츠담 회담 때는 천황 히로히토에게 회담 내용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전범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병사했다.
산조 긴테루(일본어: 三条公輝, 1882년 12월 2일 ~ 1945년 11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화족이자 귀족원…산조 긴테루(일본어: 三条公輝, 1882년 12월 2일 ~ 1945년 11월 10일)는 일본 제국의 화족이자 귀족원 의원이다. 작위는 공작. 도쿄 제국 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하시구치 고요(일본어: 橋口五葉, 1880년 12월 21일 ~ 1921년 2월 24일)는 일본의 미술가이다. 신판화("새로운…하시구치 고요(일본어: 橋口五葉, 1880년 12월 21일 ~ 1921년 2월 24일)는 일본의 미술가이다. 신판화("새로운 판화")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우키요에의 부흥을 이끈 이 운동에서 그는 목판화 14점을 제작했으며, 이 작품들은 해당 장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야마카와 히토시(일본어: 山川 均 (やまかわ ひとし): 1880년 12월 20일 - 1958년 3월 23일)는 일본의…야마카와 히토시(일본어: 山川 均 (やまかわ ひとし): 1880년 12월 20일 - 1958년 3월 23일)는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 재야 경제학자다.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의 지도적 이데올로그였다.
우치다 노부야(일본어: 内田信也, 1880년 12월 6일 ~ 1971년 1월 7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선박…우치다 노부야(일본어: 内田信也, 1880년 12월 6일 ~ 1971년 1월 7일)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선박 사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정계에도 진출해 미야기현 지사, 오카다 내각의 철도대신, 도조 내각의 농상대신, 제5차 요시다 내각의 농림대신을 지냈다. 조카 무라카미 이치로 (村上一郎) 와 이시노 신이치 (石野信一)는 각각 문예평론가와 대장성 사무차관과 고베 은행장으로 활동하였다.
호한민(胡漢民, 1879년 12월 9일~1936년 5월 12일)은 중화민국의 정치가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가…호한민(胡漢民, 1879년 12월 9일~1936년 5월 12일)은 중화민국의 정치가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광동 번우 사람으로, 근대 시기의 민주 혁명가이며 정치인이다. 일본 유학중에 손문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중화민국정부 총참의 겸 문관장, 정치부장, 육군대원수대본영 총참의, 총통비서장 등을 지냈다.
나가이 가후(일본어: 永井 荷風 나가이 카후[*], 1879년 12월 3일 ~ 1959년 4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나가이 가후(일본어: 永井 荷風 나가이 카후[*], 1879년 12월 3일 ~ 1959년 4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 수필가, 번역가이다. 주로 메이지 시대와 쇼와 시대에 걸쳐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 《힘겨루기》(腕くらべ), 《묵동기담》(濹東綺譚) 등이 있다. 본격적으로 문학에 뜻을 둔 것은 1901년경이며, 1909년 12월부터 도쿄 아사히 신문>에 <레이쇼>를 연재, 다음해부터 <미다분가쿠>의 창간에 참가했다. '와세다분가쿠'의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탐미주의로 기울어져서 이른바 미다파의 신인들에게 탐미·퇴폐의 문학 취미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후에 에도적 화류 세계에의 탐닉으로 자폐하여 많은 화류소설의 걸작을 낳았다.
오기와라 로쿠잔(荻原 碌山, 1879년 12월 1일 ~ 1910년 4월 22일)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조각가이다. 본명은…오기와라 로쿠잔(荻原 碌山, 1879년 12월 1일 ~ 1910년 4월 22일)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조각가이다. 본명은 오기와라 모리에(荻原 守衛)이다. 일본에서 모더니즘 조소를 개척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있으며, 주로 동상을 작업했다.
노마 세이지(野間 清治, 1878년 12월 17일 ~ 1938년 10월 16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출판인이다. 출판사…노마 세이지(野間 清治, 1878년 12월 17일 ~ 1938년 10월 16일)는 일본의 작가이자 출판인이다. 출판사 고단샤의 설립자로, 많은 유명한 신문과 잡지의 설립자였다.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년 12월 3일 ~ 1967년 9월 4일)는 일본의 한국학 연구자이다. 니가타현 출신이다.…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년 12월 3일 ~ 1967년 9월 4일)는 일본의 한국학 연구자이다. 니가타현 출신이다. 1902년 7월 도쿄 제국대학 지나(중국)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03년 9월 규슈 일보사 주필이 되었다. 1905년 2월, 대한제국 관립 한성중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08년에는 관립 한성고등학교 학감(學監)이 되었다. 1911년,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가 되었고, 1916년 5월 대구고등보통학교장을 지냈다. 1919년 12월,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 경성제국대학 창립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신설되자 교수로 취임하였고, 조선어학과 문학 강좌를 담당하였다. 1950년 덴리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고, 조선학회 창립을 주도하여 부회장이 되었다.